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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 상
스티븐 킹 지음, 최수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작품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역자에 따르면 킹은 96년 오헨리문학상을 받았고, 미저리 쇼생크탈출 등 영화화된 작품을 포함해 모두 36권의 소설이 전세계 33개국 언어로 번역돼 1억권 이상이 판매된 '초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번역자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이 소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정도면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라 해도 될 듯. 존 그리샴이나 로빈 쿡처럼 헐리우드의 구미를 당기는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인줄로만 오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하다.
책은 5편의 연작소설로 이뤄져 있다. 그 첫번째 이야기인 '노란 코트를 입은 험악한 사나이들'은 바비 가필드라는 11살 소년이 겪는 신기한 모험과 성장을 담고 있다. 윗층에 이사온 이상한 노인, 노인을 쫓는 노란코트의 사나이들, 노란코트와 노인 사이의 숨막히는 추격전...환타지인지 백일몽인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장이 정말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1960년 미국 코네티컷의 하위치에 사는 도시빈민들의 누추한 생활이 눈에 보일듯 속속들이 묘사돼 있다.
2편, 표제작인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는 66년 대학교 2학년이 된 피트 라일리라는 젊은이의 이야기다. 반전 데모가 시작된다. 그리고 젊은날의 방황. 주인공에게서는 한 여자가 떠나간다. 바비 가필드에게서 노인이 떠나간 것처럼. 어린 시절의 꿈은 그렇게 사라진다. 현실이라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세계의 문 안에 우리를 던져놓은채. 바비에게서 노인을 빼앗아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노란코트들'이었고, 피트에게서 여자친구를 빼앗아간 것은 전쟁의 광풍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었다.
3편 '장님 윌리'에 이르러 시대는 83년으로 변한다. 빈민가에서 바비와 꼬맹이들을 못살게 굴던 윌리는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됐다. 군용재킷 뒤집어 입고 맹인용 선글라스를 끼고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윌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회개'한다. 4편 '우리는 왜 월남에 갔던가'에 등장하는 또 한명의 참전용사 설리가 월남에서 동료에 살해된 '마마상'의 유령에 시달리다 죽는 것에 비하면, 거지의 길을 걷는 윌리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 '밤의 거룩한 장막이 내리다'. 다시 바비의 이야기. 40대 후반의 바비가 어릴적 그 골목을 찾아간다. 이제는 이름도 직업도 모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어릴적 여자친구와의 재회.
5편의 소설을 설명해줄 주제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대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꿈? 희망? 5편의 주인공들에게서 그렇게 안락하고 발랄한 단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한 여자가 있다. 캐롤이라는 이 아가씨는 모두를 이어주는 끈이다. 캐롤은 어릴 적 하위치에서 바비의 여자친구였고, 고교 시절에는 곧 베트남에 갈 설리의 여자친구였고, 대학에서는 피트의 여자친구가 됐고, 가짜 장님 윌리에게는 어린시절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워 주는 존재였다. 캐롤은 그러나 누구와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지' 못했다.
60년부터 99년까지 근 40년에 걸친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 전체를 꿰뚫는 것은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빈민가의 가난한 아이들이 자라서 베트남에 간다. 정글에서 그들은 베트남 인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때로는 동료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람보'는 없다. 그저 전쟁의 광란 속에 미쳐버린 정신이상자들만 있을 뿐.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미친 람보'들에게 더이상 어린시절과 같은 아름다운 날은 없다. 자동차 판매원, 혹은 거지가 되어 악몽 속에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은 '베트남전이 미국에게 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 '미친 전쟁'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죽을 때까지 개인의 뇌 속을 장악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개인에게서 추억과 희망과 사랑을 빼앗아가고 껍데기만 남겨놨는지에 대한 세밀한 관찰기인 셈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스케치는 암담한 잿빛이다. 미국은 지나온 40년 동안 세계제국이 됐고 이 세상 천지에 당할 나라가 없는 유일무이의 지배자가 됐는데 정작 제국 신민들의 일상은 암울하기만 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티븐 킹은 바로 그 아이러니를 완벽에 가까운 플롯으로 묘사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