점심 먹고 오후 늦으막히 집을 나섰다. 꼬마전철을 타고 다섯정거장, 센조쿠이케라는 곳에 내렸다. 이케(池)는 글자 그대로 연못인데, 센조쿠이케는 누가 발 닦은 곳인지 모르지만 '발 닦은 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서울의 세검정이 잠시 생각났지만, 전철역 바로 가까이 있는 센조쿠이케는 제법 큰 호수였다. 생각보다 훨씬 좋았던 저녁산책이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 중고책방이 눈에 보였다. 일본에 와서 서점을 여러곳 봤지만(진짜로 '봤지만'- 밖에서 간판만 쳐다보는 것을 의미함;;) 들어가서 꼼꼼히 들여다본것은 사실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이유는 단순하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_-;; 책구경을 아무리 한들 뭐하나, 문맹인 것을. 쯧쯧. 아무튼 오늘은 어쩐지 책구경을 좀 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그 책방 체인점들이 만화책을 많이 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 가면 반드시 H2 전질을 사오리라!"고 마음먹은지 어언 몇년이런가. 마침 남편이 책꽂이에서 우연히 H2를 발견했고, 나는 일단 1권과 2권을 뽑아들었다. 사고야 말았다! 문제는 읽는 것.. ;; 하지만 언젠가는 읽을수 있겠지, 혹은 그림만 보면 되지 어쩌구저쩌구 속으로 궁리를 하면서 사들고 집에 왔다. 딸아이한테 보여줄 세모꼴 팝업 그림책 따위도 몇권 얹었다.
소장하고픈 만화책이 몇가지 있다. 죽어도 갖고 싶은 것은 H2. 아다치 미츠루를 아주아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는 H2가 먼저 출간된 탓에 해적판 '터치'에 한때 'H1'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던 황당한 일도 있었다지만, 사실 아다치의 출세작은 '터치'다. 일본 아줌마친구들한테 물어보면 '터치'는 알아도 H2는 대부분 모른다(아줌마들, 무식하게 만화도 안 보고 뭐하고 살았는지;;). H2의 대사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명대사들이라서 몽땅 외워버리고 싶을 정도!
H2 다음으로 갖고픈 것은 '후쿠야당 딸들'. 저자 이름은 까먹었다(바부팅이). 국내 만화 중에서는 강경옥의 '열 일곱살에'(음... 기억이 가물가물... '아이엔지-현재진행형'이었던가;;). H2와 '후쿠야당 딸들', 그리고 강경옥의 만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재도 주제도 그림체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절제된 대사들. 절제된 말이라고는 할줄 모르는 주제에, 혹은 그런 주제인 탓에, 저들의 함축적인 대사가 강력한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절제된, 절제된, 절제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전질 갖고 있고, 마츠모토 레이지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4권까지 갖고 있다. 그 뒷부분은 어찌하여 안 나오는 것인지? 지금쯤은 후속편이 나왔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