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패권 이전 - 13세기 세계체제
재닛 아부 지음, 박흥식.이은정 옮김 / 까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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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겠다고 생각한지는 오래 됐다. 알라딘 보관함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망설였던 것은, 아주 흥미를 끄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너무 학술적이고 전문적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렇게 마음의 짐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석 달 전 이 책을 주웠다. 거짓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주웠다.’ 사무실에 누군가가 버려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냉큼 챙겨놓았지만 역시 책을 펴들기까지는 두 달이 더 걸렸다.

정말 좋아하는 포맷에 정말 흥미진진한 내용. 사실 올 해 나의 ‘독서성적’은 형편없다. 이런저런 일들과 신변의 변화로 바빠 하반기 내내 마음 편히 책 한 줄 읽지 못했다. 먹다 얹힌 떡 조각처럼 목구멍에 걸려있던 일을 끝내자마자 이 책을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나 같은 직장인이 읽기엔 좀 학술적이었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책의 체계와 논지가 워낙 분명했던 이유도 있다. 도대체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거짓말 조금 보태어 내가 죽고 못 사는 책인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책 첫머리에 인용돼 있다.

저자는 흥미가 끌리는 대로 여러 학문분과들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러 학문 분과들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제학·정치학·사회학·역사학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계체제론에다가 제3세계 즉 ‘서발턴’의 관점을 결합해서 ‘지식의 변화를 재촉하는 제3의 길’을 찾고 싶었단다. 속 좁고 시야 좁은 역사학자들 틈바구니에서 세상을 넓게 보고,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 세계를 보려 했다는 얘기다. 성찰적인 서구 학자라고 해야 하려나.

“지식의 변화를 재촉하는 제3의 길은 아마도 ‘사실들’이 관찰되는 거리에 변하를 주고, 그것에 의해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의 규모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좀처럼 전지구적으로 조망하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 아놀드 토인비와 윌리엄 맥닐은 시간과 공간의 협소한 한계 내에 특화돼 있는 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극소수에 속한다.” (9쪽)

제목에서 충분히 예상되듯이, 저자는 세계체제론을 바탕으로 아날 학파의 분석기법을 이용해 논지를 설파한다. 이 책과(혹은 이 책의 저자와) 관련 있는 학자들은 이매뉴얼 월러스틴, 페르낭 브로델, 페리 앤더슨, 에릭 홉스봄 같은 이들이다. 여기에 윌리엄 맥닐(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저다!)과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다. 소제목들을 훑어봐도 그렇지만, 저술 스타일이 참으로 정직하다! 책은 13세기에도 ‘세계체제’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16세기를 대략 유럽 패권에서 출발한 오늘날 세계 체제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13세기에도 분명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세계체제가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13세기 후반은 구세계의 많은 부분이 (비록 모든 부분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나의 교환체제 속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시기다. 특히 당시의 두 세계, 즉 유럽과 중국이라는 유라시아의 두 부분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정착한 시기다. 13세기에는 이전보다 확연히 생산·교역 규모가 커졌다. 그러므로 13세기(정확히 말하면 1250~1350년)는 분명 세계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문화적으로도 동시다발로 세계에서 원숙한 문화·예술이 꽃을 피웠다. 경제적 통합과 문화적 결실은 서로 연관돼 있는 13세기의 특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13세기의 세계경제’를 탐구하고 그 동력을 살핀 뒤 “왜 14세기부터는 그 체계가 비틀거리게 됐는지”를 살핀다.

여기서 하나의 포인트는, ‘유럽 패권 이전’의 이 체제에는 단일 패권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 세계체제’와의 중요한 차이다(저자는 13세기 체제가 ‘근대 자본주의’의 시초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며 학계의 말싸움과는 선을 그었다). 그리고 13세기 체제에는 이후의 세계체제를 ‘유럽 패권’으로 가게 만든 역사적 필연성 따위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미래는 열려 있었다. 중국이 패권을 잡았을 수도 있었다.
“그 체제가 동양보다 서양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야만 할, 동양의 문화가 근대 세계체제의 원조가 되는 것을 가로막았던 그 어떤 고유한 역사적 필연성도 없었다.” (32쪽)

그런데 결과는 ‘유럽 패권’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대개 유럽이 잘나서 그랬다고들 말하는데, 오늘날 세계체제의 이전단계인 13세기 세계체제를 들여다보면 유럽이 잘 났다는 증거는 없었다, 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말하자면 ‘서양 잘난척’에 쐐기를 박기 위한 연구인 셈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책의 출발점은 재미있다. 앞서 언급한 저런 자세 위에, 저자의 마음에 들어선(저자의 눈에 포착된) 어떤 지점들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됐다. 저자 나름의 ‘지리상의 발견’이라 할 세 지점은 카이로(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해준 도시), 항저우(13세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발전했던 도시), 브뤼주와 트루아(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복원된 중세 도시들)이었다. “이렇게 발전했다가 훗날 몰락하고 만 세 지점은 유럽 패권 이전의 세계체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가 저자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책은 지도를 바탕으로 13세기 세계체제를 조망한다. 저자는 당시의 세계를 교역로에 따라 크게 3덩어리, 작게 8덩어리로 나눈다. 큰 세 덩어리는 서유럽, 중동, 극동이다(여기서 극동은 한국만 쏙 빠진 동양, 간단히 말해 중국과 동남아를 지칭한다. 우리가 아무리 변명을 해봤자 세계 교역체제에 당시의 한국은 그리 많이 통합돼 있지 않았으니까). 세 덩어리가 교차하는 지점들이 교역의 중심지들, 세계체제의 중요한 마디들이다.

저자는 유럽의 하위체제(제1부), 중동의 심장부(제2부), 아시아(제3부)의 세 덩어리를 나눠 각각의 내부 동력을 살펴본다. 유럽에서는 상파뉴 정기시의 도시들과 플랑드르의 상공업 도시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해양상인들을 중심으로 13세기의 교역 확대를 점검한다. 정치적인 이유, 교역상대의 변화, 입지조건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지점마다 각기 사정은 달랐다) 13세기의 교역중심지들은 14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중동에서는 몽골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중동을 제패한 몽골은 산업이 발달한 지역들을 계속 정복해감으로써 잉여를 늘렸으나 이는 ‘붉은 여왕의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잉여를 더 이상 빼앗아 올 수 없는 지점이 되자 몽골은 몰락했다. 세계를 한데 엮은 몽골의 성공은 전염병의 대유행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고, 이는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육로의 쇠퇴를 가져왔다. 동시에 한때 세계의 중심이던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교역도 힘이 빠졌다. 맘루크(노예 술탄국) 치하의 카이로가 제네바와 결탁해 지중해-홍해-인도양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한때 잘 나가기도 했지만 유럽이 대서양 노선을 개척하면서 이 독점적인 교역로도 효력을 다했다. 이는 결국 인도양 노선의 쇠퇴, 더 나아가 ‘동양의 쇠퇴’로까지 이어졌다.

세 번째 덩어리 ‘인도양 체제’는 아라비아 순회로(아프리카 동부~인도 서부), 벵골만 순회로(인도와 동남아), 남중국해 순회로(인도양 동부~중국)의 세 바닷길로 구성돼 있었다. 인도 아대륙은 한때 지중해(유럽)와 남중국해 사이 ‘모든 곳으로 통하는 길’이었지만 서인도양에서 아랍-인도 패권이 종말을 고하면서 몰락한다.

가장 재미난 것은 세 번째 덩어리 중에서도 중국에 대한 것으로, 이 책의 핵심에 해당된다. 중국은 14~15세기 갑자기 대양에서 철수해버렸다. 그래서 말라카/동남아 해상은 무주공산, 아니 무주공해가 됐다. 이 공백을 인도나 중동이 메웠다면 역사가 바뀌었겠지만, 공백을 메우고 나선 것은 유럽(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이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적어도 지난 100년 동안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질문은, 그 당시 중국이 지고의 지위에 있었는데도 왜 세계체제에서 진정한 패자가 되는 최종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라는 것이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중국은 자국의 해안으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도양 일대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중국은 물러섰고 함대를 후퇴시켰으며, 그로 인해서 거대한 권력의 공백을 남겨 두었을까? 국가의 해군력에 의한 지원을 받고 있지 않던 이슬람 상인들은 그 공백을 메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유럽은 약 70년의 휴지기 후에 좀더 의욕과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351쪽)

한때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는 ‘명나라가 바다(교역)를 포기한 이유’를 놓고 창의성이 적었다거나(그래서 과학기술 발달이 유럽보다 뒤졌다) 제도가 나빴다는(개인의 창의성과 모험심을 부추기는 문화가 아닌 전제군주 문화였다) 식의 해석을 많이 내놓곤 했다(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는 이런 해석에다가 아부-루고드 식의 유물론적 해석을 적당히 걸치고 있는 듯하다).

2차 사료들을 검토한 저자의 해석은, “당시 중국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왜 철수했나”가 아니라 “중국은 그 때 왜 경제적으로 붕괴했나”가 문제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

저자는 송-원-명 교체기 중국이 내부적인 문제들로 인해 15세기에 어쩔 수 없이 해군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붕괴를 겪었다고 말한다. 송대 이래 중국 경제의 중심은 남부였는데 (몽골식 세계화의 여파로 인해) 남부가 전염병에 황폐화됐다. 게다가 명나라의 정치적 중심은 북부였다. 남쪽의 해상노선이 조금은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화의 원정대’를 중심으로 해상노선을 살리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중국은 바다에서 철수했다. 이와 함께 세계의 패권을 장악할 기회도 사라졌다.

이렇게 13세기 세계체제는 종말을 고했고, ‘다른 체제’가 이후의 세계를 지배했다. 체제의 변화를 살펴볼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제 각각의 변수들이 아무리 확고하다 할지라도 체제들의 형성/이전/재구성을 하나의 변수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둘째, 연이은 체제들은 누적적인 방식으로 재편된다. 셋째, 어떤 체제도 완전히 통합돼 있지는 않고 가장 강력한 참가자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지도 않는다. 넷째 변화의 원인은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같은 행동이 다른 시기, 다른 체제에서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체제변화 이론은 체제의 성장 뿐 아니라 체제의 쇠퇴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402쪽)

그리하여 결론은? 결론은 ‘미래의 세계체제들’이다. 13세기 체제를 뒤로한 채 출범한 ‘근대 세계체제’는 얼마나 존속할 것인가. 근대 세계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금 상황에서는 ‘미국 패권’이다. 이 시기 패권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했다. 중국의 성장(그리고 거기 연결된 아시아 용들의 발전)은 새로운 세계체제를 열 것인가.

그 대답을 누가 알리오. 중요한 것은 근대 체제와 다른 13세기 체제가 주는 시사점이다. 13세기 체제는 ‘다핵적’이었다. 지금의 체제는 단핵적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는 탈식민지화로 잃어버린 특권을 경제적 수단을 이용해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점점 더 성공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국, 지금은 미국에 ‘체제 재구성’의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세계체제가 진정으로 전지구화 될 21세기에는 민족/국가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게 한결 더 중요해질 것이다. 13세기에는 ‘핵’과 무관했던 수많은 생활권들이 있었고, 세계체제로부터 철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러기가 힘들다. 아마도 우리들은 현재의 체제와는 달랐던 13세기 체제를 연구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405쪽)

다극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자는 법, 신자유주의가 한계에 부딪쳤다는 지금 이 시기에 새롭게 와닿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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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8-11-3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책의 좋은 내용들이 확 들어옵니다. 흥미로운 주제로 보입니다.
중국의 몰락 관련해서 내연기관을 만드는데 실패함으로 평하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세계제국이 전염병의 세계화를 통한 내부 몰락을 겪었다는 분석은 재미있습니다.
신자유주의 또한 내부에 탐욕이라는 전염병을 세계화시키는 유사한 결과를 가져온 것 같군요. ^^

딸기 2008-12-01 10:17   좋아요 0 | URL
네, 책 재미있었어요. 전염병의 세계화에 대해서라면, 너무너무 탁월한 저작인 맥닐의 책을 꼭! 읽어보세요.
신자유주의에 대한 말씀, 동감합니다. 그 탐욕이라는 전염병에서 나온 지금의 위기가 '재채기' 수준으로 끝날지, 흑사병 수준으로 세계를 초토화시킬수는 알 수 없지만요...

로쟈 2008-12-01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군요. 근데 13세기까지 또 거슬러올라가야 한다니까 다리에 힘이 좀 빠지네요.^^;

딸기 2008-12-01 10:16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그것 때문에 미적미적 거리고 있었어요. contemporary 한 것이라면 또 몰라도, 역사 공부를 할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선뜻 내키지가 않았던지라.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금방금방 읽을 수 있었어요.
 
비밀의 정원 계림세계명작 3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한상남 옮김 / 계림닷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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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그림책을 약간 벗어난 아동소설을 사주고 싶어서 교보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이 시리즈로 '아라비안 나이트'를 사서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어, 이걸로 골랐습니다.

제게 '비밀의 정원'은 잊지 못할 책입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는 계몽사 50권짜리 동화집이 있었고
친구네 집에도 역시 계몽사 50권짜리 동화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전집의 버전이 달랐어요. 친구 것이 더 새거였지요.

친구 집 책에는 '비밀의 화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정말 어찌나 재밌었는지,
친구가 귀찮다고 놀러오지 말라는데 일요일까지 찾아가서 조금씩 조금씩 읽어서 결국 다 읽었어요.
도둑질하듯 읽었던 재미난 동화책.
소공녀도 재미있었지만(저는 소공자는 그저 그랬고요)
그 무렵엔 비밀의 화원만큼 재미난 책이 없었던 것 같아요.

교보에서 책 구경하다가 이 책 잡고 3분의1쯤 읽었는데 어른이 되어 읽어도 또 재미있는 거예요!
사투리까지 구수하게 잘 옮겨놔서 키득거리며 읽었지요.

늦도록 일하고 자정 넘어 집에 들어갔는데, 모두 잠든 집에서 아이 방에 혼자 불 켜고 앉아
책장을 넘겼습니다. 냠냠 아우재밌어...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영국식 동화'이지요. 식민취향이 폴폴 풍기는.
소공녀하고 비슷한...
근데 넘 재밌어서 20년 쯤 지나서 또 읽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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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8-11-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막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네버랜드 클래식으로 빌려 다시 읽었답니다. 저도 왜 그리 재밌는지, 제목만으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책 중에 한권이에요^^ 이번엔 작은 아씨들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딸기 2008-11-11 11:03   좋아요 0 | URL
우리 딸도 작은아씨들 보고 나서 그거 영화로도 있다며(애가 읽은 그림 책이 위노나 라이더 나온 영화를 바탕으로 한 거였어요) 영화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아이랑 같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단계가 되니 너무 좋은거 있죠. ^^

순오기 2008-11-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명작시리즈중에 비밀의 화원은 누가 빌려가서 잃어버린 책입니다. 다행히 문고판으로 하난 남았지요.
아이들이랑 겨울방학이면 날마다 한편씩 가족영화를 보던 때 질리도록 봐도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애들은 줄줄 꿰고 있어서 설레설레 흔들지만... ^^
 
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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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모리스하고는 크게 인연이 없었는데, 이 책은 정말 <우연하게> 읽었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가서 꼼꼼이 책 읽는 동안 나도 뭐 하나 뒤적여봐야겠다, 하다가 어린이도서 근처에 있는 것이 하필 생물학 책이어서 이걸 손에 쥐게 됐다. 워낙 책 읽을 때 밑줄 쫙쫙 쳐가며 지저분하게 읽는지라 역시나 이 책에도 볼펜 줄을 그었다. 그러니 돈을 내는 수밖에. 여러 가지 번역으로 나와 있는데 모두 번역자가 쟁쟁하다(김석희, 김동광, 이충호). 나는 그 중에서 김석희 선생 번역으로 읽었다. 물론 번역은 깔끔했다. 문예춘추사에서 나온 것이어서 편집은 좀 구닥다리 같았지만.

저자는 현생 인류가 원숭이 종류에서 그저 조금 밖에 달라진 게 없다면서, 아마도 외계인이 우리를 본다면 우리가 동물들에 이름 붙이듯 우리의 외모를 보고 ‘털 없는 원숭이’라는 학명을 붙일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동물학적 관점에서 본 인간론’이다. 섹스/육아(교육)/창의성/싸움/먹기/치장/인간관계 등을 놓고 털 있는 원숭이와 털 없는 원숭이의 차이점, 같은 점을 분석한다. 모리스가 동물 전문가라서 ‘동물학적 관점’이라고 스스로 설명을 하긴 했는데 요즘 식으로 쓴다면 ‘진화심리학으로 본 인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요는,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학적으로 분석했다는 것 때문에 처음 출간됐던 당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시대가 바뀐 탓인지 별로 충격적이진 않았다. 얼마 전 재러드 다이아몬드 <제3의 침팬지>를 읽었기 때문에 내게는 참신성이 떨어졌다는 이유도 있고. 그러나 이 책이 무려 1960년대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모리스는 맬서스적 인구론 차원에서 지구적 위기에 접근했는데, 만일 요즘에 쓴 책이라면 기후변화 얘기가 바탕에 깔린 담론이 되지 않았을까. 그럼 역으로, 앞으로 40년 지나면 기후변화 담론도 ‘옛날 얘기’가 되려나? 제발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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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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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은 된 것 같다. 뉴욕타임스에서 크루그먼의 컬럼들을 읽으면서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경제 혹은 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고 별로 생각 같은 것을 해본 일이 없어서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그저 유명한 학자, 유명한 컬럼니스트라고 하니 <경제학의 향연>이라는 책(뒤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을 하나 사서 읽어봤는데 지금은 아무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것 때문에 경제 문제에 억지로라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큰 맘 먹고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이 책을 주문했다. 왜 ‘큰 맘’까지 먹어야 했냐면-- 당장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에세이류의 책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의 이름이 책 제목에 당당히 붙을 만큼 이제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학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겐 그리 큰 임팩트가 없는 저술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사놓고 책상 위에 굴리고만 있던 그 며칠 동안에, 이 사람이 노벨경제학상을 탔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신문 기사들, 크루그먼을 소개한 글들을 읽어봤다. 이 사람 이름을 들은지는 꽤 오래됐지만 정작 잘 모르고 있었구나, 쉬이 볼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책이 너무 잘 읽혔다. 노벨경제학상 때문에 잘 읽힌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주는 강력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력함, 그 설득력의 요체는 저자가 가진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옳은 생각을 힘 있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

몇해 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의 유명한 책 제목을 빌자면, 이 책은 크루그먼이 말하는 ‘불평등의 재검토’가 되겠다. 크루그먼은 20세기 전반기를 가리켜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불평등을 양산하던 ‘길었던 도금시대’라 부른다. 이어 대공황이 닥쳤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실시됐다.
뉴딜 이후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중산층의 황금시대였다. 노동자들을 탄압해선 안 되고, 노동자들은 임금을 많이 받아 더 잘 살아야 하며, 너무 돈이 많아 금권정치를 펼치려는 사람들은 감히 그런 마음을 못 먹게 하고, 정해진 부(富)의 파이에서 혼자만 너무 큰 몫을 먹는 자들이 없게 하고, 빈부격차는 줄이고, 사회복지를 실현시켜서 어떻게든 많은 이들이 되도록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부의 당연한 목표이자 사회의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여졌던 시대.
그러나 그 물밑에서 보수파(오늘날의 네오컨이나 기독교 우익 꼴통들)들은 조직적으로 시민사회가 얻어낸 결실들을 무위로 돌리고 ‘뉴딜 이전’, 아니 부자들이 모든 걸 장악했던 ‘20세기 이전’으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그들은 연구소를 만들고 부자들의 돈을 받아 ‘보수 연구자’들을 양성하고, 각 주에서 종교세력과 인종주의 세력들을 동원해 흑인과 이민자들의 투표를 가로막는 공작을 벌였다. 그들은 리처드 닉슨에게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법을 배웠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건이라는 ‘보수주의자(전통적 공화당원이 아닌 앞서 말한 의미)’를 내세워 권력을 잡게 된다. ‘부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가난한 사람들까지 공화당에 표를 던지게끔 만들었던 이들의 비결은, “공포를 부추기고 인종차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크루그먼이 말하는 20세기 ‘미국의 역사’다. 그는 뉴딜이라는 사회적 계약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해체되었는가를 중심으로 미국의 최근사를 재해석했다. 여기서 핵심은 ‘빈부 격차’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양극화’가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레이건은 그런 거짓말의 대가였다) 사람들을 현혹시켜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치를 펼쳐 끝내 사회적 분열과 양극화를 가져온 보수파 정치는 이제 끝장낼 때가 되었다. 부자들 중에서도 초(超)부자, 이른바 ‘수퍼 리치(Super-rich)’가 세상의 부를 거머쥐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료보험도 가입 못 한 채로 살아야하는 그런 시대는 끝낼 때가 되었다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이 책에서 크루그먼이 빌려온 표현은 부자와 빈자들 간 격차를 팍팍 줄인다는 뜻의 ‘대압착’이다.

물론 크루그먼은 경제학자이지 사회운동가는 아니다. 책은 “실천에 나서야 할 필요성”과 “실천에 안 나설 경우 저들이 하는 짓”을 얘기할 뿐 개개인의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굳이 대압착을 위해 실천할 방법을 찾자면 가장 쉬운 것은 민주당이 가장 진보적이 되어있는 지금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민주당 대선 후보를 찍는 것이 되겠다. 공화당 감세론자, 작은정부론자, 부자중심주의자들에게 철퇴를 날리고 ‘제2의 뉴딜 시대’를 여는 것.

이 책은 이번 금융위기가 이렇게 터져 나오기 전에 출간된 것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 특히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금융위기 시대 소비자의 행동지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의 시대 경제학자의 양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메가 정부는- 저따위 것들도 ‘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주 양극화를 내놓고 자랑하면서 그길로 나가겠다고 발광을 떨고 있다. 부자들은 더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설치는데, 그 하는 짓거리가 거창한 것(금산분리 완화, 방송겸영 허용, 부자들 감세, 부동산세 줄이기, 의료보험 민영화 등)에서부터 유치찬란한 것(농민 직불금 가로채먹기)까지 다 들어있어 목불인견이다.
크루그먼이 ‘미국의 실패’로 지적한 내용을 이메가 정부는 그대로 베껴다 할 모양이다. 신자유주의, 시장맹신주의가 지구적 파국을 불러오려고 하는 이 시점에!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때가 되었다’는 크루그먼의 말처럼,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이고 새로운 뉴딜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대압착이 될지 소압착에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세상이 이메가 일당이 생각하는 식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이 천박한 부자들과 천박한 자본주의는 대체 어찌할 것인가!

“나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 그리고 법치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진보주의자이며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336쪽)

책의 원제는 ‘자유주의자의 양심’이다. 그 양심의 소리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감동적이었다.

 

 ★ 크루그먼이 권하는 책들

일전에 '빌 게이츠의 책장에는 무엇이 꽂혀있나'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럼 크루그먼의 책장에는 무엇이 꽂혀 있을까.

크루그먼은 홈페이지에 "리버럴(진보인사)이라면 읽어야 할 필독서 7권"을 추천해 놓았다. 이 책들은 <미래를 말하다>에도 여러번 인용된 것들이다. 경제학자의 추천도서에 경제학 서적이 빠진 이유로 그는 “경제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책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릭 펄스타인 <폭풍 전에:배리 골드워터와 미국의 양심 파괴하기(Rick Perlstein, Before the Storm: Barry Goldwater and the Unmaking of the American Consensus)>
-아서 슐레진저 <구질서의 위기:1919~1933, 루즈벨트의 시대(Arthur M. Schlesinger, Jr. The Crisis of the Old Order: 1919-1933, The Age of Roosevelt)>
-토머스 에드샐 <불평등의 신정치학(Thomas Edsall, The New Politics of Inequality)·1984>
-토머스 프랭크 <캔사스가 뭐가 문제인가?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미국의 마음을 얻었나 (Thomas Frank,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How Conservatives Won the Heart of America)>
-토머스 쉘러 <과거의 남부를 불러오기:민주당은 어떻게 남부 없이 승리할 수 있나(Thomas F. Schaller, Whistling Past Dixie: How Democrats Can Win Without the South)>
-놀랜 맥카티·케이트 풀·하워드 로젠탈 <극과극으로 갈라진 미국:이데올로기와 불평등한 부의 댄스(Nolan McCarty, Keith Poole, and Howard Rosenthal, Polarized America: The Dance of Ideology and Unequal Riches)>
-래리 바텔 <불평등한 민주주의:신황금시대의 정치경제학(Larry Bartels, Unequal Democracy: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Gilded Age)·온라인서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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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10-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크루그먼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딸기님 리뷰가 올라왔네염. 역시 부지런하심.^^

딸기 2008-10-23 10:4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너무너무 뛰어나서라기보다도, 지금 한국 상황이 속터지니깐 저 학자의 글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요. 발마스님, 그나저나 우리 언제 만나나요... 올해 가기 전에 시간 내주세욧!

로쟈 2008-10-2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는 것 같네" -> 국내엔 리버럴 인사가 없는 것 같네요...

딸기 2008-10-23 10:47   좋아요 0 | URL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리버럴'이라고 하면 여전히 양쪽에서 욕 먹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장하준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리버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young2miso 2009-01-1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크루그만이 아시아 경제 위기 때 우리에게 어떤 처방을 권했는지, 한번 찾아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코튼로드 - 목화의 도시에서 발견한 세계화의 비밀
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어찌나 멋을 냈는지 기름이 줄줄 흐른다.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이라서 그런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만큼이나 감상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좋게 보면 별 다섯 개, 지겹다 오버한다 느끼면 별 2개.
말리에서 미국, 브라질, 이집트,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목화의 길’을 따라 세계화를 짚어 가는데, 목화라는 작물을 통해서 본 세계화와 그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발상은 매우 좋았다. 다만 뜬금없는 상념들이 섞여 재미가 반감됐다. 그나마 현장성이 가미된 부분에서도 자기 자랑(난 이렇게 민감하며 지적이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낌이 많이 났다. 세계화와 민영화 기타 등등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려고는 하는데 일관된 줄기가 없다. 세계화를 냉소하는 노마드인 척 하다가 맨 마지막에 ‘맺는 말’ 하면서 공정무역을 은근슬쩍 깔아뭉개는 것은 또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철살인의 통찰력은 분명 있다. 이 사람은 그냥 멋들어진 여행기에 전념하거나 문명비판 에세이 같은 걸 쓰는 편이 좋은 사람인 듯하다. 풍경의 한 단면을 폼 잔뜩 잡고 묘사하는 부분들은 재미있었다. 저자에겐 미안한 소리이지만 세계화 뒷조사하기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고 저자를 따라 세계의 낯선 풍경을 엿본다 생각하면 재미난 여행기가 될 것 같다.


▶ 소피텔이라는 간판 앞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사정은 훨씬 심각한데, 왜냐하면 ‘소피텔’이라는 상표는 다양성에 증오를 품고 있는 상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표들은 여행의 기분을 마구 뭉개 놓으려 든다. ‘그 밥에 그 나물’ 식 여행이 평안한 여행의 정점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죽음의 전초전일 뿐이다. 죽음, 곧 無. 너무 많은 ‘아무것도 없음.’ 당신이 지구의 반쯤은 돌아다녀 보았다고?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난번에 묵었던 방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방에서 자게 될 테니까.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소용이 없다. 돛을 올려도 보고, 비행기에서 기차로 바꿔 타 보아도 모두 헛일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서 미리 우리의 밤을 빼앗아간 힐튼이니 하야트, 쉐라톤이니 소피텔이니 하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새 도시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193쪽)

▶ “아, 저기 검정색 모자 쓴 사람은 카라칼파크 사람. 아마도 송아지를 끌고 버스에 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입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가축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저쪽은 고려인들이고.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저 사람들은 보통 비행기를 타거든요. 돈이 많으니까! 망명 생활 덕분에 득을 좀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저 사람들은 스탈린한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스탈린이라니! 스탈린이 이 세상 끝 같아 보이는 곳에서 무슨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고려인들은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거주해왔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20만 명 쯤 되었다.
... 스탈린은 누군가를 옮겨야 할 때, 가령 1941년 우크라이나에 살던 독일인들이나 터키인들의 경우에도 항상 우즈베키스탄을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희한하지 않은가? (211쪽)

▶ 묘판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공장과 도시가 성장하는 리듬에 따라 앞으로도 한층 확대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발전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묘판의 존재는 이제까지 이어진 경제 성장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자연에 대한 절실한 수요를 의미한다.
묘판의 존재는 또한 성급하게 미래로 돌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래란 무엇인가? 미래란 이미 나무들이 성장할 대로 성장해버린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고속도로변의 묘판은 인간들로 하여금 시간을 앞당기도록 만든다. 갓 생겨난 신도시에 서른 살 먹은 나무를 심는 것은 이 도시에 어느 정도 나이를 부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나이를 먹었다는 환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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