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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만물의 척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세상 만물을 만드셨으니 인간은 세상만물의 주인이다- 이런 '인간 제일주의'의 편견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내놨을 때 이미 인간이 제일이라는 생각은 깨져나갔어야 했는데 다윈이 어정쩡하게(자기가 속해있고 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서양 제국주의 문명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탓에) 진화론 속에 '진보'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놓는 바람에, 창조론을 뒤집을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제일주의가 깨지지 못했다는 야그.
그럼 진화란 무엇인가. 진화는 실재하는 사실(현상)이지만 진화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한다. 진화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일 뿐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세상만물로 들어찬 '풀 하우스'이지 직선으로 연결된 위계질서의 사다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진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풀하우스' 안에서 변이의 정도가 어떻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지 다종다양한 생물 군상을 무시하고 '고등한 인간'의 오만함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데 왜 '진화'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들 오해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통계의 함정'이 숨어 있다. 9명의 가난뱅이들과 1명의 빌 게이츠가 있다. 9명은 오늘 먹을 빵도 없는데 빌 게이츠는 혼자 연간 10억달러를 벌었다면 이들 10명의 연평균소득은 자그마치 1억달러! 이 '평균'이란 과연 유효한가? 아니다, 9명의 가난뱅이들의 진실을 숨기고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저런 통계의 장난들이 진화론을 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무지하게 많은 박테리아들과 원생생물들, 인간보다 '하등'하고 심지어 포유류보다도 못하고 척추동물보다도 못난 것으로 간주되는 숱한 생명체들이 몽땅 무시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화는 곧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고등한 생물로 향한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점, 인간을 위해 이 세상 만물이 복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인간은 지구가 굴러가다보니 생겨난 고등생물일 뿐이라는 점. 이렇게 주장해서 남는 것이 뭐가 있느냐. 아메바로부터 감사 편지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사실을 여러 통계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입증해보임으로써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은 다양성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직선의 진화를 주장한 서구문명의 오만함은 곧 제국주의의 오만함이요, 오늘날과 같은 망가진 지구를 만든 물신주의의 오만함이 아니던가. 다양성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깨는 것은 서구문명의 오만함을 반성하자는 것이요, 인간을 위해서라면 이 지구야 어떻게 되든 좋다는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과학평론가들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다. 물론, 평론가 아닌 과학자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해 조금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인간복제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비관론자라는. 그런데 이 책은, 굴드가 과학저술가로서 왜 유명한지 대번에 알아차리게 해준다.
돌리 탄생 이후 저자가 끄적끄적했던 몇 편의 짧은 글들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깊이와 지적인 도전,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싸움꾼의 기질 따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알기 쉽게 통계의 허점들을 지적하는 것도 그렇고, 다소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자존심도 그렇고,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쳐나가는 논리력도 그렇고...일단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저자의 '좌파적 진화론'에 감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