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두가 아빠엄마와 가장 즐겨하는 놀이는

끝말잇기..

몇달전만해도 끝말잇기와 '00'로 시작하는 말을

영 헷갈려 하더니만.

요즘은 제법 다양한 단어를 구사할뿐만 아니라

승부에 대한 강한 집착에 따른 약간(!)의 억지까지 더해져

불패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가끔 아빠가 '이산화나트륨'이라든가, '구름' 뭐 이런 질 낮은 대응을 자제한다면 말이다.)

 

연두부는 출장 후 또 다른 일정으로 귀가가 한참이나 늦어지고 있는 어제 저녁 우리집..

 

연두 : 엄마 끝말잇기 할까?

나 : 그래~

연두 :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

나 : 그래~ (시큰둥!!  연두가 이겨도 연두먼저.. 연두가 져도 연두먼저란다.. )

 

(연두) 사과 -> (나) 과일 -> (연두) 일요일 -> (나) 일기 -> (연두)기차 -> (나) 차고 -> (연두) 고양이 -> (나) 이민서 -> (연두) 서울 -> (나) 울산  -> (연두) 산.... 산... 산하고~ 바다하고 ~ 누가누가 더 푸른가~~ (나) 모야~?

 

아랑곳하지 않고... 율동을 덧붙여 끝까지 부른 후..

요르레히~~~~~~~요르레히~~~~~~ 요르레히히히 요루레히1

멋진 후렴구까지 마친 후...

엄마 요르레히... '히'자로 시작하는 말은?

 

ㅎㅎ

 

그냥... 연두는 하루하루  커가는데..

다섯살때 연두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

네살때 연두에 대한 추억은 오리무중....

 

오늘 하루, 짧은 시간 연두와의 추억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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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2-0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집집마다 아이들 노는 양은 어쩌면 이리 똑같은지.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920211


고니 2007-02-0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한거 아냐?
 

어제 서울에 2건의 회의가 있어 새벽에 일어나 아침 10시, 오후 3시 30분, 회의시간은 합해서 5시간 정도의 강행군을 하고 내려왔다.

전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 뒷풀이하고 내려 가라는 걸 대전에서 선약이 있다며 부랴부랴 내려온 시간이 저녁 8시 무렵...

15년 이상을 알고 지내며 마음으로 항상 존경의 맘을 가지고 있는 김**교수님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어 부득불 내려왔던 것이다.

movie, ms형도 같이 만났는데 1차 중국집에 이어 새벽 2시까지 이어진 뒷풀이는 오랜만에 즐거운 자리였다. 

교수님의 그렇게 즐거워 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ㅎㅎㅎ

사람, 지역, 운동, 문화의 얘기가  흘러 넘쳤고,  시골 어디쯤 있을 법한 흐름한 교수님의 단골 노래방의 분위기는 웃음과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뭐 꼭 같지야 못하겠지만 교수님처럼 나이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든 눈 그친 새벽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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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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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찬가’이지만 찬가의 이미지에 맞는 내용은 책의 초입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조지오웰은 처음 스페인을 찾았을 때 전쟁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카탈로니아에서 만난 이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전쟁에 자원입대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이 서른을 넘긴 유부남을 다른 것도 아닌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했을까?

세계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 같은 군대에서 마저 상하 구분이 없고,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분위기, 노동계급이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섰던 내전 초기 아나키즘의 카탈로니아 묘사는 흥미롭고, 마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는 초원을 연상시키듯이 평화롭고 상큼했다.

오웰 자신이 변변한 전쟁은 치러보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생생한 전쟁터의 묘사마저도 전쟁이라기보다는 한가한 시골 기행문을 읽는 느낌이 났던 것은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참가한 이 들의 역사적 정당성에 기인한 ‘정의로운 안도감’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후반부에 나오는 이른바 1937년 5월 사태의 시가전과 그로 인한 도망, 은폐 등의 묘사는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듯이 급박하게 그려진다.


고등학교때 읽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기억과 ‘스페인 프로축구’의 범상치 않은 지역주의와 클럽문화와 함께 맛 본 스페인 내전에서의 공화파의 정체성은 이 책에서 서술한  분열과 반목을 접하고 나서는 더 이상 그리 정의롭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이 처음 출간 될 때의 상황은 조지오웰이 따로 부록과 같은 5장과 11장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오웰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스페인 내전에 대한 경향과 조류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내전 당시 공화파는 분열했고, 스페인 내전의 승리는 파시스트 프랑코에게 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분열한 당시의 정파들마다, 제 각기 스스로에게 아니면 다른 정파에게 변명과 공격을 할 수 있겠지만 오웰이 분명하게 이 책을 통하여 밝히고 있는 것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자치와, 혁명의 분위기 스스로를 거두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소련의 입장을 대변한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푸르동'이 격렬한 맑스 비판을 통해 주장한 ‘공산주의자들의 인민국가’의 위험성을 몇 십년 뒤에 무너져 버린 소련이 아닌 스페인 내전을 통해 먼저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나처럼 스페인 내전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책 마지막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스페인 내전의 대강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훨씬 책 내용을 파악하기기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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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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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한 인생’의 정의는 무엇일까? 실패한 인생도 아니고 패배한 인생이 있다면 당연히 ‘승리한 인생’도 그 옆자리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위대한 패배자’는 그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단순한 패배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아니다. 물론 ‘비참한 패배자들’과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들’이란 소제목속의 몇몇 인간군상은 안타까울 정도로 패배의 늪으로 곤두박질 쳤지만 대부분은 ‘천재’ 혹은 부단한 노력으로 인생의 정상 언저리를 밟아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필부인 나의 눈으로 보기에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패배자’란 말을 -비록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있지만- 붙이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이 한 때 성공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의 삶을 패배로 이르게 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의 지나친 자신감과 열정, 주변사람들(친구, 가족, 라이벌), 또는 시대를 타고 나지 못한 불운, 혹은 개인의 아둔함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패배한 인생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서술 분위기가 어두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상에 올라서기까지의 과정도 함께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인생역정을 가졌던 라이너 바르첼(바르첼은 끝까지 집권하지 못했지만...), 아들에게 명성을 뺏긴 요한 스트라우스, 마르크스에게 부당하게 배척받은 라살 등의 삶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기도 해서 인상 깊게 남는다.


언젠가 모 대기업 광고에서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가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역사는 과연 2등을 기억하지 않을까? 패배자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학창시절 뭘 해도 10등 안에 들지 못했던 인생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등, 혹은 승리한 인생역시 한때 패배자였었고 패배한 삶의 조력이 있었기에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2등이 패배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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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1-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사회는, 전기들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로만 설정하고 기술하는 것일까? 협잡한 것도 아닐텐데. 황량하기만 한 사회란 야생속에 홀홀단신 헤쳐나가는 환상을 불러 일으키고 그 구도 속에 넣으려고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보이지 않는 묵직한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라는 자양분 속에 1,2,3등이 있을터인데. 인생을 개인의 실패-성공으로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아둔함'은 아닐까? 그 많은 성공의 그늘에 '우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의 명예회복을 꿈꾸며... 9할이상은 '우리'가 개입되어 있을터인데... '우리'의 시선으로 지난 사건들의 복원을 꿈꾸며...별네개씩이나 준데대해 공개적 반대의사 표시하며...!!!
 

내 신통치 않은 기억으로도 생각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중반 중학교 때 정도였던 것 같다.
그즈음 한참 TV뉴스시간만 되면 일본 정부가 실시했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를 거부하는 피켓시위나 기자회견 따위의 장면들이 자주 나왔던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곤 당연히 없었던 시절이었고, 수학시간만 되면 그날의 주번이 누구인지, 요일, 날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리 잡는 것 따위에 온 정열을 쏟았던 복지부동, 무사안일의 청소년기였기에,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외국인을 범죄인 취급하며 지문을 등록하는 아주 악랄한 제도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현실에 설움이 아주 잠깐 복받쳐 왔고, 그때 당시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C8 역시 쪽00다운 짓이야!”라는 말을 뱉으며 아주 잠깐 극렬한 반일 감정을 지닌 민족주의자로 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만17세가 되어 나도 동사무소에 가서 주사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 열손가락을 전부 다 '지문날인’을 하고 그 당시까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예비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때 당시야 성인인증을 받았다는 희열에 우쭐함까지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피켓시위를 하던 아저씨 아줌마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지문 날인제도’의 부당함을 설명하셨던 선생님도 열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은 180도 돌려가며 확실하게 지문 날인을 하며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텐데,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그 엄청난 자신감과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계속적인 반대 운동 때문에 1999년에 일본정부는 ‘외국인 지문날인제도’를 완전 폐지했지만 그 이전 그래도 현해탄 넘어 간간히 들리는 폐지요구에 대해 혹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엄지손가락만 한다...”

일본 도쿄 중심가의 황궁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쿄돔 야구장의 2배크기로 1869년 메이지 천황시절 황군의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 신사로 지어졌으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 전몰자 중 총 246만여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가미가제 돌격대원의 동상, 야마토(大和) 전함의 포탄, 군마(軍馬), 군견(軍犬)의 위령탑 등이 즐비해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군인칙유(천황이 내린 제국 군인의 덕목) 비석과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일종의 전쟁박물관도 볼 수 있다고 하니 특히 한국 사람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 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쯤 되면 대강 짐작을 했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 곳이 동북아 주변국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시점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70년 후반 이후라고 하는데,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가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신사참배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꾸준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어 주변국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서춘은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친일 논조를 주장하고 친일잡지 ‘태양’을 만든 대표적인 친일언론인이었고 김창룡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일제관동군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 암살의 명백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시대는 좀 다르지만 유학성은 12.12쿠데타의 핵심인물로 1997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모의 참여등의 죄목으로 6년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2주전에, 끝까지 운 좋게도 죽고 만다.(그 외에도 공통점이 있는 인물들이 제법 있지만 지면상 이 세 사람만 거론하겠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국립묘지에 묻혀있다는 것인데, 연관된 또 하나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어떻게든 국립묘지에서 파 낼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서춘의 묘는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8년만인 2004년에야 파냈다.)
일본의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반도 일제 강점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한 행위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광복 6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일본 고위관료들에 의해 여전히 무슨 월별행사처럼 침략전쟁 정당화 발언과 위안부 등에 대한 망언이 터져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는 놓여있다
국립묘지(國立墓地)란, 나라(國)에서 세운(立) 묘지를 말한다.
이미 누더기법이 돼 버린 ‘친일진상규명법’은 둘째 치고라도 친일파와 내란죄로 유죄를 받은 자를 국립묘지에 눕혀놓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오히려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확신범적인’ 당당한 태도는 우리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신에 찬 의구심을 가져본다.
마지막 임시정부요인이셨던 조경한 선생은 1993년 임종에 앞서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바뀌어 함께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에서 세운 국립묘지에 나라 팔아먹은 자와 반란 가담자가 버젓이 누워있는 신비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의 현대사가 질곡의 순간마다 파내야 될 것을 파내지 못한 ‘삽질’의 역사였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즈음 위정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국립묘지에다가 제대로 된 삽질 한번만이라도 해주길...
(대전충남 민언련 기고글 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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