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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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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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잔치- 성우신서 7
조우현 / 성우출판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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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통 향연이라고 번역되는 심포지움. 조우현의 번역이 가장 낫다고 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답게 플라톤 대화편중 가장 아름답다. 근데 얼마전 문지 스펙스럼인가에서 <향연>이란 제목으로 다시 원전번역되어 나왔다. 아마도 그게 낫겠지?
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개정 증보판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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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중기 대화편. 정치학과 철학, 문예학에 있어 모두 중요한 책. 좀 두껍지만 훌륭하고도 중요한 책.
소피스테스
플라톤 지음, 김태경 옮김 / 한길사 / 2000년 1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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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후대철학의 논의가 시작되는 책. 형상론과 유물론의 싸움, 있는 것과 인 것의 차이. 형상의 나눔과 공유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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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게 중요한 문제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머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지. 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인가? 이정우씨를 포함한 모든 논자들이, 유목주의가 자본의 유목주의를 가리키는 한 대답은 예스인 것 같다. 1.유목주의1(자본의 유목주의) = 침략주의 그런데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유목주의2)이다. 그들이 자본을 대변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홍윤기씨는 적어도 유목주의2가 유목주의1과 문제의식 수준에서 같은 곳에 놓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국가와 유목민의 대립이 중요하다. 물론 이정우씨는 아니라 한다. 이정우씨는 유목주의1과 유목주의2의 대립이 들뢰즈/가타리 문제의식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2.국가 <=> 유목주의1, 유목주의2 (홍윤기) 유목주의1 <=> 유목주의2 (이정우) 이렇게 보면 홍윤기씨의 주장엔 유목주의1과 유목주의2의 구분이 빠져있고 이정우씨의 글에는 국가 대 유목민의 문제의식이 없다. 하지만 아니다. 두 가지 국가의 외부를 말하는 이정우 도식은 이미 국가와의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 3.국가 <=> 유목주의1 <=> 유목주의2 (이정우)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와 유목주의 일반의 구분만큼이나 유목주의1과 2의 구분이 중요하냐는 것. 내가 알기론 매우 중요하다. 유사유목주의에 맞서는 건 국가에 대한 저항만큼이나 들뢰즈/가타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자본의 시대에 사는 철학자가 어찌 아니그럴 수 있겠는가? 자본에 반대하고 유목주의에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이 둘의 구분에 당연히 사활을 걸 것이다. 당연히 이정우씨도 이걸 강조하였고. 홍윤기씨는 이정우씨에게 들뢰즈/가타리의 문제의식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글들로만 보면 정작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은 홍윤기씨이다. 홍윤기씨는 어떻게 자본과 전투할 것인가를 고민함으로써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인 들뢰지/가타리는 보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적 도주선을 개척하려 무척이나 노력하지 않았던가. 이제 남은 것은 유목주의2가 정치적으로 유효한가라는 문제. 이제까지의 논쟁은 결국 유목주의2의 정치적 효과를 통해 판단될 것이다. 홍윤기씨등은 그걸 믿지 못하는 거고 노마디즘 쪽은 그걸 발휘하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두 가지를 구분한 건 맞는데 한국에서 그게 구분될까가 문제이고 구분되는 활동들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가가 문제이다. 들뢰즈는 참 좋아하는(잘 아는 것과는 별개로-_-) 철학자긴 한데 이부분 좀 회의적이다. 그들이 관념적이어서도 아니고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도 못되었기 때문도 아니라 한국에서 진정 유목주의2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수유연구소나 조정환씨, 네그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 (음.. 마지막 문장은 그냥 넘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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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5-1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어.
그 곳에선 잘 지내니.
널 생각하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된지, 1년이 좀 넘은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은, 너의 흔적을 찾아보곤 한단다. :)
 
 전출처 : 릴케 현상 > 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2006년 06월 05일   홍윤기 동국대 이메일 보내기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린 황해문화 최근호 ©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서울신문에 보도된 노마디즘 논쟁 관련 기사 ©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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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들뢰즈/가타리 반대로 뒤집어 왜곡"

2006년 06월 05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수목형 사유란 나무가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동일화하고 포개는 사유, 유일한 중심을 상정한 사유를 의미함-편집자)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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