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평평하다 - 21세기 세계 흐름에 대한 통찰, 증보판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이윤섭.김상철.최정임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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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부분은 지겹다 싶고 또 어떤 부분은 제기랄... 이러면서도 프리드먼의 새 책이 나오면 읽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이 사람의 글 속에 통찰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새 프리드먼의 책들이 번역돼 나오면 웬만한 것은 다 읽어보았고, 더불어 로버트 카플란도 가능하면 읽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지난 여름엔 벼르고 벼르던 파리드 자카리아의 책도 간신히 한권 읽었고, 지금은 니알 퍼거슨의 책을 손에 잡고 있다.

제국주의를 연구한 영국 학자인 퍼거슨은 우선 논외로 하자. 프리드먼과 카플란, 자카리아는 모두 미국에서 통칭 국제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 정도만 공통점일 뿐, 이 들의 글은 참 많이 다르면서, 참 많이 비교가 된다.

카플란은 냉혹한 사람이다. 못됐지만 분명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다. 왜냐? 못됐기 때문에... ‘막말’을 해도 되니까... 늘 그렇듯, 못된 소리는 못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노빠를 미워하는 자들은 전여옥을 좋아한다). 못된 사람들로 하여금 “거봐, 이렇게 여러곳 돌아다닌 사람이 무슬림들은 한심하다고 하잖아, 아프리카 깜둥이들은 미련하다고 하잖아, 미국이 다 쥐고 흔들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하잖아” 이렇게 말한 ‘근거’라는 걸 만들어주는 것이 카플란 같은 사람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플란을 읽는 이유는? 잘난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미련하고 한심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카플란이기 때문이다. 꼴 보기 싫지만, 그래도 이 자가 하는 말들엔 ‘좌파’들이 애써 귀 닫는 일말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카플란의 통찰력이기 때문에.

자카리아도 마찬가지다. 카플란같이 못되진 않았지만 말투는 냉랭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카리아의 시각은, 외교를 바라보는 카플란의 시각과 일맥상통. 그러나 자카리아는 카플란에 대면 훨씬 공정하다. 민주주의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제3세계를 놓고 이렇게 말하면 개발독재주의자의 뻘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미국의 ‘과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자카리아의 지적을 잘 들여다보면 새겨들을 구석이 없잖아 많이 있다.

그럼 프리드먼은? 프리드먼은 원래 중동 전문가인데,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때부터 세계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경도와 태도’에서는 9.11 이후 미국 맛 간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또라이 끼를 드러내 보이더니, ‘세계는 평평하다’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 ‘렉서스~’ 논조로 돌아섰다.

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프리드먼은 카플란보다는 착한 것 같은데 왜 못돼먹은 카플란만큼의 통찰력이 안 보이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프리드먼이 유명하기도 훨씬 더 유명하고, 책도 훨씬 더 많이 팔았을 텐데 말이다.

이유는 어쩌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리드먼은 유대계이고, 정상적인, 조지 W 부시 식의 일자무식 외교와는 딱 선을 긋는, 민주당 성향의 저널리스트다. 프리드먼은 유대계 언론 뉴욕타임스의 유대계 간판 필자이고, 중동이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해 정도가 누구보다도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플란처럼 ‘무식하게 까대는’ 짓은 안 하고, 못 한다. 자카리아는 학구적이고 카플란은 ‘끝까지 함 가보는’ 그런 스타일인 반면에 프리드먼은 적당히 학구적, 적당한데서 끝내는, 어딘가 나이브하면서 전형적으로 ‘저널리스틱한’ 그런 스타일로 보였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렉서스~’ 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쿠웨이트의 미군들은 로봇군단에게 개박살 난다. 미군들은 본국으로 SOS 전화를 때린다. 전화는 누가 받나? 인도의 전화교환수들이 받는다. 글로벌 아웃소싱의 한 단면에 대한 절묘하고도 멋지구리한 풍자! 프리드먼은 ‘트랜스포머’보다는 쫌 덜 극적으로, 쫌 덜 재미있게,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다른 책자들보다는 그래도 생생하게, 최소한 생생한 척 하면서, 유명한 사람들(주로 세계적인 기업 총수들)과 ‘평범한 이웃들’의 말을 조잘조잘 섞어가면서 글로벌 경제의 속살들을 헤짚는다.
이 책의 타이틀을 놓고서 “세계가 뭐가 평평해, 불평등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비판하는 건 좀 어불성설이다. 이 책은 “세상의 모순 따윈 이제 없어졌다”고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평평해져 가는 세계’의 일선 주자들을 들여다보고, 그 뒤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미리 짚어보기 위한 것이니깐.

뒷부분 테러 얘기 나올 땐 지겨워서 환장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세계화의 구체적인 지점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읽을만했다. 이름 붙이기, 즉 ‘평평하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식의 브랜드 짓기가 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괜찮은 책이다.

사실 프리드먼은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또한 미국의 주류보다 앞서나가는 측면이 있다. 이전 책들 볼 때엔 사실 “이렇게 세계를 누비면서 어째 이렇게 꿰뚫어 찌르는게 없나” 싶어 짜증이 나기도 했었는데, ‘세계는 평평하다’에 이르면 프리드먼도 아주 ‘길이 나서’ 통찰력 비슷한 것을 많이 보여준다. ‘세계화 시대 자기계발법’ 이런 것에 관심 있는 사람도, 이 책에서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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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11-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보면 딸기님이 너무나 존경스러워요.....

딸기 2007-11-12 17:46   좋아요 0 | URL
한껏 유식한 척, 잘난척한 보람이 있군요 ^o^

저는 이네파벨님이 존경스러워요. 우리 서로 존경하고 살아요 ♡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 국민 만들기, 시민 되기, 그리고 성의 정치
문승숙 지음, 이현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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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으으으... 이런 책은 별점을 마구마구 더줘야 하는데...

 

아주 속이 시원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한번씩 읽어봤음 좋겠다. 올 하반기 읽은 책들 중에 정말이지! 맘에 드는 책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 군사독재, 다른 말로 ‘개발독재’가 시작된 이래 남성성과 여성성을 어떻게 차별해서 ‘나라만들기/국민만들기’에 동원했는지를 파헤친다.

저자는 1960년대부터 1987년 이전까지를 ‘군사화된 근대성과 성별적 대중동원’의 시기로 규정하고, 그 이후 2002년까지를 ‘군사화된 근대성의 쇠퇴와 성별화된 시민성의 대두’로 정리한다. 말하자면 이 책의 핵심 개념은 ‘군사화된 근대성’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근대성도 우리나라에선 군사화돼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 군사주의의 빛(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분명 있다, 그것도 많이)과 그늘(알게모르게 군사주의를 강요하는 시스템이 어디 한둘인가)이 지긋지긋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조목조목 짚어주니 구절구절마다 무릎을 치지 않을수 없었다. 좀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용어들이 없지 않았지만 정말 명쾌하고, 추리소설보다 더 재미있었다.
 
 

군사화된 근대성의 핵심 요소는 공산주의자 타자와 싸우는 반공주의의 자아로서 한국을 구성하는 것, 훈육과 물리력으로 반공 국가의 구성원을 만드는 것, 산업화 경제를 군 복무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주적’ 북조선에 맞서는 반공국가로서 세워졌다. 나라를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함으로써, 근대화를 추진하는 국가는 감시와 정상화라는 훈육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제도화된 폭력까지 사용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집단을 개조했다. 또 국가 정체성을 그와 같이 구성함으로써 다른 어떤 사회정치적 문제보다 군사적인 국가 안보가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강한 근대적 국가를 구축하는 것, 남성의 군 복무를 경제 조직에 통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46~47쪽)

 

사실 196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대중 군사동원이 사회 정치적 세력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경험이 전혀 없었다. 혁명 투쟁이나 독립 전쟁의 역사기록을 보면 그 시기 동안 평범한 남자들이 군인이 됨으로써 시민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병역의 긍정적인 유산이 있으면 군 복무가 단지 피지배자에게 강요되는 부담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라고 보는 시민 공화주의에 기초한 관점이 생길 수 있다.
...한국의 제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은 6·25 전쟁 동안의 대중 군사동원에 대한 대가로서 전후에 후한 경제적 혜택을 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 대중 군사동원이 사회 경제적 권리를 얻는 길이 되는 역사적 경험이 없다는 것은 군 복무를 단지 위험하고 강제적인 부담,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대중적인 인식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77쪽)

근대화 국가가 여성의 국민 의무를 구성하는 데 생물학적 재생산자라는 여성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국가는 산업화를 추진하면서는 여성을 임금 노동자로 통합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 몇 십 년간의 인구 억제정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근대 국가의 여성 통합은 자식을 낳는 여성의 역할에 근거해서 이루어졌고 여성의 국민 의무는 자기 생식력의 애국적 통제로 요약되었다는 점이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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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11-05 15:25   좋아요 0 | URL
마구마구 지르십시오. 전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

비로그인 2007-11-0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왔어요. 다만 군대라는 것이 정점에 있다고 해야 맞겠죠.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군대는 정말 '대학'이 맞습니다. ㅋㅋ

딸기 2007-11-05 16:37   좋아요 0 | URL
근데 대학에서 배운 건 안 지키면서 왜들 군대에서 배운건 세상에 나와 떠들어대는지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07-11-05 17:45   좋아요 0 | URL
못나서 그렇죠 뭐 ㅋㅋ

딸기 2007-11-06 07:03   좋아요 0 | URL
우하하 우문현답이네요 ^^

라주미힌 2007-11-0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딸기님을 신뢰하나이다...
지름신 출동... :-)

딸기 2007-11-05 16:37   좋아요 0 | URL
에헤라디야 ~(^^)~

딸기 2007-11-0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가만가만... 넘 질렀나 싶은 생각도 살짜쿵...
명랑쾌활한 책은 당.연.히. 아닙니다... 어쩌면 페미니즘 쪽에 관심 가지셨던 분들은
저처럼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끼진 않으실 지도 몰라요 ^^;;

마노아 2007-11-0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은 폼푸질이에요^^

딸기 2007-11-06 07:01   좋아요 0 | URL
ㅋㅋ 마노아도 넘어가라... 넘어가라...

로쟈 2007-11-0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뒤늦게 독자(임자)를 맞났군요.^^

딸기 2007-11-06 07: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이 제법 따끈따끈할 때 사놓기는 했었어요 ^^;;

멜기세덱 2007-11-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읽다가 잠깐 접어놓았더랬는데.....딸기님 땜에 다시 꺼내 읽어야겠어요...근데 전 잘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ㅋㅋㅋ

딸기 2007-11-06 07:02   좋아요 0 | URL
쉽게 술술 넘어가지는 않아요, 사실.
그런데 뭐랄까, 뿌연 안개를 시야에서 싹 걷어주는 느낌이 있어요.

다락방 2007-11-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런쪽으로는 완전 문외환에다 무관심인데 보관함에 넣어버리고 말았어요. 하하 ^^;;

딸기 2007-11-06 07:02   좋아요 0 | URL
사셔요! 사셔요!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 Post-Human 1세대를 위한 안내서
도미니크 바뱅 지음, 양영란 옮김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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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이란 개념도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다. 인간 그 다음의 인간.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랜 세월의 진화를 거쳐 형성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 머릿속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속성들을 뛰어넘는 ‘갑작스런 진화’의 결과물은 분명 기존의 상상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 변화가 과연 얼마나 갑작스런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엄지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엄지족 세대와 기성세대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양질 전화에 있으니, 양적인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전혀 다른 인간이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다만 그 양적인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뿐이지, 변화는 점진적으로 오기 때문에(어느날 갑자기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새로운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깨벗고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양질전화를 이룬 미래의 인간은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새로운 인간으로 보일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같은 ‘오래된 눈’을 가진 사람들에겐 전혀 새로운 종류로 보일, 그렇지만 점진적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서 출발해서 비로소 나타날 ‘다음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 보인다. (다음 세대의 인간을 저자는 탈(脫)인간이라 이름붙였지만 그들이라고 인간이 아닐쏘냐. 포스트휴먼은 그저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나온 말이니 구애받을 필요는 없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휴먼의 탄생을 전망한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죽음’을 다룬다. 어쩌면 미래사회 인간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오래산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현생인류의 목적이자 미래 인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시간표를 늦추면서 인류는 진화의 궁극을 향해간다?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2장 ‘포스트 바디’가 그 해법을 보여준다. 게놈시대 이야기는 이만 생략.

 

이어지는 장들은 ‘포스트 에고’, ‘포스트 릴레이션’, ‘포스트 리얼리티’를 다룬다. 낙관과 비관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소설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미래의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이런 종류의 책들이 다룰 수 있는 최대한도는 ‘트렌드’가 될 것인데, 이 책은 인간 변화의 트렌드를 전하면서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되도록 많은 이슈를 담았다. 포스트휴먼들에겐 세대 사이의 관계가 후원이나 양육이 아닌 경쟁이 될 것이라든가, 고도의 물질문명에서 배태된 포스트휴먼 시대에 기계 숭배는 오히려 끝나고 생명의 복잡성이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예측, 포스트휴먼적 ‘극장쇼’ 관점에서 바라본 9·11 테러의 의미 등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저자는 미래학자인데, 프랑스식 유머가 간간이 배어있어서 책 읽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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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기원 - 최첨단 경제학과 과학이론이 밝혀낸 부의 원천과 진화
에릭 바인하커 지음, 안현실.정성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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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과학인가. 과학이라면, 어째서 실물 경제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무용한가.

원래 경제학은 생물학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 맬서스 인구론을 생각해보라. ‘적자생존’을 경제에서의 흥망에 적용하면서 근대 경제학이 시작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리학을 닮은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를 수요-공급의 함수곡선과 ‘균형’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리학적 균형에 경도된 경제학에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적용, 다시 되돌리자는 것. 저자가 제안하는 ‘생물학적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론 적자생존 생물학과는 다른 ‘복잡계 경제학’이다.

여러 행위자들의 미시적인 움직임이 거시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행위자와 시스템이 공진화(共進化)하는 그런 체제를 복잡적응계(CAS)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복잡계 경제학이란 말을 했더니, 누구는 “복잡계가 뭔데”라고 묻는다. 나도 잘 모른다. 쉽게 말하면, ‘복잡한 체계’가 복잡계다. 이렇게 복잡한데 어떻게 그럭저럭 잘 움직여나갈까 싶은 그런 것이 복잡계다. 서울시내에 1300만명이 사는데, 맨날 교통체증 붐빈다고 하면서 그래도 어떻게 교통시스템은 잘 굴러가네. 우리 몸은 참 누가 만들었는지 병균 들어오면 알아서 저항하고, 힘에서 밀리면 좀 아프다가 또 낫고, 추울 때 더울 때 생각하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조절하고 참 신기하네. 이런게 복잡계다. 완벽한 설계자 없이도 어떻게든 돌아가는, 가끔씩 탈을 일으키지만 그런대로 돌아가는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말한다.

경제는 복잡하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경제학은, 경제의 바탕인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천재적인 분석가에다가 완벽한 정보를 갖고 빈틈없이 판단한다, 시장은 이렇게 퍼펙트한 사람들이 퍼펙트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간간이 요동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요공급의 황금률에 따라가게 된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그래서 증시의 변동도, 물건들 가격도 결국은 제대로 예측해낼 수가 없었고 심지어 설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완벽을 가정(假定)해놓은’ 과거의 경제학에서 벗어나 경제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제의 행위자들(사람들)이 움직일 때에는 정보의 오류·부족이나 시간 차이 같은 것들이 있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렇게만 해놓으면, 대체 복잡계 경제학이 생물학의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책의 타이틀인 ‘부의 기원’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인지 감이 안 오기 쉽다. 이 점에서 ‘진화’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생물학에서의 진화는 대략 이러저러하게 생명체들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돼 왔다는 의미. 저자는 진화라는 것이 생물학에서 말하는 이런 메커니즘을 넘어서, 세상이 굴러가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인류사회는 진화해왔다! 경제는 진화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화는 보편적 알고리즘이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진화하고, 행위자들의 작은 진화가 모여 시장 자체가 진화한다. 시장이 진화하면 국가적 사회적 제도적 장치들도 진화하고, 그래서 다시 시장과 행위자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경제의 진화를 물리적 기술, 사회적 기술, 사업계획이라는 세 가지의 공진화로 설명한다. 경제의 진화는 하나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세가지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진화의 결과라는 것. 물리적 기술은 말 그대로 테크놀로지, 전통경제학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기술의 발전을 말한다. 사회적 기술은 공적인 제도는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태도 같은 것들(사회적 자본)이 다 들어간다. 사업계획은 비즈니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부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자. 전통경제학자들은 시장과 행위자의 존재를 가정하는데, 시장은 어떻게 해서 생겼으며 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전통경제학자들의 가정과 달리, 태초에 시장은 없었다! 저자는 몇몇 학자들이 시도한 ‘슈거스케이프(설탕 나라)’라는 간단한 시뮬레이션 실험을 소개하는데,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다. 가상 공간에 설탕 산(山)이 있고 설탕을 열량 공급원으로 필요로 하는 행위자들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실험은, 자원이 있고 그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활동이 생겨난다, 시장과 거래가 생겨나고 금융과 계층간 격차가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큰 차이를 불러온다는(경제는 경로의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복잡계와 진화의 알고리즘은 경제에서도 통용된다. 한번 경로를 잘못 들이면 격차는 벌어지게 돼 있다.

복잡계와 진화라는 개념을 통해 저자는 경제의 패턴들을 설명해나간다. 어떤 사회 혹은 기업의 문화(사회적 자본)가 서로 다른 사회 혹은 기업들 간에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불러온다는 것, 경제의 행위자들은 연역적 추론 대신 과거 경험을 통한 귀납적 판단을 따르기 때문에 시장에는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완벽한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슈가스케이프라는 단순한 모형이 주는 시사점은, 가난과 불평등의 인과관계가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가난과 불평등은 아주 복잡한 요소들이 혼합된 결과다. “가난은 착취 때문에 생겨난다”는 좌파적 진단이나 “가난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우파적 진단 모두 극도로 1차원적이고 단순한, 현실에 맞지 않거나 혹은 일부분만 맞을 뿐이다.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복잡계에서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지만,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시장은 효율적이다. 그러나 공진화의 세 가지 공간, 즉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은 시장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시장을 벗어나 사회·제도·문화에서 나온다. 그래서 저자는 과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논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제3세계(딱 집어 아프리카)의 빈곤 원인 같은 것이 분명 ‘문화적 요인’에도 있음을 명시한다.

원인을 복합적으로, 자신있고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좌우의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그런 자신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좌우를 벗어나야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원인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해법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복잡계 경제학은 전통경제학과 완전히 갈 길을 달리 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한가지 방편을 넘겨주었다. 경제적 진화를 예측하거나 지휘할 수는 없겠지만, 진화를 잘 하느냐 잘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제도와 사회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514쪽)

저자가 초반부에서 설명했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에는 산타페 연구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책에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산타페 연구소는 복잡계 이론의 메카에 해당되는 곳이다. 칼텍(CalTech)에서 오만한 장난꾸러기 리처드 파인만의 앙숙이었던 머레이 겔만의 제자들이 이 메카의 사도들이다. 어떤 책에서인가, 환원주의의 아버지 격인 겔만의 후예들이 복잡계 학문을 연 것은 역설적이라고 쓴 구절을 읽은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산타페 연구소 존 홀런드의 복잡계 이론이 계속 강조된다. 더불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모델도 경제적 행위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틀로 자주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은 1970년대 일리야 프리고진 이래 비선형 열역학과 복잡한 세상을 바라보는 ‘겸손한 학문’들의 등장, 물리학자와 경제학자들 간의 ‘통섭’의 결과물인 셈이다.

책의 전반부가 복잡계 이론의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경제학에 적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계 경제학의 면면들, 복잡계 이론의 프레임을 통해서 본 실물경제와 시사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복잡계 경제학은 아직 세상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저자의 설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촘촘하다.

엔트로피 문제에서 기업 조직을 혁신적으로 만드는 방법, 주주자본주의와 스톡옵션의 문제점까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면서도, 저자는 스스로 설정해놓은 복잡계 경제학의 주요 개념들과 분석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70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인데 내용이 모두 일관되고 흐름이 명확해서 끝까지 느슨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홀런드의 이론이나 생물학 개념들을 미리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좀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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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14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리뷰대회 입상하셨어요~ 축하해요^^

멜기세덱 2007-12-1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축하드려요^^;;

딸기 2007-12-1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세상에, 그런 일이??? 확인해볼께요. 감사~~~
근데 나 그런거 나간 적 없는데??
 
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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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책을 오래 걸려 읽는 편인지라, 처음 책을 펼칠 때에 표지 안쪽에 읽기 시작한 날짜를 적어놓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유독 이 책 앞쪽에는 내가 날짜 적어놓는 것을 잊었는지 표시가 안 되어있다. 날짜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다 읽기까지 몇 달은 걸린 것 같다. 실은 앞에 지지부진 진도를 못 나가다가 요 며칠 새 후닥닥 읽었다. 갑자기 재미가 들렸는지, 소박하고 힘 있는 스토리에 확 빠져들었다.

제목 그대로, 책은 불가촉천민 Untouchables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나렌드라 자다브는, 이 책의 소개에 따르면 장래 인도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행정가이다. 구글에 naren 까지만 치면 그의 이름이 저절로 뜨는 것을 보니, 유명한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세계 돌아다니며 강연도 하고, 지난 6월엔 한국에도 왔었다. 이 책도 세계 곳곳에서 히트를 쳐서 많이 팔리긴 한 것 같다.  얼핏 책을 둘레둘레 살펴보면 천민 중의 천민, 달리트(불가촉천민) 중에서도 시체 치우는 달리트 출신의 빈민가 소년의 성공담처럼 포장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책은 나렌드라 자다브가 아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다.

가난하고 비천한 취급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저항하고 자식들을 가르친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 이야기를 두 사람 관점에서 이리 보았다 저리 보았다 하며 소박하게 써내려갔다. 문체도 내용도 소탈하면서 재미가 있어, 달리트의 차별 철폐 투쟁담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인도인 부부의 험난했던 삶 쪽에 오히려 더 눈길이 갔다. 그래서인지 카스트 얘기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 어느 나라에서나 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얘기로 들렸다.

어머니 아버지 힘들었지만 씩씩했던 삶의 이야기가 좀 지나고 마지막 부분에는 저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와 ‘성공한 달리트’가 되어 바라본 세상 이야기 같은 것이 좀 나온다. 끝부분에는 출세한 아버지 밑에서 일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 다니고 있는 딸, 즉 이 책의 주인공 다무와 소누의 손녀가 쓴 에세이도 몇 장 붙어있다.
모두 재미있었다. 그런데 인도에선 이미 K R 나라야난 같은 달리트 출신 대통령이 있었고 민주주의 잘한다고 서양 나라들이 막 칭찬하고 그러는데 왜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저렇게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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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즐거움 2007-10-31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없어지지 않았나요?
다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은채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 같은데....
참, 궁금한게 카스트제도에 조차 속하지 않은 불가촉천민이 있다는 건 왜 학교에서 안가르쳐 주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때 이과여서 그랬나... 중학교때도 카스트제도만 언급하고 그 이외에는 말해주지 않았던것 같은데,,,,,

딸기 2007-11-01 06:47   좋아요 0 | URL
음... 그랬나요? 불가촉천민 얘기는 학교에서 못 배운 것 같기도 하고...

2007-10-31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11-01 06:48   좋아요 0 | URL
올만이어요!
재밌네요, 외국인들에게까지... 정말 뿌리깊이 남아있는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