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함께 맡는 민들레꽃 내음은 참으로 좋았다. 그 조그만 게 피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뿌리 내린 흙의 저 깊은 속살의 꿋꿋함과 그 조그만 것까지 골고루 사랑한 봄바람의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까지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도 기억할까? 만 두 살 적의 어느 황홀한 봄날을. 그의 볼과 머리털에 머물렀던 할미의 눈길을.
손자야, 너는 애써 그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내 애들 중 예능 방면의 천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모를 알량하게 만나 묻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간혹 들긴 하지만 이다음에 ‘큰소리’치기 위해 지나친 극성을 떨 생각은 아예 없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히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 · 미술 · 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6학년이 되기 전부터 할머니는 개성으로 완서가 수학여행 오면 떡 해 가지고 역까지 마중 나오실 것을 벼르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 날짜가 정해지자 어머니가 할머니께 편지까지 올렸으니 마중 나오실 건 틀림이 없었다.

"보꾸엔쇼야, 보꾸엔쇼야."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입에 담으신 최초의 일본말이자 마지막 일본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 발음이 오죽했겠는가.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는 목놓아 울고 싶도록 슬프게 들렸다. 아무도 할머니의 그 괴상한 발음이 내 이름이란 걸 알아듣기 전에 나는 슬픔과 미움과 사랑이 뒤죽박죽된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로 뛰어갔다.

그때 나는 그게 무거워서 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베보자기와 할머니의 당목치마가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 전날 아마 밤잠을 못 주무시고 송편을 빚으셨을 테고, 새벽에 쪄서 정갈한 베보자기에 싸서 이고 아침나절에 20리 길을 걸으셨으리라.
이제 와서 회한이 가슴에 사무친들 무엇하리오. 그분이 돌아가신 지는 벌써 30년을 넘어 헤아린다.

음식을 덮어 놓기도 하고 만두 속이나 제육을 거기에 싸서 누르기도 하고 약식이나 빵을 찔 때 깔고 찌기도 한다. 음식에 닿는 섬유는 베가 아니면 딱 질색이다.
그 정결하고 시원하고 성깔 있고 소박한 섬유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때 할머니한테 저지른 나의 불효가 갚아지기야 하랴만, 그 섬유가 할머니의 손길만큼이나 좋은 걸 어쩌랴.

우리가 겨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에서 식도락을 즐길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워진 게 사실이라면 고기 냄새는 부엌과 식당에서만 맡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산과 계곡, 강가에서까지 산바람 강바람 대신 고기 냄새를 쐬어야 한다는 건 풍요롭긴커녕 궁상스러워 보였다.

마치 우리의 인생행로에 요행보다는 불의의 재난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운 날보다는 쓸쓸한 날이 더 많듯이.

그 최초의 인식이야말로 자연과의 교감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가 쓸쓸할 때는 달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기쁠 때는 달도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향집을 떠나 처음 서울에 와서 산동네 빈촌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었을 때 달이 서울까지 나를 따라왔다는 걸 발견하고는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던가.

달보다 휘황한 게 너무 많은 밤이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든, 싸워서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든 할머니와 어머니의 처방은 마음으로부터 안쓰러워하면서 그저 입김을 ‘호오, 호오’ 불어주시는 게 고작이었다.

어머니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걸 허구한 날 먹는 아이가 마치 헐벗은 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슬퍼하지 않은 어린 날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런 일이 어머니의 입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복과 평화로 회상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 자식들이나 내 손자들이 훗날 그들의 어린 날을 어떻게 기억할지 문득 궁금하고 한편 조심스러워진다. 나보다는 내 자식들이, 내 자식들보다는 내 손자들이 따뜻한 입김의 덕을 덜 보고 자라는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까지도 매스컴이나 그 밖의 정보를 통해 대량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대로 물려 오는 입김이 서린 가풍家風마저 소멸해 가고 있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심심해하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입김 속에서, 즉 사랑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활발하게 일어나는 게 평화가 아닐는지.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건 억지밖에 안 되리라. 숨결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있다면 억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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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이 흘려 놓은 것 중 좀 중요하다 싶은 건 깊이 챙겨두긴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 뒀는지 깜깜이 되고 만다. 이젠 아이들이 뭘 찾다가도 엄마가 잘 뒀다는 말만 하면 좋아하기는커녕 숫제 찾던 손을 멈추고 미리 절망적인 얼굴을 한다. 아이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막막해지면서 자신이 싫어진다. 왜 잘 챙겼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면서 정작 그게 어디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지 내 일이건만 참으로 딱하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땅은 얼마나 위대한가? 일용할 양식과 함께, 그 아름다운 조락調落을 만들어낸 땅에 겸허하게 엎드려 경배드리고 싶은 충동과 아울러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요새 나의 감동은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과 상통하고 있다. 하다못해 깔끔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나서도 문득 슬퍼진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만 65세만 넘으면 노인증이나 주민등록증만 보이면 공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을 버는 노인이니까 돈 내고 표 사서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 따위 잘난 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현금으로 걸 수 있는 데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가 돈을 남겨 놓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나오는 데가 없나 잔뜩 눈독을 들이고 기다렸다. 그날따라 아무도 거스름돈을 남겨 놓지 않았다. 길에 나가면 가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돈 남은 공중전화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자 남은 희망은 단 하나,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계단 밑에 턱 쳐들고 서서 누가 나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박완서 씨 아니세요? 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렇다고 하고 나서 500원만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아무도 나한테 아는 척을 안 했다. 혼잡한 통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모두 귀찮다는 듯 밀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거기서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더 막막한 무서움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 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잘 못한다고 하면 조금은 하는 것 같지만, 음정을 못 맞춘다는 자의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학교 다닐 때 음악 시험 때 말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 할 자유가 없냐?" 하고 외치고 말았다.
너무 진지하게 외쳤던지 나름대로 흥청거리던 분위기가 일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치가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7, 80년대를 끽소리 한마디 못 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런 자기혐오는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는 열등감으로 이어져 온종일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게,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단박 밝아졌다. 노래도 못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 수녀님은 아직 서원(그리스도교적인 완전 덕을 쌓으며 살겠다고 스스로 하느님께 약속하는 것 - 편집자 주)도 받기 전인 예비 수녀님이었다. 그러나 학덕 높은 현자보다도,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일컬어지는 성직자보다도 더 깊은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그건 깊다기보다는 아마 적절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지요.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른 새벽 잠 달아난 늙은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줍니다.

불평은커녕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차별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더 했습니다. 시골 동무들 중에는 ‘간난이’ ‘섭섭이’ 등 어린 마음에도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지은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애도 많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에 비해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고 태어난 것처럼 느꼈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지만 나는 결코 불쌍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존중할 수 있는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일러바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차츰 고자질하는 버릇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한테 귀가 따갑게 들은,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과 똑같은 잔소리를 내 아이들에게 하게 되었고, 내 성질까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견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소박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은 더 큰 행복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하려고 태어났지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제각각 다릅니다.

최고의 부자, 최고의 권력자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마도 학문이나 예술일 겁니다. 그러나 미美나 진리의 추구처럼 천부의 재능 없이는 끝이 안 보이는 분야가 없고, 설사 재능이 있다고 하여도 좌절과 절망을 일용할 양식 삼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도전하기 힘든 분야가 그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전문 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

열등감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이 처음에 우월감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으스대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 입장을 참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습니다. 나이 먹어 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의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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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식으로 헌신짝을 못 버리고, 시집간 딸들이 버린 헌신짝까지 껴두다가는 죽는 날까지 300켤레쯤의 헌신짝을 모으는 것쯤 문제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적인 화제는 못 되더라도 유족들 사이에서 참 딱한 늙은이였다는 화젯거리로 남게 될 수도 있으리라.

가끔 얼토당토않은 것끼리, 또는 정반대되는 것끼리 묘하게 닮아 보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 달에 10만 원 수입에서 7만 원을 저금했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의 주인공과 남의 돈 내 돈 없이 몇십억 몇백억을 주무르고 사치의 극을 누린 큰손을 가진 사람이 닮아 보일 적이 있다.

그 지나침 때문에. 지나치면 만고의 미덕이라는 절약도 아름답지가 않고,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부도 혐오스럽게 된다.

내가 반 평도 안 되는 현관에 수북이 산처럼 쌓인 헌 구두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이멜다의 구두를 연상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 두 가지는 얼토당토않은 거였지만 아름답지 않고 혐오스럽다는 걸로 매우 닮아 보였다. 뭐든지 그것을 즐기려면 우선 제정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3,000켤레의 새 구두는 이미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다. 병적인 집착이요 광분일 따름이다. 뭐든지 덮어놓고 아까워서 껴두는 걸로 자신을 가장 분수를 지키며 검약하게 사는 걸로 착각해 온 나는 그럼 제정신인가.

그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집착과 자기도취라는 공통점이 있다.

동양 사상이 왜 중용을 인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나를 알 것 같다. 중용은 유교 경전 중 사서의 하나지만, 단지 중용의 낱말 풀이만 들어봐도 아름답다. "마땅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떳떳하여 알맞은 상태나 그 정도"(신용청·신기철 편저, 『새 우리말 큰사전』에서).

이멜다의 구두 덕에 나는 오랫동안 껴두었던 헌 구두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가 있었다. 물론 다시 신을 만한 것 몇 켤레도 남겼다. 내일쯤은 새 구두도 한 켤레 사야겠다. 회색으로 살까 베이지색으로 살까? 눈 딱 감고 분홍 구두를 살까? 주책없이 설레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 벼른 것도 많이 봐두리라는 생각보다는 아무리 좋은 걸 봐도 쇼크 안 받기와 돌아와서 밖에서 본 거 풍기지 않기였다.

지식인들의 그런 말투에선 자신만은 우리 모두의 후진성이나 초라함과 무관하다는 교만한 착각 같은 게 느껴져서 아니꼽게 들릴 때가 많다.

막상 밖에 나간 나는 그들의 잘사는 모습에 정말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랄 만한 건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었지만 우리가 그 방면에 있어서 그들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거고, 적어도 현재의 사는 모습에 있어서만은 우리도 세계 수준이었기 때문에 놀랄 게 없었다.

몇 년 후 일본 구경을 갔을 때는 열등감은커녕 그들의 사는 겉모습이 우리보다 훨씬 궁상맞음을 딱하게 여겼다. GNP인가 뭔가 하는 게 우리의 몇 배라면서 왜 이렇게 못살까가 수상하기도 하고 우리처럼 화끈하게 잘살지 못하는 그들이 딱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재작년에 다시 일본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쪽의 어떤 재단의 초청이어서 보고 싶은 걸 미리 신청하면 가능한 한 다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때도 철없이 여기저기 명승지만 열거하고 맨 나중에 심신장애자를 위한 특수학교를 보고 싶다고 신청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뇌성마비 아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 지켜보면서 같이 분통도 터뜨리고 우리 사회를 원망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나라에선 그런 장애자를 어떻게 돌보고 있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쪽에선 나를 그런 특수학교에 안내하기 전에 내가 신청서에 써낸 시설이 중中 정도라는 단서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나는 재단이 너무 풍부하여 호화롭게 운영하거나 너무 영세하여 궁핍하게 운영하는 시설 말고 중간 정도의 시설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동경도 내의 구區마다 하나씩 있는 심신장애자 시설은 다 도립都立이기 때문에 각기 특성은 있지만 빈부나 우열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했다. 나는 좀 머쓱해져서 그럼 변두리의 어려운 동네에 위치한 학교를 보여 달라고 했다.

학년으로는 중고교의 과정에 해당하는 장애자 교육기관인 어느 도립 양호학교에서 나는 비로소 이게 정말 잘사는 거로구나! 충격을 받았고, 감동했고, 그리고 열등감을 느꼈다. 우리의 부유층이 그들의 부유층보다 몇 배 잘살고 또 스포츠로 자주 국위를 선양하고 곧 올림픽의 개최국까지 된다는 걸 아무리 상기해도 열등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풍족하게 쓰고 있는 건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거였기 때문이다.

그날이 마침 자모회(한 학교 학생들의 어머니 모임 - 편집자 주) 날이었는데, 아이들을 더욱 행복하게 해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시설이 바로 국민 세금으로 된 거니 그럴 수밖에.

소녀는 그 각고의 대작을 선뜻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내 친구 아들의 일그러지고 그늘진 ‘병신’다움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우리의 정박아가 천사 같지 못한 게 어찌 그 부모 탓만이랴. 우리 모두의, 정말 관심 있어야 할 곳에 대한 무관심, 인간다움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내면보다는 외양에 대한 열광이 남은 능히 천사 같은 인간으로 가꿀 수 있는 장애자를 ‘병신’으로 방기한 게 아닐까.

가끔 무엇을 좋아하느냐라든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대답을 못 하고 난처해하면 먹을 것 중에선 무엇, 정치가 중에선 누구 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줘도 대답을 못 하긴 마찬가지다. 싫고 좋고가 자주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대상에 대해 싫고 좋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나는 ‘넉넉하다’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넉넉하다’는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의 가장 궁핍했던 시절과 관계가 깊다.

밥도 방도 넉넉할 거 하나 없는데 어머니는 부자처럼 넉넉한 얼굴을 하시고 사람들을 먹여 보내고 재워 보내고 하셨다. 손님이 간 다음 우리는 어머니한테 신경질도 부리고 때로는 울고불고한 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난처한 건 옷을 살 때였다. 그저 품도 넉넉한 거, 길이도 넉넉한 거, 넉넉한 것만 찾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에게 자기 가진 것을 나누어줄 만큼 넉넉해진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나부터도 6·25 당시에다 대면 지금 사는 게 큰 부자가 된 셈인데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게 차 이상을 대접하려들지 않는다. 명절에 음식이 남아, 더러 버린 적도 있는데도 못 먹게 되기 전에 누구에게 나누어줄 생각을 못 했다. 못 했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번거로워서 하기가 싫었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

광에서 인심 나는 게 넉넉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 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아무리 많아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줄 생각은커녕 더 빼앗아다가 보탤 생각만 굴뚝같다면 가난뱅이와 무엇이 다를까.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소년의 뇌리에 생전 잊히지 않는 악의 화신으로 각인돼 있을 내 모습도 내 모습이려니와 구구절절 자신만만하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나의 설교조의 고음까지 귀에 쟁쟁하여 진저리가 쳐졌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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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변하는 신흥 주택가나 도심지와 달리 안정된 한옥촌은 아늑하고도 구태의연했다.

여학교 시절을 보낸, 지금도 변하지 않은 옛집과 그 앞을 지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문득 나에게 시간 관념의 혼란을 가져왔다. 울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조용히 흐느끼고 싶은 잔잔한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숱한 꿈은 자라면서 맞닥뜨린 현실에 혼비백산, 지금은 그 편린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낼 수가 없다. 다만 그 꿈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 늙어 가고 있음을 알 뿐이다. 하루하루를 사는 내 모습이 별안간 한길로 나앉은 나의 옛집의 모습만큼이나 초라하고 어설프다는 걸 알 뿐이다.

나는 매일 아침 하루의 계획을 세운다. 집에 있는 날은 집에서 할 일을 빠듯하게 짠다. 내가 할 일, 아이들에게 시킬 일, 파출부에게 시킬 일을 분류하고 내가 할 일을 또 가사와 원고 쓰는 일로 나누어 시간 배당을 엄격히 한다. 행여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이 시간 배당에 차질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한다.

나가는 날은 나가서 볼일을 또 그렇게 꼼꼼히 짠다. 외출하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볼일은 어느 하루로 몰아서 치르기 때문에 나가서 볼일도 빠듯이 짜여 있다.

계획한 시간을 예기치 않은 일에 빼앗길까 봐 인색하게 굴다 보니 거의 시계처럼 살려니 꿈이 용납되지 않는다. 낮에 꾸는 꿈이란 별건가.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시계처럼 산다면 제법 정확하고 신용 있는 사람 티가 나지만 시계가 별건가. 시계도 결국은 기계의 일종이거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

낮에 이렇게 기계처럼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밤엔 자연히 죽은 것처럼 숙면을 하게 되어 거의 꿈을 안 꾼다. 꿈을 안 꾸는 것인지 못 꾸는 건지, 꾼 꿈을 되살려 기억할 시간을 안 갖기 때문에 일껏 꾼 길몽 영몽靈夢을 아깝게도 망각의 구렁텅이에 처넣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는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한가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 밖에 나갈 땐 정성껏 화장을 하고 흰 머리카락이 비죽대지 않나 살펴 머리를 빗고, 어떤 옷이 가장 잘 어울리나, 이 옷 저 옷 입었다 벗었다 하고 싶다.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서.

나는 음식을 가린다든가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든가 하는 까다로운 성질이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데는 적합한 체질이나 어디 가서 친구나 친척 집에 묵는 일은 적극 피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누가 나한테 너무 잘해주려고 하면 나는 그게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걸 어쩌랴.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나에게 부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마음이 시리고 헛헛할 때,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에 내가 불쌍해 보일 때, 수녀원의 언덕방이나 그 뒷산의 바다가 보이는 의자 생각만 해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 이 일만 끝마치면 거기 가서 쉬리라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내키지 않던 일에 새로운 신명이 나기도 한다.

나는 그때 나만 당하는 고통이 억울해서도 미칠 것 같았지만 남들이 나를 동정하고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위해만 주는 게 내가 마치 고약한 부스럼딱지라도 된 것처럼 비참했다. 그렇다고 안 위해주고 평상시처럼 대해주었더라도 야속했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내 불행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적절할 뿐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식사는 정결하고 맛있었지만 검소하고 평등했고, 아무도 나를 위해 전복죽이나 잣죽을 쑤어다가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고 적절했고 오직 수녀님들의 화평한 미소만이 도처에 넉넉했다. 수녀님들의 미소는 내가 있는 걸 다들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착각까지 들 지경이어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불편한 마음이 들 새가 없었다. 결국 나는 언덕방 손님 노릇을 통해 세 살짜리 같은 응석받이로부터 홀로서기에 성공을 할 수가 있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자연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고 잘 가꾼 것 같으면서 자연 그대로인 뒷산에 안겨 새소리를 듣고, 다람쥐와 숨바꼭질하고,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보는 기쁨과 평화는 주님, 당신은 참 좋으십니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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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앗딥이 맨 처음 받은 훈련이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빨리 배울 수 있었다고 알아두면 될 것이다.

무앗딥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자신이 배울 수 있다는 기본적인 신념이었다. 자신이 배울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그리고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앗딥은 모든 경험에 교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이룰란 공주의 『무앗딥의 인간성』

마치 누군가가 그를 유혹하려고 이 방을 설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행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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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2-07-2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듄을 읽고 계신가보네요.SF걸작중의 하나이지만 워낙 장편이라 국내에서는 그닥 인기가 없었는데 아마 영화화 되면서 다시 재간되었나 보군요^^

라로 2022-07-30 16:29   좋아요 0 | URL
네 카스피님. 영화를 재밌게 봤어요. 그리고 제 남편이 이 책을 아주 좋아해서 읽어야지 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