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누스 카페(카페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이 안 남) 얘기에서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

대한민국의 젊은 남녀들은 카페에 증말 많이 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앞으론 '젊은 남녀'의 범주에서 벗어날 일만 남았지만, 나도 참 카페 많이 드나들었다. 내가 카페에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1988년의 일이다. 공부잘하고 얌전하고 모범생이어야만 했던 내가 철딱서니 없이 카페바람이 들어서 집 근처 카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는데, 카페에 앉아 폼 한번 잡아보기 위해 떡볶이 값 한푼두푼 모아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_-;;
그때는 카페에 다녀야만 했던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무려 연애질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하기사 여중생들이 원조교제까지 하는 마당에) 그땐 이성교제 따위를 하다가 들키면 아마 선생들한테 작살났을 걸.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카페질은 우리동네, 서울에선 상당히 촌스런 분위기였던 서대문구 홍제동 바닥을 벗어나 대학로까지 이어지는 팽창일로를 내닫았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중앙청 앞을 지나고 비원앞을 지나갈 즈음이면, 돈화문 맞은 편에 '굴뚝새와 우리들은'이라는 어정쩡하게 분위기 있는 낡은 카페가 있었다. 고2 때는 거의 한달에 두번 꼴로 거기에 갔었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를 거기서 보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카페 벽에 내가 남긴 낙서만 해도 한두개가 아닐걸. 왼갖 똥폼은 다 잡는다고, 친구들이랑 기타 치고 앉아서 조숙한척 '민중가요' 노래집 한권을 다 떼는 것을 비롯하야 연애편지 쓰기, 남의 연애 상담, 기타등등 기타등등...
나와 내 친구들이 '굴뚝새'라고 불렀던 그 카페 부근에는 '나무요일' 같은 카페스런 이름을 한 카페들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대학로로 이어지는 카페들이 싫어질 때면 인사동에 지금도 남아 있는 '차마당'이라든가, 지금은 없어졌는지 알수 없는 '오래된 이야기' 같은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나의 여고시절은 카페 없이는 되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대학교 때는 멀리까지 진출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학교 주변의 까페들을 맴돌았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 근처의 골목들은 그닥 분위기 좋고 폼나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단골 카페는 있었다. 대학시절이 끝날 무렵엔 이미 '쟈뎅'이란 놈이 들어와서 그 카페들의 대부분은 없어져버렸지만.
그렇게 대학 졸업 무렵엔 이미 사라져버린 카페들 중의 하나는 '커피뱅크'라는 곳이었다. 이름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지만... '세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방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 대신에 이 곳에는 만화책들이 있었다! 뭐 대단한 만화들은 아니고, 보물섬 같은 것들. 그리고 다방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지적인 모드를 연출해내던 안경 낀 주인아줌마. 이 아줌마는 까닭없이 나를 귀여워해줬었다.
엄청 더운 날, 그리고 뭔가 기분전환거리가 필요한 날, 일년에 한두번쯤, 예를 들자면 농활에서 올라온 직후라든가, 그럴 때에는 커피뱅크에서 파.르.페.를 먹었다. 아아, 파르페! 그 얼마나 화려하고 폼나면서 로만치크 퐁퐁 솟아오르는 이름이던가... 카페 분위기처럼 역시나 촌스럽게 생겼지만 당시만해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메뉴였던 파르페...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연중행사 수준이었고, 대부분은 그냥 커.피.를 마셨다. 어쩌다가 냉커피가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실은 여름날의 대부분) 나는 커피를 시키고, 물 갖다주는 뽀이(아마도 같은 학교 학생 알바였겠지만)한테 얼음을 달라고 했다.
뽀이는 얼음물을 한컵 갖고온다. 나는 차디찬 글라스에서 얼음만 송송 건져 냉커피를 만들어먹곤 했다. 헌데... 이노무 뽀이가, 그런 내가 무쟈게 얄미웠더랬나보다. 어느 해였나 여름이 지나갈 무렵, 얼음을 갖다달라고 했더니 찻숟가락에다가 얼음 한 개 얹어서 달랑달랑 갖다주는 것이 아닌가! 이 사건으로 나의 '자작 냉커피'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홍대 앞 카페들을 애용하고 있다. 아티누스 카페와 함께 홍대 부근 내가 자주 가는 또 한곳의 카페는 사튀로스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이 있다. 다름 아니라, 커피 갓이 무려 7000원! 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의외로 편한 구석이 있다. 누구 만나서 줄창 떠들 일 있을 때.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하는 때에 나는 저 두 군데 중 한 곳을 간다. 사튀로스는 커피 마시면 과일을 공짜로 주는데, 다섯명 정도가 함께 가면 커피 넉잔 시키고 과일 네 접시 먹는 것이 기본 원칙. 아티누스 카페에선 커피 시키면 오렌지 한 조각하고 와인빙수 주니깐 다섯시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다. 비싼 커피 마시는 거니깐 주인 눈치 안 봐도 되고, 또 저 두 집의 경우는 '주인'은 없고 알바생만 잔뜩이니깐...

반면에 이대 후문 라리는 커피가 비싸면서 써비스를 안 준다. 신문에 라리에 대해서 난 거 보니깐 호텔급 서비스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서비스는 별로 안 중요하고, '써비스'가 중요하거든. 라리는 비싼 커피 팔면서 써비스도 안 주고, 또 알바생들이 아니라 사명감을 가진 뽀이 같은 사람이 써빙을 한다. 이거 아주 별로...다. 신경쓰이자나...
특히 맘에 안 드는건, 재떨이에 꽁초 한개 밖에 안 버렸는데 재떨이 새걸로 바꿔놓고 가는 것. 진짜진짜 신경쓰인단 말이다!

일본에 온 뒤로는, 돈이 읎다, 돈이... ㅠ.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후까시 잡고싶어 죽겠는데 돈도 없고, 또 얼라가 있다보니.. 흑흑..
그래도 아무튼 도쿄스런 분위기는 내봐야겠기에, 하라주쿠에 몇번 갔었다. 요요기 공원에서 딸네미랑 놀다가, 졸려 하면 유모차에 태워 거닐면서 재운다. 그리고 유모차까지 끌고서(진짜 주책맞지?) 그럴싸한 커피숍에 앉아 한잔 하는 것이다. 이것도 꽤 재밌다. 유모차...에 쏠리는 시선을 빼면.
아니면, 도쿄에서도 제법 뽀다구나는 오다이바, 지유가오카, 이런 곳에 가서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 딸네미랑 같이 논다. 빨대 구부러뜨리기, 냉수에 설탕 녹이기, 뭐 이런걸 하면서. 카페를 좋아했던 십대 소녀는 삼십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었고, 변함없이 카페를 좋아하고, 카페에서 책 읽기, 카페에 앉아 창밖 내다보기를 좋아한다. 카페에서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에 틀어박혀 있으려나. 마음속에? 에이, 그러면 주책에 더해 궁상맞기까지 하지. 그저 나는 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흘려보내는 것이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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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1-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페보다는 길거리 벤치. ^^

하이드 2004-11-2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 갔을때 아침마다 도투루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먹으면서 그날 계획을 짜곤 했는데, 비싼 커피는 적성에 안 맞아요. 7000원 막 그런거요.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도 맨날 오늘의 커피만 사약스럽게 해서 마시곤 하죠.

아, 그리고 라리는 웨이터가 젊고 잘생겼어요. ( 소근) ///ㅂ///

딸기 2004-11-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길 걷는 것 좋아하세요? 마음 통하는 친구와 좋은 길 걷다가, 쌀쌀할 때 자판기 커피 뽑아마시면 너무나 좋지요.

미스하이드님, 도토루는 정말 싸요. 지금도 커피 190엔... ^^ 라리 웨이터 ㅋㅋㅋㅋ

새벽별님, 나중에 서울 가면 언제 한번 파르페 먹으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