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흘려 놓은 것 중 좀 중요하다 싶은 건 깊이 챙겨두긴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 뒀는지 깜깜이 되고 만다. 이젠 아이들이 뭘 찾다가도 엄마가 잘 뒀다는 말만 하면 좋아하기는커녕 숫제 찾던 손을 멈추고 미리 절망적인 얼굴을 한다. 아이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막막해지면서 자신이 싫어진다. 왜 잘 챙겼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면서 정작 그게 어디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지 내 일이건만 참으로 딱하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땅은 얼마나 위대한가? 일용할 양식과 함께, 그 아름다운 조락調落을 만들어낸 땅에 겸허하게 엎드려 경배드리고 싶은 충동과 아울러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요새 나의 감동은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과 상통하고 있다. 하다못해 깔끔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나서도 문득 슬퍼진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만 65세만 넘으면 노인증이나 주민등록증만 보이면 공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을 버는 노인이니까 돈 내고 표 사서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 따위 잘난 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현금으로 걸 수 있는 데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가 돈을 남겨 놓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나오는 데가 없나 잔뜩 눈독을 들이고 기다렸다. 그날따라 아무도 거스름돈을 남겨 놓지 않았다. 길에 나가면 가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돈 남은 공중전화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자 남은 희망은 단 하나,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계단 밑에 턱 쳐들고 서서 누가 나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박완서 씨 아니세요? 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렇다고 하고 나서 500원만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아무도 나한테 아는 척을 안 했다. 혼잡한 통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모두 귀찮다는 듯 밀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거기서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더 막막한 무서움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 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잘 못한다고 하면 조금은 하는 것 같지만, 음정을 못 맞춘다는 자의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학교 다닐 때 음악 시험 때 말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 할 자유가 없냐?" 하고 외치고 말았다. 너무 진지하게 외쳤던지 나름대로 흥청거리던 분위기가 일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치가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7, 80년대를 끽소리 한마디 못 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런 자기혐오는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는 열등감으로 이어져 온종일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게,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단박 밝아졌다. 노래도 못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 수녀님은 아직 서원(그리스도교적인 완전 덕을 쌓으며 살겠다고 스스로 하느님께 약속하는 것 - 편집자 주)도 받기 전인 예비 수녀님이었다. 그러나 학덕 높은 현자보다도,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일컬어지는 성직자보다도 더 깊은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그건 깊다기보다는 아마 적절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지요.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른 새벽 잠 달아난 늙은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줍니다.
불평은커녕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차별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더 했습니다. 시골 동무들 중에는 ‘간난이’ ‘섭섭이’ 등 어린 마음에도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지은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애도 많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에 비해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고 태어난 것처럼 느꼈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지만 나는 결코 불쌍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존중할 수 있는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일러바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차츰 고자질하는 버릇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한테 귀가 따갑게 들은,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과 똑같은 잔소리를 내 아이들에게 하게 되었고, 내 성질까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견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소박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은 더 큰 행복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하려고 태어났지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각자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제각각 다릅니다.
최고의 부자, 최고의 권력자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마도 학문이나 예술일 겁니다. 그러나 미美나 진리의 추구처럼 천부의 재능 없이는 끝이 안 보이는 분야가 없고, 설사 재능이 있다고 하여도 좌절과 절망을 일용할 양식 삼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도전하기 힘든 분야가 그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전문 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
열등감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이 처음에 우월감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으스대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 입장을 참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습니다. 나이 먹어 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의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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