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행간에서 실감이 뚝뚝 묻어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이혼은 나쁘다는 훈계를 하려고 아이를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정적으로 이혼이라는 어른들 문제의 책임을 왜 아이에게 떠넘기는가?

아이들은 문제를 자기 탓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우나? 같은.

앞서 예술은 주관적 진실이라 말한 바 있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하지 않을 뿐, 사실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이 힘을 얻는다.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사실’을 확보한 인물들은 뜬금없이 착하지도, 뜬금없이 천박하지도 않다. ‘진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단순한 얼개에 세부가 풍성하다.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얼개는 단순하고, 세부가 풍성하다.

작가는 드러난 것을 스케치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면에 숨은 진실을 캐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 신상부터 탈탈 탈탈 탈탈탈탈 탈탈…….

기승전결.
그렇게 도식적으로 쓰고 싶진 않다는 사람도 봤는데, 아니, 일단 도

식적으로 쓰자. 적어도 도식을 제대로 익히자. 도식이 왜 나쁜가? 기승전결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계의 비술이다. 가장 기초적이며 가장 확고한 스텝이다.

『축구 생각』의 축구 소년 안대용은 축구 금지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욕망과 걸림돌의 충돌, 갈등이다. 이야기는 대용이 ‘축구를 하려는 시도’라는 플롯에 따라 전개된다.

1) 축구파 애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기?실패
2) 방과 후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기?실패
3) 학원까지 끝나고 달밤에 축구하기?실패
4) 성적을 올려서 축구 허락받기?성공

대용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가 애들이랑 같이 논다. 애초에 축구 소년이지 않은가. 고뇌보다는 몸싸움이 적성에 맞다. 축구가 아니라도 친구들과 노는 건 뭐든 재밌다. 그게 대용의 선택이요 본심이요 성격이요, 작품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바다.

사는 게 그렇지 않은가. 중요한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바라는 대로, 뜻한 바대로,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어째서인지 급한 날은 신호등이 내 앞에서 바뀌고, 발 아픈 신발을 신은 날은 지하철에 빈자리가 없다. 어째서 내가 지각을 한 날은 교문에 무서운 선생님이 있고, 내가 교과서를 안 가져온 날은 기습적인 검사가 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기대한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꿈꾸던 만큼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심지어 키도 크지 않았다. 순정만화처럼 낭만적인 연애를 해 보지도, 완벽한 결혼을 하지도 못했다. 꿈꾸던 만큼 부유해지지도, 성공하지도 않았다. 아니, 꿈 따위가 다 뭔가. 생각도 못한 온갖 실수와 실패와 상처와 좌절, 심지어 배신과 배반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급기야 노안을 비롯한 노인성 질환의 방문을 받고 있다. 똑똑, 이제 중년이신데 어디 보자……. 여덟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떨까? 어린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안길 수 있다. 혹은 어린 나의 충격적인 언사에 지금의 내가 총 맞은 것처럼 가슴앓이할 수도 있겠다(타임머신 결사반대).

당장 오늘의 나만 놓고 생각해 봐도 그렇다. 글은 뜻대로 안 풀리고, 책은 마음만큼 안 팔리고, 자식은 기대대로 안 커 주고, 통장은 가볍고 사랑은 멀고 우정은 복잡하다. 내일이 된다고 딱히 나아질 건 없다. 하루만큼 나이를 더 먹고, 그만큼 노안이 심해지고 주름살은 늘어나고 죽음에 가까워질 뿐.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태 그렇게 당하고도, 내일은 조금 나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없지 않다. 정말 괜찮다.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자식을 믿고, 사랑을 한다. 연휴 동안 뱃살이 늘었지만 깻잎전은 최고였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눈앞이 깜깜하고 사방이 절벽인 때도 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는, 우리는.

인간의 지성과 연대와 의지. 그것으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모순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예스 위 캔.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지금의 우리는 하늘의 도움도 초인적인 힘도 믿지 않는다. 세계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도 잃었거나 잃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저마다 해답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아니 나에겐……. 종교일 수도 가족일 수도 돈일 수도 힘일 수도 친구일 수도 사랑일 수도, 그래, 취미 생활일 수도. 뭐가 됐든 지금의 우리는, 나는, 스스로 그 답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라고.
어린이라고 다르지 않다.

동화라고 현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이 독자이기에 더더욱 정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작가라면. 독자에게 정직하지 않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잘 쓸 수는 없다.

작품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그것이 우정이나 야구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헛된 위로 따위 하지 않는다. 매기는 깊은 좌절과 슬픔을 맛보았다. 선량한 짐은 끝내 상처를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서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틀림없이 눈은 다시 좋아질 거야……."

동화가, 지금의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해 줄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다 이겨 내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란 없는 법이고, 나는 나다운 이야기를 나의 내포독자에게 전한다. 우리의 이야기가 얼마나 널리 공감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조상의 뜻에 달린 것.

어째서인지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쓰겠다는 사람은 늘어 가는 것 같다.

지금 한창 책을 내고 있는 작가, 이미 고전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쓴 작가, 고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작가, 어느덧 전설이 된 작가도 있다. 국내 작가는 물론, 외국 작가의 작품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문학은 절대 평가의 영역이지만, 책은 상대 평가의 영역에 속한다.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책으로서 평가받고 선택받는 게 아니다. 대형 서점에 꽂힌 책들을 떠올려 보라. 표지가 보이게 누운 책 말고, 벽면 책장을 따라 나란히 꽂혀 있는 수천, 수만, 수십만 권의 책들.
세상의 모든 책은 그중 하나다. 저 혼자 외따로이 존재하는 책은 없다.

손톱에서 피를 내는 자해는 혼자서, 골방에서, 남몰래. 그리고 문학은 우아하게.

일단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나의 진심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건 그냥 대형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많은 책, 책이 되고 싶은 무수한 이야기가 있음을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저만의 빛으로 반짝이는 책이 있다. 많은 책들과 나란히 꽂혀 있어도 어느새 눈길을 끄는 책, 저만의 의미로 빛나는 책.

『패티의 초록 책』은 그런 빤한 인식에 놀라움을 준다. 이렇게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리고 연령대가 낮은 독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SF가 있구나! 이야기 자체도 훌륭하다. 게다가 SF동화들 속에 섞어 놓고 보면 더더욱 빛난다. 자신만의 빛으로.

책을 내는 일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며, 이는 인과에 따르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확신하는 건,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게 『로봇의 별』을 기존의 SF동화와 다르게 만들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라고 모두 환상은 아니거니와, 환상이라는 단순한 개념은 전략이라 하기 어렵다.

요즘 들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써 놓고 환상동화라 우기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부디 훌륭한 환상동화집으로 눈을 한껏 높이고 기발한 창작의 전략으로 근사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길 바란다.

창작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써서 책상 서랍에 넣어 둘 게 아니라면.

‘도토리’라는 새로운 인물상은 기존의 동화 속 장애아동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멀리서 자신의 책이 꽂힐 책장을 살펴보고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아갈 바를 정한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더 잘 쓰겠다가 아니라 다르게 쓰겠다는 고민이다.

안타깝게도 『초정리 편지』를 습자지로 베낀 듯한 역사동화가 많다. 그래 놓고 어찌하여 시대는 나를 몰라주느냐고 피 토하듯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시대가 그대를 몰라주는 게 아니라, 그대가 시대를 몰라주는 것이니…….

확실한 것은 한윤섭 작가는 창작에 앞서 상당한 동화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동화를 쓰기 위해 3천 권의 동화를 읽었댔나, 읽으려고 했댔나……. 아무튼 그만큼 많은 동화를 읽고 고민한 속에서 『봉주르, 뚜르』라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봉주르, 뚜르』 한 권을 달랑 읽고서, 나도 외국 배경으로 써야지! 허둥지둥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다. 『봉주르, 뚜르』처럼 외국을 배경으로 하되, 지극히 한국 대단지 아파트 같은 재미없고 의미 없는 동화를. 그런 걸 전문 용어로? 정답! 짝퉁이다.

피부를 까맣게 태운다고 이효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앞가르마를 탄다고 이정재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설사 그 친구 말대로 내가 잘 쓴들, 누구누구 같다는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다음으로 쓴 작품이 「우리들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이번에는 친구가 누구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녀서는 결코 독창적인 작품을 쓸 수 없다. 다른 작품에 대해 모르는 채 자기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작품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런저런 곳에서 동화 창작 강의를 하며 습작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껏 나보다 동화를 많이 읽은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 어떤 책도 읽으면 도움이 된다. 좋은 작품은 문학에 대한 좋은 상을 그리게 해 준다. 나쁜 작품의 가르침은 그보다 구체적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마냥 들뜨는 대신 이미 998권쯤 비슷한 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둘도 없이 특별한 사연이라 생각하는 그 경험담과 닮은 이야기가 이미 9,998번쯤 되풀이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너무나 새롭다고 자부하는 그 이야기는 지난달에 출간되어 한창 호평을 받는 바로 그 책과 닮았다는 걸 알게 되고, 너무나 감동적이라고 믿고 있는 그 이야기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기성작가의 망한 졸작과 똑같다는 걸 알게 된다.

강의를 듣는 것도 좋고, 습작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독서다. 사실 이걸 따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글을 쓰겠다고, 그것도 자신이 쓴 글을 책으로 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평소에 독서 말고 뭘 할까? 책 말고 달리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어떤 때는 내가 책을 사는 걸 좋아하는지,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억이 허락하는 가장 오래된 날로부터 지금껏 내게는 책이 가장 좋고 귀하고 재미있고 각별하다. 책을 읽는 일 또한 그러하다.

그중 단 한 권의 책, 더 이상 꽂을 자리가 없을 만큼 빽빽한 책 동네에서 기어이 틈새를 벌려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책을 쓰리라.
그만한 야심과 포부로 책장을 살펴보기 바란다. 희망적인 소식은, 아직 빈자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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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예 살인(honorkilling)’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여성이 간통이나 연애에 연루되어 가족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남자 친족은 여성을 살해하여 ‘피해자’로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한다. 대개 성문법상 불법이나 관습적으론 합법이며 전통으로 여겨진다.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편안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내겐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목격하는 폭력은 주로 안방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마주한 폭력의 현실을 ‘비서구’ 사회 야만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건 새로운 식민주의다.

전쟁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몸은 취약하다. 으스러진 다리, 죽을 때까지 쏟아지는 피, 밤새워 지르는 비명, 벌어진 살 사이로 빠져나오는 내장…… 우리는 말할 수 없음은 곧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음은, 실제로는 불쾌해서 설명하기 싫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느 누가, ‘평화 시’에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 흘리고 싶어 하겠는가.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녀는, 부모를 죽인 이라크군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출산한다. 이들에게 ‘모성’이나 ‘어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너무나 끔찍해서 언어의 대상으로 삼기는커녕 무의식에서조차 떠올리기 힘겨운 전시 강간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전쟁 후에도 성폭력은 계속된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성폭력의 고통을 인간 삶의 일부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공간의 명칭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궁(子宮)’은 아들이 사는 곳을, 영어의 버자이너(vagina, 질)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무는 ‘칼집’을 의미한다. 질의 한자[膣] 역시 방(室)이라는 글자를 포함한다. 남성 문화는 ‘자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 집단에 속한 여성의 몸을 침범(강간, 납치)함으로써 남성성을 경쟁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폭력을 인간에 대한 고통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남성 공동체의 명예 훼손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강간당한 여성은 자신이 속한 남성 공동체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 왔다.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무대를 견뎌야 한다. 견디지 못하는 순간 무대가 배우를 삼켜버린다." 인생과 예술에 대해 이만 한 비유가 없다.

배우란 그 누구보다 깊숙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을 계속 생각하게 돼요."

어떤 예술은 젊은 날에만 가능한가 싶어 약간 우울했다.

감독이 ‘생활의 유혹’을 느끼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생계와 육아, 가사를 모두 책임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피델 카스트로보다 체 게바라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스무 번의 혁명보다 한 번의 발전이 더 힘들다."고 고백한 카스트로에게서 훨씬 더 치열한 혁명 정신을 발견한다.

정치적으로 금기인 소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의 필연적 갈등인 감독의 윤리적, 정치적인 딜레마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선전하고 대변해야 한다는 자기 억압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남성의 시각이 깊게 침윤된 전시 성폭력 이슈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할 때는,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뼈를 깎는 훈련과 새로운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 영화의 걸출함은 수천 년간 진행되고 있는 남성 사회의 인식론에 상당 부분 ‘편승’한 것이고, 그 물적 토대는 타자화된 여성 집단의 외로움, 노동,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송환〉을 여성사로 읽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남성은 ‘송강호’였고, 남한 남성은 ‘이병헌’이었다. 이전까지 남북 관계를 다룬 영화에서 ‘외모’는 곧 체제를 뜻했다. 배우의 외모와 캐릭터가 정치학이었다.

이 영화는 진짜 구한말 이야기이다. <YMCA 야구단>은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중에서 으뜸으로 칠 만한 작품이다.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역사와 야구의 결합이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야구에 역사를 담았고 역사는 야구를 안고 간다. 야구와 역사는 서로를 설명한다. 둘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초월하거나 포괄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 야구단은 같은 선수끼리도 반상의 구별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경기 도중에도 "도련님", "이놈아" 라고 부르면서 싸운다. 이에 반해 일본 선수들은 근대성을 ‘체화’해 모두가 평등한 선수(대중, 국민)라는 정체성으로 뭉쳐 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우리 스스로 탈식민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시선과 평가의 강박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다. 언어는 인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의 총체적 체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회는 외부의 이익에 휘둘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의 것이 된다.

후원한다. 이유는 여자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은 부자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해석 투쟁에서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주요 모순이다.

물론 ‘영웅은 호색’이지만, 그건 들키지 않을 때 얘기다. 가족주의 규범이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최소 100여 명의 여자들이 항상 대통령을 위해 대기했다는 봉건 왕조식 역사는 국민들이 역겨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여러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만, 권력이 없는 남자는 한 명도 차지하지 못해 한 여자를 여러 남자와 공유한다. 반대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남자와만 섹스하거나 무성애자고, ‘밑바닥 인생’일수록 여러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악당을 죽인’ 김재규는 다시 부하에게 잡혀 심문받는다. 의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상관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개 남자들의 허풍, 거들먹거림, 유치하고 과장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다급한 행동일 뿐이다.

남성성은 힘들게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잃을 수 있다. 남성다움을 과시할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남자들의 동성애 혐오는 남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이며, 여성 혐오는 여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다.

날 때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남성들은 신의 이름을 수시로 바꾼다. ‘조국과 민족’ ‘노동 해방’ ‘소중한 가족’…… 남자의 이익을 대신해서 우리가 신물 나게 들어 온 신의 이름들이다. 모두 보편, 진리, 우주, 객관성으로 포장되어 있다.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해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다.

여자는 남자인 ‘나’를 통해 신과 연결된다.("하나님이 남자는 직접 만드셨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역사다.

남성은 평생 동안 여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여성을 성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절대 여성에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진짜 인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여전한 ‘지금 이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녀’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우리는 인간 신체의 어떤 ‘부위’를 보고 성별을 판단해야 할까? 영화에서 그(녀)는,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야."라고 울부짖는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대로 "여성이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5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보부아르의 이 유명한 테제는 이후 많은 도전을 받았다. 즉, 인간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며 남성, 여성 외에 다른 성이 실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성별조차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는 것이다.

내 악마만이 진정한 악마일 뿐 남의 악마에 대한 칭찬과 부러움은 끝이 없었다. 그렇다. 어느 조직이나 지도자를 지배자로 착각하는 사람, 권한과 역할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최소한 이 영화의 악마는 지도력 없는 지도자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유능한 데다 품성도 훌륭한 리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리더는 그냥 유능한 사람이면 족하다.

이제까지 리더십은 철저히 성별화(gendered)된 가치였다.

남이 내게 했던 대로 상대방에게 고통과 원한을 되돌려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만, 면밀한 계획과 성실성이 요구되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남을 짓밟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친구는 나의 이런 "무능과 자포자기 정신이야말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저 위로였을 것이다.

"나는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은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라고 한 맬컴 엑스와 "내가 주장하는 것은 폭력의 효율성이 아니라 폭력을 통한 식민지 민중인 ‘나’의 등장이다."라고 외친 프란츠 파농과 연대한다. 나는 이 영화의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평화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평화를 비둘기에 비유하는 것이다.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타율보다는 적시타가 중요하고 홈런왕보다는 출루율이 높은 선수가 소중하다는 것은 안다. 인생처럼 야구 경기에서도 맥락, 흐름이 결정적이다. 의미 없는 안타는 소용이 없다. 출루율. 일단 1루에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웃 카운트를 늘리지 않는 선수는 1루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포볼!

나는 ‘선구안(選球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또 좋아하는데, 내게 다가오는 ‘공’뿐만 아니라 책, 사람, 상황에 대한 안목이 인생을 좌우한다.

<머니볼>은 깨끗한 영화다. 루저를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고 성공보다는 성공의 법칙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지배적 논리에 익숙해서 그 논리가 계속 틀리더라도 흔들리지 않지만,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비판하고 조롱한다.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시행착오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의 실수를 자신이 옳다는 증거로 삼는다.

인간의 몸은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수들의 몸은 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유동적이다. 몸은 우주의 기운과 습관(기록)과 운명의 복잡한 교차로다. 이 영화는 확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통계는 그 결과이고 예측의 근거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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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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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혼자 본 영화에 대해 쓴 글인데도 자기 색이 분명하고 확고한 글이라 영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자주 whiplash 당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내가 본 영화와 겹치는 영화가 별로 없는 경우라 그런지 더욱. 하지만 내가 본 영화에 대한 글은 공감도 되고 개인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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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 치매에 걸린 치매 전문의의 마지막 조언
하세가와 가즈오.이노쿠마 리쓰코 지음, 김윤경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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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책을 읽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내용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하세가와 의사가 개척할 당시와 달리 지금의 치매 부분은 많이 발전해 있기 때문에 시대에 약간 뒤떨어진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누군가 치매 환자가 있거나 노년 대비용으로 읽는 것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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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불성실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응? 어째서?"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저 살아서 먹고 자손을 남기고 나이 들어 죽는 것뿐이라면 동물과 다를 게 없지. 인간은 동물과 달라야 해. 왜 살아 있는 걸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너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잖아" 하고 말하지 뭡니까?

‘한 알의 밀’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의사로 일하는 내내 제 마음속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치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신이 제게 마련해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심장질환으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될까 봐 언제나 걱정을 했거든요. 저 역시도 죽음은 무서우니까요.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새벽이 오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피부 세포는 몇 주 사이에 새롭게 바뀌지만 뇌의 신경세포는 바뀌지 않고 평생 계속된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그 인지기능을 사용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90년 동안 사용하고 있는 거지요. 생각해 보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릅니다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밝힌 크리스틴 브라이든 씨는 치매란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시작하는 겁니다. 조금만이라도 좋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단 한 번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고 싶습니다.

"주님의 가호 아래 그 이름을 찬미하고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 그 자체가 사실은 신에게 받은 특별하고도 열정이 가득한 보물입니다. 그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평화로운 일상에 감사합시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연속되어 있으며, 어제에서 오늘로 자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들어준다는 건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 주는 일이지요" 하고 하세가와 선생님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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