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배용준 때문에 난리다, 일본은. 하긴, 지난 3월 일본에 온 이래, 지금껏 텔레비전만 틀면 한국드라마, 음식코너에선 한국요리 소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으니, 새삼 '난리다'라고 하기도 어색하지만. 그런데 어제 오늘 방송 분위기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도 그럴것이, 그넘의 '욘사마'가 뭔지... 10명이나 다쳤다고 하니 언론들이 떠들어댈만도 하다.
이제부턴 '한국 헐뜯기'로 돌아가는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일본이란 나라,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고, 서로간에 구원(舊怨)도 많다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욘사마 하나로 모든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어제오늘 여기 방송 분위기를 보자면- 후지TV에선 한국의 방송보도를 잠깐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MBC에서 서울 시민 인터뷰 한 내용. "사실 여기선 배용준씨 가지고 그렇게는 (난리를 치는 건) 아니잖아요. 잘 이해는 안 가요"라는 서울 아줌마의 코멘트. "한국에선 배용준 갖고 그렇게 난리를 안 친다"는 것이 후지TV 뉴스에서 하고팠던 얘기였을 것이다. 신문들도 어제의 '불상사'를 떠들어댔고, 몇몇 신문에선 유감을 표현한 배용준의 기자회견을 '사죄회견'으로까지 지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후지TV는 토요일마다 '천국의 계단'을 내보내고 있고, 아사히 TV건 뭐건, 일본 방송들 경쟁적으로 한국드라마 방영하는데 아주 웃겨 죽겠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며칠전 세어봤더니, 지금 일본에서 방영하고 있는 한국드라마가 여덟개인가 그렇다. 배용준이 드라마에 그렇게 많이 출연했는지, 일본 와서 알았을 정도니깐. 후지TV 등등이 어제오늘 욘사마 열풍을 조금 '꼬아서' 보도한 것도, 내가 보기엔 그닥 마땅찮다. NHK에서 하도 겨울연가를 팔아먹으니깐 그거 꼴보기 싫어 저러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좀 든다. 자기들끼리도 경쟁을 하고 있으니깐.

한국에 있을 때 동남아 한류 어쩌구 하면 그냥 그저그런 정도인줄만 알았다. 아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욘사마 열풍, 한류 붐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을 못할 것이다--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겨울연가 포스터는 일본 전역에 몇장이나 깔려있는 것이기에, 어딜 가든 욘사마 얼굴을 보게 되냐고 -_- 며칠전 큐슈에 갔다가, 오르골 가게에 들렀다. 역시나, 또 겨울연가 포스터. 그리고 "겨울연가 주제가 오르골 있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판.
이런 정도는 너무나너무나 당연한 거라서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늘 만나는 아줌마 친구들이 있는데, 배용준은 기본이고 원빈 권상우 이병헌 얘기 다 나온다. 서울에 있는 언니들하고 권상우가 좋네 원빈이 좋네 떠들다가 여기 아줌마들 만나면 대화가 그대로 이어진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  얘기를 하다보니 탤런트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요사이 한국드라마 모르면 일본사람들하고 못 논다. 오죽하면 내 주변 일본아줌마들 사이에선 내가 기무라 타쿠야를 좋아한다는 것이 '뉴스' 취급을 받을까. 아줌마들끼리 욘사마 얘기 실컷 하다가, "이치고상(내 일본이름)은 기무라 타쿠야 드라마를 본대요, 글쎄!" 자기들끼리 이러면서 웃는다. 기무타쿠 예전 드라마들 너무 재미있는데, 솔직히 요샌 일본 드라마들 재미 없다. 현재 TV에서 방송해주는 드라마는 한개도 안 보고 있다. 일본어가 딸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영 없거든. 그도 그럴 수밖에. 온통 한국드라마 수입해다 내보낼 뿐, 자기네들 드라마에는 신경 안 쓰고 있으니깐.

'겨울연가'. 서울에 있을 때 물론 나도 이 드라마를 열심히 봤었다. 좋아하냐고? 안 좋아한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저 드라마, "재밌었다" 혹은 "화면이 이뻤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좋은 드라마' '훌륭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도 얘기 안되는, 진정 말안되는 스토리. 사람의 기억이 무슨 포스트잍이냐, 떼었다 붙였다 하게.. 후까시도 한두번이지,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는 드라마에, 해도해도 너무하는 감독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어쩌랴. 저것이 '효자'인 것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발산한 효과 덕에 나의 일본생활이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단 주변 사람들이 우호적이고, 한국에 대해 관심들이 많고, 자기들 입으로도 '요즘 한국 붐이라서 관심이 많이 생겼다'고들 한다. 한국 얘기 해주면 재밌어하고, 특히나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면 재밌어한다. 한국에서 온 내가 해주는 얘기가 아줌마들한테는 나름대로 '특종'인 셈이니깐.
그래서 나는 종종 아줌마들한테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얘기, 예를 들자면-- 이영애는 한국에서 톱스타다, 이영애 데뷔했을 때 진짜 이뻤다, 원빈은 꽃미남이다, 요새 권상우 잘나간다, 최지우는 발음이 안 좋다, 뭐 이런 거. (웃기게도 여기 사람들도 최지우 혀짧은 것을 안다. 혀짧은 발음은, 언어가 달라도 구별이 가는 모양).

이렇게 한류는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궁금한 것은, 한류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겠슴둥? 분명한 것은, '욘사마'로 시작된 한류가 일본에서 적어도 한국 꽃미남 탤런트/배우들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요리,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분명 높아지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 구구절절이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는 드라마 때문이다. 초난강(요샌 일본 사람들도 '쿠사나기 츠요시'가 아니라 '초난강'이라고 부른다)이 방금전 한국말로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늙은 엄마 품에 안기는 장면이 나왔다. 자이니치, 즉 '재일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한 단막극인데 초난강이 조선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한류는 필히 '역사'에 닿을 수 밖에 없다. 몇달전 이곳 TV에선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과 사랑을 다룬 연속극이 방송되기도 했는데, 꽤 유명한 여자탤런트가 주연을 맡았지만 드라마 자체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도(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자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겨울연가'는 확실히 말도 안되는 드라마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통해 한류가 형성되고, 그 흐름이 결국 일본 내에서 '터부'를 건드리고 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역사문제가 터부였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자이니치 문제(총체적으로 역사문제)는 분명 터부였을 것이다. 그 금기가, 겨울연가 혹은 욘사마라는 희한한 계기를 통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철벽같던 모든 금기들은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깨지기 마련이다. 일본에서 한류가 그런 균열을 확대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의 욘사마열풍을 아마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의 언론들도 양국에서 터부를 건드리는 작업을 좀 해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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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1-2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걸 보면, 역사는 확실히 우연들이 많이 개입하는 것 같아요.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 (이게 아닌감???)

로드무비 2004-11-2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웬 글을 그렇게 잘 씀둥?^^)

얼마 전 춘천에 닭갈비 먹으러 갔더니 겨울연가 때문에 단체관광 온

일본 아줌마 한 떼가 명동닭갈비라는 집 전체를 빌렸더군요.

아무튼 그들 때문에 외화 수입이 막대한데 예쁘게 보고 진심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으로 경멸하면서 벗겨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미완성 2004-11-2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신기해요. 왜 하고 많은 드라마 중에서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게 '겨울연가'인지 말이예요. 제 생각으론 모래시계같은 드라마가 성공해주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라는 바램이 있긴 합니다만.

TV를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한국 언론은 그야말로 '욘사마 열풍'의 단면만을 보여주지요. 봐라 어떠냐 얘가 일본가서 돈 엄청 벌어온다, 봐라 욘사마가 뜨니까 일본 아줌마들 자지러진다, 인터뷰할 때도 욘사마가 얼마나 좋느냐 물어보면 일본 아주머니들 대부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랑해요!'라던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만 나와요. 그러면 보는 저로썬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싶으면서도 뭐 춘천같은 곳에선 그야말로 일본인 관강객들 덕에 닭갈비 소비가 성황이라 하니 사람들이 사람으로 안보이고 '다 저 사람들이 와서 우리 돈벌어주는 거지..'하며 돈으로 보이구요. 이런 열풍을 가지고 더 발전시키려 하기보단 여기에 어떻게 기대어 돈 좀 벌어보고 이걸로 화제꺼리 삼아 가릴 거 가리고 숨길 거 숨기려고만 드는 것 같고....



어찌되었거나, 일본에서의 한류열풍이 그리 대단하다니 정말 신기한데요? mbc에서 해주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도 나고..딸기님 생활에 보탬이 되어준다니 그거야말로 가장 큰 좋은 점이로군요.


로즈마리 2004-11-2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도 남대문 시장이나, 명동 등 관광거리에서는 겨울연가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는 걸 봅니다. 우리는 대개 신경 못 쓰지만, 지나는 일본인들을 의식한 포스터들이겠죠. 일본 고교생들이 수학여행도 많이 오는가봐요. 가끔 마주치는 일본인들은 대개 한국어를 잘 하고, 스스로도 한국어 배우는 게 일본에서 붐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소통이 되는 건 분명 욘사마 덕분일듯. 정말 딸기님 말씀대로 이 한류가 터부시되었던 역사문제와 연결될 수 밖엔 없을 듯 해요. 얼마 전 한 일본인과 이화여고를 가서 유관순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그는 그 이름을 기억하려 하더군요.. 좀 의외였습니다. 이순신 이야기도 좀 했구요. 첨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좀 불편했었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물어볼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시 역사쪽 문제가 건드려질 수 밖엔 없는 것 같아요.

하이드 2004-11-28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 중국권도 난리지요. 제작년 홍콩 출장 갔을 적에 OECD rep 들이 다 모였는데, 노래방에서 보아 노래, 신승훈 노래 부르더라구요. ( 전 모르는 노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엽기적인 그녀에 나왔던 노래) 그러고 보니 그때는 가을동화 하고 있을 적이었는데, 겨울연가도 역시나 히트. 그것 때문에 한국말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홍콩 친구가 지난달에 나왔다 들어가기도 하구. 그런데, 대만에서는 '대장금'이 최고 인기라는데,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인기 있는건 참 좋아보여요.

저도'겨울 연가' 는 한 번도 안 봤습니다. -_-a

딸기 2004-11-2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장금은 요새 NHK 위성방송에서 해주고 있어요. 한국에서 대장금 보다가 일본 오느라고 뒷부분 못봤는데, 지금 저희집은 위성이 없어서(위성이 있는 집도 있냐 -_-;;) 결국 또 못보고 있네요. 대장금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 인기인가봐요. 한국드라마가 워낙 많이 들어오니깐, 앞으로 품질이 좀 가려지겠죠, 이곳 시장에서도.

한국드라마 좋아하는 어떤 아줌마한테 제가 이것저것 얘기해주면서 "내년에 일본에서도 방송될 드라마가 있는데, 대장금이라고--" 했더니 이 아줌마가 "아, 장금이, 지금 위성에서 보고 있어" 하더군요. 이 아줌마는 신승훈 팬이래요. ^^

벗겨먹는것도 좋은데(국익??), 하지만 근시안으로만 보면 장기적으론 결국 안좋잖아요. 그 점을 잊지 말고서, 벗겨먹더래도 수준 있게 벗겨먹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지금 일본내 한류를 피상적으로 '욘사마 뉴스'로만 다루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예요. 아직까지는요. 하지만 앞으로 이 한류가 굽이를 치겠죠. 흐름이 높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구부러지고 할 거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 매니아가 되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만이 매니아들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거거든요, 결국.

저는 다방면에 매니아;;라기보단 빠순이 광팬질을 해봤기 때문에 그 심리를 알아요. 아마도 욘사마 좋아하는 일본 아줌마들, 앞으로 한국을 미워하거나 혹은 무관심해하긴 힘들 겁니다.^^

숨은아이 2004-11-28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토요일에 남이섬 들러 두밀리의 통나무집으로 엠티를 다녀왔어요. 체감온도가 영하를 육박하고 진눈깨비 휘날리는 악천후였는데도 관광객 수가 대단하더군요. 남이섬은 오로지 욘사마 지우히메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느낌... ㅎㅎ

에레혼 2004-11-2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생생한 일본 리포트이군요.

'욘사마' 열풍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도, 실제로 일본에서의 체감 열기는 어느 정도인지, 우리 언론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제법 부풀리고 있는 게 아닌가 반신반의했거든요.....

생생하고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추천은 당근!]

마냐 2004-11-30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전후보상 판결, 그리고 엊그제 문부상 망언....한류에 가려진 한일 기류는 여전히 싸늘하군.

딸기 2004-11-3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균열은 항상 변두리에서부터 오는 법이지. 한류, 즉 일본의 '욘사마 열풍'을 '내부의 국외자' 시선으로 보는 글을 하나 올려볼까 하는 중. :)

sooninara 2004-12-1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키무타쿠에 반해서 일본 드라마를 밤새 본적이 있었죠..일어를 못하지만 다음카페등에서 보다보니 자주 나오는 감탄사등은 외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프라이드' 잼나게 보긴했는데..역시 예전 작품들이 더 좋았던듯..

재일한국인이 나오는 드라마..'동경만경'이라고..대충 챙겨보았는데..

우리나라 드라마 공식을 따라 하느라고 교통사고,기억상실,혈연에 대한 비밀등을 비비꼬았더군요..그리고 영화 '클래식'하고 비슷한 부분이 얼마나 많던지..배경음악도 한국가수 노래라서 가슴이 뿌듯했엇다죠..다만 박용하가 너무 폼잡고 나와서 느끼했고.

시청률이 잘 나올 드라마는 아니었어요..그래도 이런 시도가 계속된다면 좋겠습니다..

딸기 2004-12-1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수니나라'님이신가요? 아이디가 재미있네요 ^^

키무타쿠, 아무리 봐도 괜찮단 말예요. 그쵸?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
리처드 파인만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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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물리학 책들 중에 어려운 것(other six...)과 쉬운 것(six...)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더랬는데, 이 책은 특히 '쉬운 것'에 속한다고 강조라도 하듯 '일반인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제목에 떡하니 박혀있는 QED. 하기사, 제목에 '양자전기역학'이라고 표기를 해놓으면, 웬만한 '일반인'은 이 책을 멀~리 피해가기 십상일 터이니. 미국에서 출판됐을 당시 원제목은 'QED by Richard P. Feynman'인데 국내 번역본에는 '일반인을 위한'이라는 구절이 붙었다. 양자전기역학의 중간 교주 정도로 봐도 될 파인만, 무려 이 이론으로 노벨상까지 받았던 파인만 스스로가 양자전기역학을 '끔찍한 이름'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니, 출판사의 고충도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좋다. 책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파인만 특유의 '뼈대 플러스 농담'으로 구성된 설명. 파인만이 1984년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묶은 사람은 '투바: 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을 썼던 바로 그 사람(고등학교 물리선생님)이고, 국내 번역은 '엘러건트 유니버스'에서 무식한 독자를 감동시킨 그 사람이었다. 저자/편자/역자가 삼박자를 맞추고 있지만 역시나 주역은 저자 겸 강연자인 파인만이 아닐 수 없다. 파인만의 말솜씨는 참 대단하다. 어째서 '뼈대 플러스 농담'이냐면, 곁가지 다 잘라내고 핵심만 얘기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슬렁슬렁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다.

책의 뼈대는 물론 '양자전기역학(QED)'이다. 양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확률로밖에 묘사할 수 없다는 점, 그 확률은 화살표(이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의 곱셈과 덧셈으로 결정된다는 점, 이 화살표를 돌리고 잡아당기고 줄이면 우주만물의 신비에 다가가게 된다는 점. 이것이 파인만 강연의 요지다. 파인만의 말을 빌면 책의 재료가 된 강연의 주된 목적은 '빛과 물질의 이상한 세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빛과 전자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이었다고.
이 강연이 쉽냐고? 그건 물론 아니다. '일반인을 위한'이라고는 했지만, 일반인들은 전문분야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 원래 좀 졸게 되어 있다. 파인만이기에 이 정도라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역시나 쉽지는 않다. 원래 이 분야가 어려운 분야이니깐, 하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왜 어려운가? 보이는 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눈에 양자 세계는 너무나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양자 세계가 이상하다는 점을 받아들여라!' 라고 말한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쳐다봐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심리적 거부감은 없앨 수 있다. 강연은 네 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책은 첫째날-둘째날-세째날-네째날의 강연을 나눠 정리해놨다. 첫째날 강연은 맛뵈기, 둘째날 강연은 신기하고 놀라운 발상의 전환, 세째날은 조금 어려워지고, 네째날 강연은 입자들이 많이 나와 좀 어려웠다.

뼈대는 그렇다 치고,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건질수 있는 플러스 알파, 즉 '농담'은 뭐냐. 노학자가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재미나게 들을 수 있는 농반 진반의 통찰력이다.

양자전기역학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볼때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험치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자연 자체가 터무니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좋을 것이다. (34쪽)

훌륭한 이론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들 하는데, 이 점에서 보더라도 양자전기역학이론은 훌륭한 이론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171쪽)

저런 농담을 던지면서 강연하는 물리학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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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1-24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기억에 남는 거라곤 화살표를 이용해 설명했다는 사실(내용이 아니라) 뿐이네요^^;

하이드 2004-11-24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 아! QED 가 그런 뜻이였군요! 제가 좋아하는 영국 그릅 Black Box Recorder 가 있어요. GSOH Q.E.D. 란 노래가 있어요. pssdionis 앨범에. 무슨 뜻일까 디게 궁금했는데, 혹시 거기 GSOH가 뭐인지도 나오나요?

딸기 2004-11-2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번역하신 김희봉님께서 설명해주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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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쉬운 주제는 전혀 아닙니다. 양자전기역학은 젊은 시절 파인만의 주 연구 업적이고,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도구인 파인만 도형이 추후 입자물리학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인만 자신은 이게 모르던 걸 발견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말했지만, 엄청나게 어렵고 지저분한 것을 아주 알기 쉽게 만들었기 때문에 추후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어찌보면 정말로 파인만다운 업적이라고 하겠네요.

이 강연은 친구 부인이고 시인인가 영문학자인가 엘릭스 모트너의 기념 강연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파인만을 만날 때마다 과학에 대해 묻곤 했는데, 이 여자가 '당신의 주업적인 QED가 뭐냐'라고 물어도 도저히 설명해 줄 수가 없어서, 언젠가는 이걸 깔끔하게 정리해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강연은 이 약속의 실현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두어해(?) 전에 죽어서 이 강연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QED는 전공 대학원생 수준에서도 벅찬 것인데 그걸 이렇게 일반인한테 강연한다는 것은 사실 파인만만이 할 수 있는 마법입니다.



위에서 화살표라고 하는 건 그냥 벡터입니다.

빛이나 소리 같은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서 맥놀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실 겁니다.

이걸 두 벡터가 방향이 거꾸로 되면 작아지고 방향이 같아지면 커진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두 설명 방식을 비교할 때, 앞의 것은 현상을 생생하게 설명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추상적이지만 일반화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살표 두 개를 두고 '이게 두 파도가 섞이는 걸 잘 설명한단 말이야' 하고 말하면 모두들 갸우뚱할 겁니다.

그래서 첫번째 방식으로 이 파도는 이렇게 굽이치고 저 파도는 저렇게 굽이치니까, 이런데서는 파도가 엄청나게 커지고 저런 데서는 파도가 거의 죽어버린다.... 하고 설명하면 좋을 겁니다.



하지만 파도가 둘이 아니고 셋, 넷....1000개가 섞이면 이렇게 설명하다가는 쓰러집니다. 그때는 두 번째 방식으로, 모든 파도를 각각 벡터(화살표)로 바꾼 다음, 화살표에 화살표를 잇대는 벡터 덧셈으로 한 방에 모든 결과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똑똑하게 파도 속에서 벡터를 건져낸 게 파인만의 업적인가? 그건 아닙니다. 벡터는 수학자들이 훨씬 전에 만들어낸 것이고, 나중에 물리학자들이 써먹은 것입니다.



한편으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야 그렇다면 파도의 본질은 벡터가 아닌가... 파도는 현상일 뿐이고 벡터야 말로 본질이다..."



이렇게 가면 수학적 플라톤주의가 됩니다. 자연의 궁극적인 본질은 수학이다. 피타고라스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지요.



저는 이런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우주 양자 마음>에서 펜로즈는 공개적으로 자기는 수학적 플라톤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파도에) 둥둥 떠내려가기 끝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술러 르귄. 이름은 들어봤는데, 이 작가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어릴적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말하고 꿈을 꾸는 이야기(이것이 내가 판타지를 정의하는 단순한 방법이다)들을 몹시 좋아했었지만, 최근엔 반지제왕 한편 빼면 판타지를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선뜻 장바구니에 넣었던 것은 첫째는 제목이 멋져서, 둘째는 르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르귄의 소설책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동안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져서 우울증같은 기미를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내게 전해준 것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나의 무력감과 자괴감을 곱절로 확장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작가를 반쯤 원망하고, 반쯤 경외하면서. 그래서 내게 르귄이라는 미지의 소설가의 이름은, 잔인하고 무서운 세상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 자괴감, 그리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직시해야 한다는, 깨어있어야 한다는 어떤 절박감, 의식, 이런 것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르귄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그런 '코드'로 르귄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르귄의 소설집 첫장을 펼치기까지 더없이 두근거렸다.

아마도 르귄은 판타지 업계에선 자못 신화적인 존재인 모양이지만, '초기' '단편' 걸작들이라는 변명조의 선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초기 시험적('실험적'이 아니라) 작품들이다. 이후의 장편 소설들을 전혀 안 읽어봤기 때문에 이 작가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실망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복제인간(쉽게 말하면 일란성 쌍둥이)을 무슨 기계 부품이나 되는 양 묘사해버린 촌스런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아홉 생명>), 동양 여자는 우주시대가 되어도 여전히 정절의 상징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등등이 눈에 거슬린다. 르귄이 저 소설들을 썼던 시기가 1960년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진보적'이었던 걸로 봐야겠지만, 2004년인 지금, 최소한의 과학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눈먼 독자인 척 해줄수는 없을 것 같다. 나머지 단편들은-- 장편을 읽은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 단편집, 말하자면 매니아들을 위한 메이킹 필름 같다는 생각. 뒤편의 역자 후기는 아예 이를 공식화하고 있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라면, 오히려 판타지라는 장르와 상관없이,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관심, 그 치열함과 집요함이었다. 모든 소설은 작가가 선택한 은유를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르귄의 단편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계속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것들이 '관심'을 넘어 '통찰력'의 형태로 드러나 있는 르귄의 장편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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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1-2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렇군요. 좋다는 매니아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주문해놓고 완전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딸기 2004-11-24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
 

아티누스 카페(카페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이 안 남) 얘기에서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

대한민국의 젊은 남녀들은 카페에 증말 많이 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앞으론 '젊은 남녀'의 범주에서 벗어날 일만 남았지만, 나도 참 카페 많이 드나들었다. 내가 카페에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1988년의 일이다. 공부잘하고 얌전하고 모범생이어야만 했던 내가 철딱서니 없이 카페바람이 들어서 집 근처 카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는데, 카페에 앉아 폼 한번 잡아보기 위해 떡볶이 값 한푼두푼 모아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_-;;
그때는 카페에 다녀야만 했던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무려 연애질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하기사 여중생들이 원조교제까지 하는 마당에) 그땐 이성교제 따위를 하다가 들키면 아마 선생들한테 작살났을 걸.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카페질은 우리동네, 서울에선 상당히 촌스런 분위기였던 서대문구 홍제동 바닥을 벗어나 대학로까지 이어지는 팽창일로를 내닫았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중앙청 앞을 지나고 비원앞을 지나갈 즈음이면, 돈화문 맞은 편에 '굴뚝새와 우리들은'이라는 어정쩡하게 분위기 있는 낡은 카페가 있었다. 고2 때는 거의 한달에 두번 꼴로 거기에 갔었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를 거기서 보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카페 벽에 내가 남긴 낙서만 해도 한두개가 아닐걸. 왼갖 똥폼은 다 잡는다고, 친구들이랑 기타 치고 앉아서 조숙한척 '민중가요' 노래집 한권을 다 떼는 것을 비롯하야 연애편지 쓰기, 남의 연애 상담, 기타등등 기타등등...
나와 내 친구들이 '굴뚝새'라고 불렀던 그 카페 부근에는 '나무요일' 같은 카페스런 이름을 한 카페들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대학로로 이어지는 카페들이 싫어질 때면 인사동에 지금도 남아 있는 '차마당'이라든가, 지금은 없어졌는지 알수 없는 '오래된 이야기' 같은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나의 여고시절은 카페 없이는 되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대학교 때는 멀리까지 진출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학교 주변의 까페들을 맴돌았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 근처의 골목들은 그닥 분위기 좋고 폼나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단골 카페는 있었다. 대학시절이 끝날 무렵엔 이미 '쟈뎅'이란 놈이 들어와서 그 카페들의 대부분은 없어져버렸지만.
그렇게 대학 졸업 무렵엔 이미 사라져버린 카페들 중의 하나는 '커피뱅크'라는 곳이었다. 이름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지만... '세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방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 대신에 이 곳에는 만화책들이 있었다! 뭐 대단한 만화들은 아니고, 보물섬 같은 것들. 그리고 다방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지적인 모드를 연출해내던 안경 낀 주인아줌마. 이 아줌마는 까닭없이 나를 귀여워해줬었다.
엄청 더운 날, 그리고 뭔가 기분전환거리가 필요한 날, 일년에 한두번쯤, 예를 들자면 농활에서 올라온 직후라든가, 그럴 때에는 커피뱅크에서 파.르.페.를 먹었다. 아아, 파르페! 그 얼마나 화려하고 폼나면서 로만치크 퐁퐁 솟아오르는 이름이던가... 카페 분위기처럼 역시나 촌스럽게 생겼지만 당시만해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메뉴였던 파르페...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연중행사 수준이었고, 대부분은 그냥 커.피.를 마셨다. 어쩌다가 냉커피가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실은 여름날의 대부분) 나는 커피를 시키고, 물 갖다주는 뽀이(아마도 같은 학교 학생 알바였겠지만)한테 얼음을 달라고 했다.
뽀이는 얼음물을 한컵 갖고온다. 나는 차디찬 글라스에서 얼음만 송송 건져 냉커피를 만들어먹곤 했다. 헌데... 이노무 뽀이가, 그런 내가 무쟈게 얄미웠더랬나보다. 어느 해였나 여름이 지나갈 무렵, 얼음을 갖다달라고 했더니 찻숟가락에다가 얼음 한 개 얹어서 달랑달랑 갖다주는 것이 아닌가! 이 사건으로 나의 '자작 냉커피'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홍대 앞 카페들을 애용하고 있다. 아티누스 카페와 함께 홍대 부근 내가 자주 가는 또 한곳의 카페는 사튀로스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이 있다. 다름 아니라, 커피 갓이 무려 7000원! 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의외로 편한 구석이 있다. 누구 만나서 줄창 떠들 일 있을 때.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하는 때에 나는 저 두 군데 중 한 곳을 간다. 사튀로스는 커피 마시면 과일을 공짜로 주는데, 다섯명 정도가 함께 가면 커피 넉잔 시키고 과일 네 접시 먹는 것이 기본 원칙. 아티누스 카페에선 커피 시키면 오렌지 한 조각하고 와인빙수 주니깐 다섯시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다. 비싼 커피 마시는 거니깐 주인 눈치 안 봐도 되고, 또 저 두 집의 경우는 '주인'은 없고 알바생만 잔뜩이니깐...

반면에 이대 후문 라리는 커피가 비싸면서 써비스를 안 준다. 신문에 라리에 대해서 난 거 보니깐 호텔급 서비스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서비스는 별로 안 중요하고, '써비스'가 중요하거든. 라리는 비싼 커피 팔면서 써비스도 안 주고, 또 알바생들이 아니라 사명감을 가진 뽀이 같은 사람이 써빙을 한다. 이거 아주 별로...다. 신경쓰이자나...
특히 맘에 안 드는건, 재떨이에 꽁초 한개 밖에 안 버렸는데 재떨이 새걸로 바꿔놓고 가는 것. 진짜진짜 신경쓰인단 말이다!

일본에 온 뒤로는, 돈이 읎다, 돈이... ㅠ.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후까시 잡고싶어 죽겠는데 돈도 없고, 또 얼라가 있다보니.. 흑흑..
그래도 아무튼 도쿄스런 분위기는 내봐야겠기에, 하라주쿠에 몇번 갔었다. 요요기 공원에서 딸네미랑 놀다가, 졸려 하면 유모차에 태워 거닐면서 재운다. 그리고 유모차까지 끌고서(진짜 주책맞지?) 그럴싸한 커피숍에 앉아 한잔 하는 것이다. 이것도 꽤 재밌다. 유모차...에 쏠리는 시선을 빼면.
아니면, 도쿄에서도 제법 뽀다구나는 오다이바, 지유가오카, 이런 곳에 가서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 딸네미랑 같이 논다. 빨대 구부러뜨리기, 냉수에 설탕 녹이기, 뭐 이런걸 하면서. 카페를 좋아했던 십대 소녀는 삼십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었고, 변함없이 카페를 좋아하고, 카페에서 책 읽기, 카페에 앉아 창밖 내다보기를 좋아한다. 카페에서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에 틀어박혀 있으려나. 마음속에? 에이, 그러면 주책에 더해 궁상맞기까지 하지. 그저 나는 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흘려보내는 것이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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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1-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페보다는 길거리 벤치. ^^

하이드 2004-11-2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 갔을때 아침마다 도투루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먹으면서 그날 계획을 짜곤 했는데, 비싼 커피는 적성에 안 맞아요. 7000원 막 그런거요.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도 맨날 오늘의 커피만 사약스럽게 해서 마시곤 하죠.

아, 그리고 라리는 웨이터가 젊고 잘생겼어요. ( 소근) ///ㅂ///

딸기 2004-11-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길 걷는 것 좋아하세요? 마음 통하는 친구와 좋은 길 걷다가, 쌀쌀할 때 자판기 커피 뽑아마시면 너무나 좋지요.

미스하이드님, 도토루는 정말 싸요. 지금도 커피 190엔... ^^ 라리 웨이터 ㅋㅋㅋㅋ

새벽별님, 나중에 서울 가면 언제 한번 파르페 먹으러 가요.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 상
스티븐 킹 지음, 최수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작품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역자에 따르면 킹은 96년 오헨리문학상을 받았고, 미저리 쇼생크탈출 등 영화화된 작품을 포함해 모두 36권의 소설이 전세계 33개국 언어로 번역돼 1억권 이상이 판매된 '초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번역자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이 소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정도면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라 해도 될 듯. 존 그리샴이나 로빈 쿡처럼 헐리우드의 구미를 당기는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인줄로만 오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하다.

책은 5편의 연작소설로 이뤄져 있다. 그 첫번째 이야기인 '노란 코트를 입은 험악한 사나이들'은 바비 가필드라는 11살 소년이 겪는 신기한 모험과 성장을 담고 있다. 윗층에 이사온 이상한 노인, 노인을 쫓는 노란코트의 사나이들, 노란코트와 노인 사이의 숨막히는 추격전...환타지인지 백일몽인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장이 정말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1960년 미국 코네티컷의 하위치에 사는 도시빈민들의 누추한 생활이 눈에 보일듯 속속들이 묘사돼 있다.
2편, 표제작인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66년 대학교 2학년이 된 피트 라일리라는 젊은이의 이야기다. 반전 데모가 시작된다. 그리고 젊은날의 방황. 주인공에게서는 한 여자가 떠나간다. 바비 가필드에게서 노인이 떠나간 것처럼.
어린 시절의 꿈은 그렇게 사라진다. 현실이라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세계의 문 안에 우리를 던져놓은채. 바비에게서 노인을 빼앗아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노란코트들'이었고, 피트에게서 여자친구를 빼앗아간 것은 전쟁의 광풍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었다.

3편 '장님 윌리'에 이르러 시대는 83년으로 변한다. 빈민가에서 바비와 꼬맹이들을 못살게 굴던 윌리는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됐다. 군용재킷 뒤집어 입고 맹인용 선글라스를 끼고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윌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회개'한다. 4편 '우리는 왜 월남에 갔던가'에 등장하는 또 한명의 참전용사 설리가 월남에서 동료에 살해된 '마마상'의 유령에 시달리다 죽는 것에 비하면, 거지의 길을 걷는 윌리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 '밤의 거룩한 장막이 내리다'. 다시 바비의 이야기. 40대 후반의 바비가 어릴적 그 골목을 찾아간다. 이제는 이름도 직업도 모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어릴적 여자친구와의 재회.

5편의 소설을 설명해줄 주제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대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꿈? 희망? 5편의 주인공들에게서 그렇게 안락하고 발랄한 단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한 여자가 있다. 캐롤이라는 이 아가씨는 모두를 이어주는 끈이다. 캐롤은 어릴 적 하위치에서 바비의 여자친구였고, 고교 시절에는 곧 베트남에 갈 설리의 여자친구였고, 대학에서는 피트의 여자친구가 됐고, 가짜 장님 윌리에게는 어린시절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워 주는 존재였다. 캐롤은 그러나 누구와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지' 못했다.

60년부터 99년까지 근 40년에 걸친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 전체를 꿰뚫는 것은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빈민가의 가난한 아이들이 자라서 베트남에 간다. 정글에서 그들은 베트남 인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때로는 동료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람보'는 없다. 그저 전쟁의 광란 속에 미쳐버린 정신이상자들만 있을 뿐.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미친 람보'들에게 더이상 어린시절과 같은 아름다운 날은 없다. 자동차 판매원, 혹은 거지가 되어 악몽 속에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은 '베트남전이 미국에게 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 '미친 전쟁'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죽을 때까지 개인의 뇌 속을 장악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개인에게서 추억과 희망과 사랑을 빼앗아가고 껍데기만 남겨놨는지에 대한 세밀한 관찰기인 셈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스케치는 암담한 잿빛이다. 미국은 지나온 40년 동안 세계제국이 됐고 이 세상 천지에 당할 나라가 없는 유일무이의 지배자가 됐는데 정작 제국 신민들의 일상은 암울하기만 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티븐 킹은 바로 그 아이러니를 완벽에 가까운 플롯으로 묘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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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1-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너무 재밌죠- (케이블에서 영화 해 주길래 봤는데 영화는 별로였어요. 아역이 연기를 너무 못해서기도 하고... 아무래도 킹 특유의 섬뜩한 분위기를 영상으로 옮기기엔 한계가 있기도 하구요 )

노란 코트... 편이 제일 스티븐 킹 스타일이죠. 전 1,2권 다 읽은 다음에 1권만 샀답니다. ;;;

딸기 2004-11-18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밌었어요. 근데 영화로도 나왔나보죠? 저는 영화와 음악엔 완전 꽝이라서.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좋아요, 저는. 영화는 앉아서 봐야 하지만 소설은 누워서도 볼 수 있고, 또 다 읽고나면 사람들한테 잘난척도 할 수 있으니깐...

panda78 2004-11-1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ㅂ< ) b 다 읽고나면 사람들한테 잘난척도 할 수 있으니깐



개봉은 안하구요, 바로 비디오로 나왔어요. 미국에선 개봉했다더군요. 근데 스티븐 킹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 중에 성공한 건 몇 편 안돼서.;; 캐리랑... 샤이닝, 드림캐처 정도?



트럭이랑, 옥수수밭의 아이들, 쿠조,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정말.. 음 ;;;

랑골리에 TV시리즈는 저는 못봤지만, 하루키가 언급했었죠. 큭큭. ^^

아, 나치였던 사람과 그걸 우연히 알게 된 학생이 나오는 영화는 괜찮았는데, 제목이 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스티븐 킹 중편을 영화화 한 건데, 그 중편도 꽤 좋았거든요. 뭐더라.... 뭐더라...?


마냐 2004-11-22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어디서 내가 펑펑 울었더라....갑자기 기억이 안나는군....이거 한밤중에 나홀로 포도주 홀짝거리는 탓인가...ㅋㅋㅋ



그나저나 얼마전 그대를 만나고 온 오O리선배가 "세상에, 세상에...딸기, 몰라보겠더라. 미장원 비싸니까 머리를 기른 모양인데, '제법 여성스러워진데다' 회사독(毒)이 쫙 빠져서 그런지, 얼굴도 뽀샤시하구...'(이거 워딩 그대로임. 나랑 룰루가 입 쩍 벌리구..아, 부럽당, 부럽당...그랬음)

그러나 그대 덕분에 회사독(毒)이 하나의 유행어처럼 떠돌 무렵...최O미선배가 일침을 가했지...."쯧쯧, 딸기 내년에 회사 복귀하기만 해봐...한달이면 다시 회사독이 오를텐데..."

딸기 2004-11-23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한달씩이나 걸리려나. 아마도 일주일이면 다시 독이 오를듯. ㅠ.ㅠ

회사는 독이 맞아. 옛날에 '회사 가면 죽는다'라는 책도 있었는데. ^^

숨은아이 2004-12-0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독... >.< // 판다님, "나치였던 사람과 그걸 우연히 알게 된 학생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스탠바이미(스티븐 킹의 사계)"라는 제목으로 영언문화사에서 나왔던 책에, "여름-타락"이란 제목으로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뤠리 2021-11-1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 년전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해 소장중입니다.
오랜만에 이 책이 떠올라서 검색해봤다가, 이 서평을 읽으니 머리가 띵하네요. 너무나 깊이있고 와닿는 서평입니다.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