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동안에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밑바탕으로 하는 꿈이나 이상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도구로 문학이 존재한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샐러리맨의 세계를 거기에서 또다시 재연하다니 넌덜머리가 났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세계이기에 뛰어든 것이다. ...내가 바라던 삶은 좀더 남자답고 -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좋다 - 좀더 긴장되고 좀더 산뜻한 그 무엇이 아니었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재미없는 소설에 반했습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라는 소설을 작년에 비교적 재미있게 봤지요. 흥미진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문장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허걱... <천년 동안에>는 두 권으로 이뤄진, 아주 긴 소설입니다. 판타지 소설이라면 10권 짜리라도 보겠지만, <천년 동안에>는 아주 지루합니다. 저처럼 얄팍한 취미를 가진 사람한테는 참 재미없는 소설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사람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2인칭 시점으로 돼 있는 소설이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겨울까요 ^^

인용해놓은 것은 마루야마의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에서 따온 겁니다. 아쿠타카와상을 탄 뒤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고 하네요. 우리나라에는 이문열 같은 작자들이 보수의 탈을 쓰고 범죄적인 수준의 곡학아세를 서슴지 않는데 일본에는 그래도 이런 작가가 살아있구나. <천년 동안에>는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저는 마루야마의 철학과 투쟁에 반했습니다.

소설은 세 가지 시간 축을 돌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무'인데, 천년을 살아온 나무입니다. 나무가 지내온 천년의 흐름, 나무가 내다본 한 인간의 인생역정 28년, 나무가 미래를 내다보는 동안의 한나절의 시간을 세 축으로 해서 소설은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별로 중요치 않구요 ^^
나무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하는 것은 '고이지 말고, 끊임없이 흐르라'는 겁니다. 군국주의와 환경파괴, 어리석은 대중과 그들에 기반을 둔 권력의 절대화. 이 어리석은 시대와 사회,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과 중우정치, 집단 우선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쉬지 말고 흘러라.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마루야마의 정신은 아주 높고, 고양돼 있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이 소설이 고이즈미 집권 이후 현재의 일본 정치상황을 쪽집게처럼 예견해놨다는 겁니다. 대중을 휘어잡는 정치인의 등장이 곧바로 군국주의화, 전쟁의 길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만, 과연 '21세기의 묵시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매몰되지 않으려 하는 소설가의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