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논리란 대개는 은유의 논리이므로.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은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습관에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의 일면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속에 있는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할 뿐이다.

큰 틀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은유 또한 자연스레 번역에서 얻게 된다.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번역이라는 기적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과 똑같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다른 시간대의 다른 장소에서 그 기호들에 부딪혀 반사된 빛은, 자연이 수십억 년에 걸친 무작위적 변이 끝에 빚어낸 초정밀 광학 기관 한 쌍으로 들어간다. 거꾸로 뒤집힌 영상이 광감지 세포 수백만 개로 이루어진 막 한 쌍에 맺히고, 이 막을 통해 전기적 파장으로 번역된 빛은 시각 신경을 거슬러 올라가 시각 교차를 지나 시각로를 따라 시각 겉질로 들어가며, 이곳에서 파장은 다시 조립되어 글자, 구두점, 단어, 문장, 보조관념, 원관념, 사유가 된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우리는 단지 인드라의 그물을 이루는 그물코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이니까요.

카탈로그에는 엄마가 열여덟 살이고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또 홍콩 출신이라서 영어를 잘한다고 나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다.

"답장은 회사 사람들이 써 준 거였어. 엄마는 ‘헬로’, ‘굿 바이’ 말고는 영어를 하나도 못했단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내가 세상일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경멸의 맛은 달콤했다. 와인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아프기만 한 어른이 되기 싫어서 - 난치병을 딛고 톨킨의 번역가가 된 박현묵 이야기
강인식 지음 / 원더박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은이의 욕심이 느껴지면서 반복되는 묘사가 거슬리고 글의 방향이 잘 잡히지 않아 좀 산만하지만, 유전병이나 장애를 떠나서 삶을 성실하게, 자신 있게, 확고하고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박현묵 군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낸 박현묵 군과 그 부모님께 기립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학자의 논문은 진실에 대한 전달로 그만이지만, 기자이자 문필가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신랄한 현실과 함께 그 속에 담긴 희망과 감동을 전하고 있어 일면 부러웠다.

神은 공평하다"는 믿음은 늘 도전받는다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존재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가혹한 시련을 겪고, 조력자를 만나 성장하며, 소명을 깨닫고 도전해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낸다. 그 과정은 언제나 설레고 감동적인데, 아마 우리가 그런 삶을 소망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생 후 지속된 반복적인 과다 출혈로 관절이 굳어 10년 이상 휠체어에 의존해 정상적인 보행과 움직임이 불가능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탁월한 지적 능력과 성실함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 중에도 틈틈이 학업에 몰두해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이제 서울대학교 입학전형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극한의 시련을 삶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하며 살아온 그의 경험이 체계적인 교육을 발판으로 향후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많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희망과 기회로 반영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박 군의 입학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통증은 다른 감각과 달리 익숙해지지 않는다. 면역되는 통증이란 없다. 한번 찾아온 통증은 잦아들지 않고 결국엔 몸을 망가뜨리고 영혼까지 태워 버린다.

사람의 몸속에서는 수많은 작은 출혈이 발생하고 곧 지혈되곤 한다. 그런데 중증 A형 혈우병 환자는 피가 응고하도록 만드는 정상 인자(8인자)가 유전적으로 없거나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혈우병 환자들은 대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상 인자를 보충하는 강력한 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아버지와 함께 서울대 면접장으로 향했다. 무심한 듯 보이는 아버지와 가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 몰랐다. 걱정도 즐거움도 많은 수다쟁이 엄마는 이날 아침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는 돼야 이용할 수 있는, 현묵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었다.

기초적인 영단어에도 파고들면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나아가 다른 영단어들의 기원에도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Thursday가 ‘토르의 날’이라는 뜻의 고대 영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나, Villain이 ‘농노’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의 Village와 같은 조상을 가진 단어라는 점 등이었습니다.

오늘날 쓰이는 영어의 원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경험을 통해 단순히 영어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영어의 역사와 다른 언어와의 연결 고리 등 더 깊은 언어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영어를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메노르는 2시대 인간들이 살던 축복받은 땅이며 아라고른은 그 혈통을 간직한 인물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배경은 3시대다 ― 를 해외 사이트를 통해 직접 구입해 읽고, 읽은 다음에는 아마추어 번역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톨킨의 글을 읽는 것은 이전까지 보아 온 영문 텍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톨킨의 글은 문장의 어순을 유연하게 뒤바꾸기도 하고, 문장 중간에 다른 구를 삽입하면서 문장의 호흡을 조정하는 동시에 풍성한 맥락을 제공하며, 수식어 뒤에 또 수식어가 붙기도 했습니다.

고풍스러운 어투를 사용하고, 자연이나 풍경을 묘사할 때는 비슷한 대상도 다양한 어휘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협곡 지형을 가지고도 valley, dale, ravine, gorge, vale 등의 다양한 어휘가 쓰이곤 했습니다. 마치 영어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어로 된 문학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어만의 맛이 있듯이, 영어에도 영어만의 맛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원문을 볼 때는 자연스럽게 의미가 이해되던 문장인데 번역하고 나니 이해하기 어려워지거나, 원문에서는 문학성이 느껴지던 문장이 막상 번역하면 딱딱하게 바뀌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한국어 표현력과 어휘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습니다.

소설이나 글을 볼 때도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서 어휘, 문체, 표현을 습득하고자 하고, 평소에 말을 할 때도 좋은 표현이 생각날 때마다 이를 의식적으로 기억해 두었다가 활용했습니다.

풍경을 묘사할 때 쓰인 다채로운 어휘를 표현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서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어휘를 메모해 두곤 했습니다. 가령 강을 표현할 때만 해도 시내, 물줄기, 강물, 개울 등으로 어휘의 폭을 넓혔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도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나 단어가 있을 때는 직접 영국 현지의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 문의하는 방법으로 의문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원문에서 오류를 찾아낸 적도 있습니다. 작중 지형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제가 책을 보면서 기억한 지도대로라면 분명 eastwards가 되어야 하는데 westwards로 적힌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오류가 맞는지 출판사에 직접 문의했더니 출판사에서도 지적에 감사드린다는 답변을 해 왔습니다. 이후 최신 판본을 읽어 봤더니 문의했던 부분이 eastwards로 고쳐져 있었습니다.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서적을 바로잡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에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계속되는 출혈 탓에 장래에 학업이나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 적어 이후의 학업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가족과 몇몇 주변인 외에는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제 가족과 주변인들은 저를 장애를 이유로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엄연한 인격체로 대해 주셨습니다. 주변의 긍정적인 배려와 도움 덕분에, 비록 학창시절에 마땅히 해야 할 경험을 쌓지는 못했지만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장애는 남았지만 이제 주위의 도움으로부터 독립해 어엿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제게 대학은 사회의 첫걸음을 뗄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아 온 세월이 길다 보니 스스로 베풀고 돕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능동적인 부분이 많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라는 세상에 진출해 그동안 부족했던 사회 경험을 쌓고, 여러 가지를 배우며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나누는 사람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중, 고등학교는커녕 그 흔한 학원도 다니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8년을 자기 방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네트워크로 무한하게 펼쳐진 링크를 거쳐, 원정대처럼 지식을 향해 뻗어 나갔다.

톨킨은 영국에서 셰익스피어만큼 존경받는 문호다.

《가디언》은 톨킨에 대해 "반세기 남짓한 작업 기간에, 어떻게 한 인간이 민족 하나가 일구어 낼 만한 창작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더 심오한 뜻이 이 오류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심연에서 올라오는 통증보다 이런 생각이 더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참혹한 육체를 가졌던 10대의 현묵이 올린 번역은 그 누구의 것보다 집요하고 장대하며 일관됐다.

7월 하퍼콜린스 담당자들과 메일을 주고받은 것도 더 완벽한 번역을 위해서였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톨킨이 남긴 원고 일부를 아들 크리스토퍼ChristopherTolkien가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1980년에 영국에서 처음 출간됐다. 그런데 여기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에서 다 설명하지 않았던 다양한 배경들이 담겨 있다. 어떤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며 가장 기초적인 가상의 언어를 구축하고 그 위에 가운데땅의 역사를 쌓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바로 가운데땅 역사의 일부분이다.

톨킨의 책은 톨킨 자신이 출간한 것보다 아들이 낸 것이 더 많다.

좋아하고 그의 저작물을 사랑하는 사람 ― 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10대의 어린 현묵은 그런 마음으로 수년간 번역을 지속했다.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시작된 난치병 10대 소년의 작업은 이렇게 공식 번역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마추어로 시작한 번역은 결국 프로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입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어떤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본인의 힘만으로 원서의 오류를 고쳐 낸 난치병 소년의 놀라운 성취였다.

아들 크리스토퍼가 1980년 출간한 후 40년간 ‘서북쪽’으로 표기됐던 그 부분이 현묵이 지적한 대로 고쳐져 배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묵은 이에 대해 겸손하게 말했다. "누구도 눈치채기 힘든 아주 사소한 부분을 수정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사실은 아주 많은 것을 웅변하고 있다. 10대 소년이 어떻게 지식을 쌓아 하나의 체계를 이뤄 냈는지, 지식의 디테일이 얼마나 풍부한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으며, 변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모든 것이 압축된 일화였다.

이토록 완벽한 자립성과 놀라운 자기주도성을 갖춘 이야기를 학교 활동으로 제시한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현묵은 입시를 위해 이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공부의 본질’에 충실하게 그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학교의 이름을 가리자 입학을 위해 최고의 시스템을 갖춘 학교에 다니는 입시 수재들이 강세를 보인 거죠. 그전까진 입학사정관들이 일반고 출신들에게 정성적인 평가를 더해 줬다면 블라인드로 그런 고려가 불필요해진 겁니다. 블라인드로 인해 경쟁주의가 더 강하게 작동하게 된 것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체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동경하고, 희생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찬란한 업적과 전례 없는 파괴를 불러올 엄청난 능력이었다.

Albert Camus는 "모든 것은 의식意識에서 시작되고, 모든 가치는 의식을 거쳐 탄생한다."고 했다.

가끔 은퇴를 코앞에 둔 과학자가 뒤늦게 인간의 의식을 연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주로 ‘객관적 현실’을 파고들었고, 의식은 과학의 탐구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일 수도 있지만, 사고는 완강한 회의론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미국의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는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지만,2 당신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나’라는 존재가 더욱 확고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아직도 의식의 경험을 과학적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감각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에 의식이 개입되는 과정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양자물리학은 기본 입자의 거동과 생명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생화학적 과정을 설명해 준다.

첫째, 뉴턴이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영역을 탐구할 때에는 양자물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둘째, 뉴턴이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큰 영역을 탐구할 때에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도입해야 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근본적 성질을 비롯하여 생명체의 출현에 반드시 필요한 별과 행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 준다.

세 번째는 가장 난해한 영역으로, 뉴턴이 고려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려면 여러 개의 입자들이 한데 모여서 생명과 마음을 창출하게 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의 거동을 완전히 이해하면, 현실 세계에 대한 엄밀하고 독립적인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이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동일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언젠가는 몇 개의 기호로 이루어진 수학방정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참으로 우아한 우주가 아닌가!

우리는 이야기의 증인이며, 시간과 정성을 충분히 들이면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이야기에는 비밀이 없고, 모호한 구석도 없다.

의식의 수준에서 우주를 이해하려면 완전히 개인적이면서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1) 물질은 의식을 창출할 수 있는가?(2) 자율적인 의식은 두뇌와 몸을 구성하는 물질에 물리 법칙이 적용된 결과에 불과한가? 물질과 마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굳게 믿었던 데카르트는 두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no’라고 대답했다.

우주에는 물질이 있고, 마음을 가진 생명체도 존재한다. 물질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은 물질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다른 존재다. 현대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원자와 분자

나는 지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의식도 결국은 물질 입자와 이들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될 것 같다.

다양한 혁명적 발상이 출현하여 물리 법칙의 우선순위가 결정될 것이며, 바깥 세계의 객관적 현실과 내면 세계의 주관적 경험을 아주 깊은 단계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뇌는 시각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단어와 문장을 분석하느라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당신은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대화와 보행, 심장박동, 혈액순환, 소화, 근육의 움직임 등도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진행된다.

성 오거스틴Saint Augustine(마음은 자신을 담을 정도로 충분히 크지 않다. 그런데 담기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어디에 있는가?5)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마음은 본질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6)

윌리엄 셰익스피어(너의 가슴으로 가서 문을 세 번 두드리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라7)

(음악이란 계산이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은밀한 연산과정이다8)

흥미로운 것은 의식의 감지 범위를 벗어난 것 같으면서도, 무의식의 메아리가 의식에 감지된다는 것이다.

건강한 두뇌도 숨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험자가 어떤 영상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영상을 40밀리초(10만분의 4초) 미만의 짧은 시간 동안 보여 주면(정지 화면이나 동영상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는 식이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잠재의식 영상은 의식이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코카콜라사의 시장조사 연구팀이 영화필름 사이에 광고 화면을 끼워 넣어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12

당신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영상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 정보가 두뇌에 영향을 주어 반응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실험의 결론은 당신의 두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력을 조율하고, 데이터를 추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뇌는 신경 섬유를 통해 접수된 신호를 빠르게 송수신하고, 생물학적 과정을 제어함으로써 적절한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라면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시간만 충분히 투자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이 하는 일을 넘어서 마음이 느끼는 감각(자신이 인간임을 느끼는 내면의 경험)을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과학으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들이 말하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다.

1671년의 어느 날, 뉴턴은 현대과학이 태동하던 그 시기에 가장 많은 과학 기사를 썼던 헨리 올덴버그Henry Oldenburg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빛의 절대적 특성을 정의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색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확실한 것과 추론을 섞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노란색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노란색 물체를 보았을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노란색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노란색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과 나, 그리고 뉴턴은 그렇게 할 수 있다. 특정 색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뉴턴의 고민거리였다.

색에 대한 느낌은 노란색이나 푸른색, 또는 초록색의 정신적 ‘환상phantasm’을 훨씬 넘어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의식의 일부로 여겨지는 다양한 내적 감각(생각, 감정, 기억, 표상, 욕망, 소리, 냄새 등)을 관장한다는 점이다.

입자의 거동을 서술하는 수학 체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초대형 입자 가속기와 초고성능 천체 망원경을 통해 사실로 판명되었는데, 어디를 들여다봐도 입자의 내면 세계를 서술하는 부분은 없다.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입자의 무리가 어떻게 색감과 음감을 느끼고, 사랑과 증오를 느끼고,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는 말인가? 입자는 질량과 전기전하를 비롯한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지만(전기전하와 비슷하면서 근본적으로 다른 핵전하nuclear charge라는 것도 있다), 이런 양은 주관적 경험과 완전히 무관하다.

박쥐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과 나의 육체는 상호 작용 하는 입자의 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식을 가진 존재는 3인칭의 객관적 서술만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챌머스David Chalmers(1966~ )는 1994년에 투손Tucson*에서 개최된 의식학회에 어깨까지 닿는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연단으로 올라와 생명체의 내면 세계를 ‘어려운 문제’라고 정의했다.

챌머스는 ‘마음이 없는 입자와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환원주의적 관점(입자와 물리 법칙)을 밀어붙인다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두뇌에서 진행되는 물리적 과정이 곧 의식이라는 나의 오래된 믿음은 뿌리째 흔들렸고, 물리적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두뇌의 물리적 기능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닛은 "메리가 빛의 물리학에서 눈의 생화학적 작동 원리와 두뇌의 신경과학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빨간색을 본 적이 없어도 색으로부터 창출되는 내면의 감각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학습에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빨간색에 대한 느낌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빨간색을 직접 보면서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색과 관련된 지식을 얻는 방법이 직접 경험하는 것뿐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잭슨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은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메리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배웠을 뿐, 그녀의 완벽한 지식은 빨간색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알아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과거의 잭슨과 그의 추종자들이 옳은가? 아니면 관점을 바꾼 잭슨을 비롯하여 "메리는 장미꽃을 생전 처음 보아도 새로 배우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은가?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 상반된 관점이 대두될 때마다 검증 가능한 결과를 비교하면서 직관이라는 험난한 바다를 헤쳐 왔다. 그러나 메리의 이야기에 관한 한, 확실한 결론을 내릴 만한 실험 결과(또는 데이터나 계산 결과)는 단 한 건도 보고된 적이 없으며, 내면 세계의 원천을 설명하는 정확한 이론도 없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직관적으로 그럴듯하면서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는 유연한 가설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의식이 물질에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통해 서술되는 것이라면 그 중간 과정만 알아내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대과학의 범주 바깥에 있는 낯선 개념을 도입하여 기초부터 꿰어 맞춰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물학자 조지 월드(George Wald)는 눈의 시각 색소에 관한 독특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한 적이 있다.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오직 한 줄기 빛만을 볼 수 있다. 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결국 이 창을 통해 전 우주를 다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몸의 에너지 생성 메커니즘은 건강뿐 아니라 생명 유지에도 바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기관이나 기능보다 중요하다. 세포 속에서 에너지 생성이 순조롭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몸은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에너지 생성 작업은 특정 기관이 아닌 몸의 모든 세포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활활 타는 불꽃처럼 살아 있는 세포는 생명을 지탱하는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연료를 태운다. 이 과정에서 세포는 체온 정도의 은근한 열을 방출한다. 따라서 ‘태운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기보다 시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수십억 개의 은근한 작은 불이 깜박거리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만일 이 불이 계속 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화학자 유진 라비노비치(Eugene Rabinowitch)는 이렇게 말한다. "심장은 박동을 멈추고, 중력을 거슬러 위를 향해 자라던 식물은 성장을 멈추게 된다. 아메바는 헤엄을 치지 못하고, 신경을 타고 감각이 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며, 인간의 뇌 속에서 사고가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세포 속에서 물질을 에너지로 변형시키는 과정은 물 흐르듯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자연계의 재생 사이클의 한 부분으로서 마치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바퀴와 비슷하다. 탄수화물 연료는 한 알 한 알, 한 분자 한 분자씩 포도당 형태로 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계속되는 순환 과정을 거치며 연료 분자는 화학적 분해 작용으로 미세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세포라는 화학공장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생명체가 지닌 경이 중 하나이다. 모든 기관이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

미토콘드리아가 지닌 미스터리를 풀어낸 과학자들의 놀라운 재능과 인내에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현미경으로 300배나 확대해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미립자를 상상해보자. 그런 다음 이 미립자를 분해해서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그것이 가진 아주 복잡한 기능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상상해보자. 전자현미경과 생화학자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ATP는 축전지가 충전된 상태이고 ADP는 그 축전지가 방전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페놀계 화학물질은 물질대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급격한 체온 변화를 일으키고 결국 치명적 위험을 불러온다. 인산기 결합 과정이 실패로 돌아갔는데 ‘엔진은 계속 돌아가서 과열되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산화 과정에 관여하는 효소 활동을 억제하는 살충제에는 DDT, 메톡시클로르, 말라티온, 페노티아진 그리고 그 밖에 다양한 다이나이트로 화합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에너지 생성의 전 과정을 차단하고 세포가 사용할 산소를 빼앗아간다.

인구동태통계국의 음울한 예측에 따르면 앞으로 어린이들에게서 나타날 결함과 기형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우리의 외적·내적 세계에 깊숙이 침투한 화학물질 때문임이 거의 확실하다.

세포분열을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대상인 개구리 알과 성게를 연구해보면 ATP 보유량이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질 경우 알들이 세포분열을 중단하고 즉시 죽는다고 한다.

모든 생물체의 배아세포에 축적된 살충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개개인의 생명보다 궁극적으로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유전형질이다. 영겁처럼 긴 시간 동안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우리의 유전자는 현재의 모습을 규정할 뿐 아니라 인간의 미래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유전자는 희망찬 약속이 될 수도 있고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유전자의 변이는 이 시대에 대한 협박, ‘우리 문명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위협’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방사능이나 화학물질의 영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는 원자의 분열이나 방사능을 내뿜는 화학물질에 관한 연구가 충분치 않던 때였다. 그러다가 1927년 텍사스 대학교 동물학 교수인 허먼 J. 멀러(Herman J. Muller) 박사가 유기체에 X선을 투사하면 다음 세대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멀러 박사의 발견으로 과학의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었고 관련 의학 분야가 등장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0년대 초 에든버러 대학교의 샤를로테 아우어바흐(Charlotte Auerbach)와 윌리엄 롭슨(William Robson)도 이에 필적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머스터드 가스가 방사능과 마찬가지로 영구적인 염색체 이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멀러 박사가 X선의 영향을 연구할 때 사용했던 초파리에 머스터드 가스를 쏘였더니 역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이는 최초로 발견된 돌연변이 유발 요인이었다.

우리 몸이 계속 성장하고 생명의 흐름이 다음 세대로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조직과 기관을 구성하는 세포 수가 점차 증식되어야 한다.

유사분열을 방해하는 것은 유기체와 그 자손에게 심상치 않는 위협이 된다.

"유사분열을 비롯해 세포기관의 중요한 작용들은 과거 5억 년 이상, 적어도 수십억 년 유지되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상처 받기 쉽고 복잡한 생명계가 오랜 시간 동안 종의 영속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태산 같은 인내력 덕분이었다. 이런 내구성과 항구성이 가능한 것은 몇 세대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정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치료법의 위력이 점점 강해지고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화학물질이 제조되면서, 돌연변이 유발체를 억제해주던 우리 몸의 정상적인 보호 작용에 점점 더 큰 구멍이 뚫리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1956년이 되어서야 인간 세포의 염색체 수가 46개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염색체의 존재 확인은 물론 염색체의 각 부분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환경 요인으로 말미암은 유전자 손상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개념인데, 유전학자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그나마 유전학자들의 주장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방사능의 위험은 이제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도 상당 분야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멀러 박사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대표자들뿐 아니라 의료 분야 종사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런 유전법칙의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일반 대중은 물론 의료계 종사자나 과학자들조차 화학물질이 방사능과 유사한 구실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화학물질의 대량 사용에 대해서(실험실 내 사용뿐 아니라) 별다른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화학물질은 방사능만큼이나 심각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문제성 있는 화학물질에 노출될 경우 우리의 유전자가 어떤 돌연변이를 일으킬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질소 머스터드 가스는 그저 공중에서 무차별 살포되는 것이 아니라 암 치료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와 의사들의 손에서만 사용되었다.(이 치료를 받은 환자가 염색체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하지만 살충제와 제초제는 수많은 사람과 매일 접촉하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DDT에 노출된 모기들은 암컷과 수컷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자웅동체로 바뀌게 된다.

결국 염색체 문제는 배아세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생활하는 동안 일부 특정한 세포(이 경우, 혈액세포의 전구세포)가 손상을 입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염색체의 부분 손실로 세포의 정상 행동을 지시하는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 병이 생긴 것이다.

우리 스스로 염색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화학물질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싹이 안 나는 감자나 모기가 없는 안뜰을 위해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학물질 제조업자들은 법률에 따라 제조물의 독성 여부를 검사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화학물질이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런 검사를 요구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응하지 않을 것이다.

생물들이 암과 벌인 싸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서 그 기원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암과 벌인 전쟁이 태양, 폭풍, 토양 등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유독 혼자만 암 유발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인간이 만들어낸 발암물질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방향족 탄화수소류의 일종인 매연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서서히 진보해온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놀라운 물질들은 인체의 방어벽을 쉽게 뚫을 수 있었다.

암의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발암물질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도 역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59년 7월 미국의 인구동태통계국에 따르면, 1900년 전체 사망 원인의 4퍼센트에 불과하던 림프계와 혈액 생성 조직에서 발생하는 악성질환이 1958년에는 15퍼센트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런 추세로 볼 때, 미국암학회는 인구 중 4500만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두세 가구당 한 명 꼴로 암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1∼14세 어린이 사망자 중 12퍼센트가 암으로 밝혀졌다. 악성종양 환자의 상당수가 5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는데, 더욱 슬픈 사실은 방금 태어났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서도 암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음식물에) 화학물질을 첨가하다 보면 어린이의 암 발생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이후 어떤 문제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각다귀와 진드기를 없애는 데 쓰이는 새로운 유기 살충제들에도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관련 안전 수칙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지만, 변하는 상황을 적절히 규제할 법률 제정이 느릿느릿 진행되는 몇 년 동안 사람들은 발암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야 했다.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는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안전하다"고 이야기되는 물질이 내일은 극도로 유해한 물질로 판명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암의 발생 형태가 다 다르고 암세포의 성장과 퇴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제각각인 걸 보면 그 원인 역시 틀림없이 다양할 것이다. 모든 문제는 세포가 입은 사소한 피해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진행되는 연구 중 어떤 것은 암 연구를 겨냥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연관될 수도 있는데, 이런 작은 빛이 모여서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이 될 것이다.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와 염색체를 살핌으로써 이런 미스터리들을 이해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소우주 속에서 정상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갑자기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게 되는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발효로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양이 호흡으로 만들어지는 에너지와 같아지는 순간에 도달한다. 바로 이 시점에 정상 체세포에서 암세포가 만들어진다는 의견이다.

대부분의 암에는 긴 잠복기가 뒤따른다. 호흡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수많은 세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발효를 통해 세포분열을 하고 이 분열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발효가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종에 따라 다르다. 각 종마다 발효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발효시간이 짧은 쥐는 암도 빨리 발발하고, 사람은 그 시간이 긴 편이어서(몇 십 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암의 발생이 비교적 서서히 이루어진다.

미량의 발암물질을 반복 흡수하는 것이 다량을 한 번 흡수하는 것보다 왜 더 위험한지를 설명해준다. 다량의 발암물질을 한 번 흡수하면 세포가 바로 죽지만 소량을 반복적으로 흡수하면 세포들이 상해를 입은 채로 살아남게 된다. 이렇게 살아남은 세포가 암세포로 전이되는 것이다. 발암물질에 ‘안전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암을 치료하는 물질이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전이되는 또 다른 방식은 염색체 이상이다. 이 분야의 매우 유능한 연구자들은 염색체에 손상을 입히고 세포분열을 방해하며 돌연변이를 초래하는 인자들을 의심의 눈으로 조사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돌연변이는 암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어린아이의 조직은 악성세포가 자라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3∼4세에서 가장 발병률이 높다는 사실은 태어날 때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신체기관이 돌연변이적 자극에 노출되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암을 유발하는 다른 돌연변이 물질은 우레탄이다. 임신한 쥐에게 이 물질을 주입하면 어미 쥐뿐 아니라 새끼 쥐에도 암이 생긴다. 새끼 쥐는 태어난 후에는 우레탄에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화학물질이 태반을 통해 새끼에게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레탄이나 그 밖에 관련 화학물질에 노출되면 태아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휴퍼 박사는 경고한다.

성호르몬의 균형 파괴로 발생하는 생식기암이 대표적이다. 이런 장애는 간이 호르몬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간에 작용해 간접적 발암물질을 만들어내는 염화탄화수소계 화학물질이 바로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

간은 남성과 여성 호르몬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고(이 두 가지 모두 남성과 여성의 몸속에서 동시에 만들어지는데 그 양이 다를 뿐이다) 지나친 생성을 억제한다. 하지만 질병이나 화학약품으로 인해 간이 손상되거나 비타민 B복합체가 부족하면 이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에스트로겐의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