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예 살인(honorkilling)’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여성이 간통이나 연애에 연루되어 가족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남자 친족은 여성을 살해하여 ‘피해자’로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한다. 대개 성문법상 불법이나 관습적으론 합법이며 전통으로 여겨진다.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편안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내겐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목격하는 폭력은 주로 안방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마주한 폭력의 현실을 ‘비서구’ 사회 야만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건 새로운 식민주의다.

전쟁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몸은 취약하다. 으스러진 다리, 죽을 때까지 쏟아지는 피, 밤새워 지르는 비명, 벌어진 살 사이로 빠져나오는 내장…… 우리는 말할 수 없음은 곧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음은, 실제로는 불쾌해서 설명하기 싫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느 누가, ‘평화 시’에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 흘리고 싶어 하겠는가.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녀는, 부모를 죽인 이라크군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출산한다. 이들에게 ‘모성’이나 ‘어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너무나 끔찍해서 언어의 대상으로 삼기는커녕 무의식에서조차 떠올리기 힘겨운 전시 강간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전쟁 후에도 성폭력은 계속된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성폭력의 고통을 인간 삶의 일부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공간의 명칭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궁(子宮)’은 아들이 사는 곳을, 영어의 버자이너(vagina, 질)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칼이 머무는 ‘칼집’을 의미한다. 질의 한자[膣] 역시 방(室)이라는 글자를 포함한다. 남성 문화는 ‘자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 집단에 속한 여성의 몸을 침범(강간, 납치)함으로써 남성성을 경쟁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폭력을 인간에 대한 고통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남성 공동체의 명예 훼손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강간당한 여성은 자신이 속한 남성 공동체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 왔다.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무대를 견뎌야 한다. 견디지 못하는 순간 무대가 배우를 삼켜버린다." 인생과 예술에 대해 이만 한 비유가 없다.

배우란 그 누구보다 깊숙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을 계속 생각하게 돼요."

어떤 예술은 젊은 날에만 가능한가 싶어 약간 우울했다.

감독이 ‘생활의 유혹’을 느끼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생계와 육아, 가사를 모두 책임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피델 카스트로보다 체 게바라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스무 번의 혁명보다 한 번의 발전이 더 힘들다."고 고백한 카스트로에게서 훨씬 더 치열한 혁명 정신을 발견한다.

정치적으로 금기인 소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의 필연적 갈등인 감독의 윤리적, 정치적인 딜레마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선전하고 대변해야 한다는 자기 억압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남성의 시각이 깊게 침윤된 전시 성폭력 이슈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할 때는,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뼈를 깎는 훈련과 새로운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 영화의 걸출함은 수천 년간 진행되고 있는 남성 사회의 인식론에 상당 부분 ‘편승’한 것이고, 그 물적 토대는 타자화된 여성 집단의 외로움, 노동,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송환〉을 여성사로 읽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남성은 ‘송강호’였고, 남한 남성은 ‘이병헌’이었다. 이전까지 남북 관계를 다룬 영화에서 ‘외모’는 곧 체제를 뜻했다. 배우의 외모와 캐릭터가 정치학이었다.

이 영화는 진짜 구한말 이야기이다. <YMCA 야구단>은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중에서 으뜸으로 칠 만한 작품이다.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역사와 야구의 결합이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야구에 역사를 담았고 역사는 야구를 안고 간다. 야구와 역사는 서로를 설명한다. 둘 중 하나가 다른 것을 초월하거나 포괄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 야구단은 같은 선수끼리도 반상의 구별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경기 도중에도 "도련님", "이놈아" 라고 부르면서 싸운다. 이에 반해 일본 선수들은 근대성을 ‘체화’해 모두가 평등한 선수(대중, 국민)라는 정체성으로 뭉쳐 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우리 스스로 탈식민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시선과 평가의 강박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다. 언어는 인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의 총체적 체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회는 외부의 이익에 휘둘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의 것이 된다.

후원한다. 이유는 여자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은 부자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해석 투쟁에서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주요 모순이다.

물론 ‘영웅은 호색’이지만, 그건 들키지 않을 때 얘기다. 가족주의 규범이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최소 100여 명의 여자들이 항상 대통령을 위해 대기했다는 봉건 왕조식 역사는 국민들이 역겨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여러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만, 권력이 없는 남자는 한 명도 차지하지 못해 한 여자를 여러 남자와 공유한다. 반대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한 남자와만 섹스하거나 무성애자고, ‘밑바닥 인생’일수록 여러 남자를 상대하게 된다.

‘악당을 죽인’ 김재규는 다시 부하에게 잡혀 심문받는다. 의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상관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개 남자들의 허풍, 거들먹거림, 유치하고 과장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다급한 행동일 뿐이다.

남성성은 힘들게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잃을 수 있다. 남성다움을 과시할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남자들의 동성애 혐오는 남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이며, 여성 혐오는 여성 안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다.

날 때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남성들은 신의 이름을 수시로 바꾼다. ‘조국과 민족’ ‘노동 해방’ ‘소중한 가족’…… 남자의 이익을 대신해서 우리가 신물 나게 들어 온 신의 이름들이다. 모두 보편, 진리, 우주, 객관성으로 포장되어 있다.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해하는 남자들은 자신이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다.

여자는 남자인 ‘나’를 통해 신과 연결된다.("하나님이 남자는 직접 만드셨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역사다.

남성은 평생 동안 여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여성을 성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절대 여성에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진짜 인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여전한 ‘지금 이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그녀’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우리는 인간 신체의 어떤 ‘부위’를 보고 성별을 판단해야 할까? 영화에서 그(녀)는,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야."라고 울부짖는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대로 "여성이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5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보부아르의 이 유명한 테제는 이후 많은 도전을 받았다. 즉, 인간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며 남성, 여성 외에 다른 성이 실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성별조차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는 것이다.

내 악마만이 진정한 악마일 뿐 남의 악마에 대한 칭찬과 부러움은 끝이 없었다. 그렇다. 어느 조직이나 지도자를 지배자로 착각하는 사람, 권한과 역할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최소한 이 영화의 악마는 지도력 없는 지도자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유능한 데다 품성도 훌륭한 리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리더는 그냥 유능한 사람이면 족하다.

이제까지 리더십은 철저히 성별화(gendered)된 가치였다.

남이 내게 했던 대로 상대방에게 고통과 원한을 되돌려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지만, 면밀한 계획과 성실성이 요구되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남을 짓밟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친구는 나의 이런 "무능과 자포자기 정신이야말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저 위로였을 것이다.

"나는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은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라고 한 맬컴 엑스와 "내가 주장하는 것은 폭력의 효율성이 아니라 폭력을 통한 식민지 민중인 ‘나’의 등장이다."라고 외친 프란츠 파농과 연대한다. 나는 이 영화의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평화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평화를 비둘기에 비유하는 것이다.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타율보다는 적시타가 중요하고 홈런왕보다는 출루율이 높은 선수가 소중하다는 것은 안다. 인생처럼 야구 경기에서도 맥락, 흐름이 결정적이다. 의미 없는 안타는 소용이 없다. 출루율. 일단 1루에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웃 카운트를 늘리지 않는 선수는 1루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포볼!

나는 ‘선구안(選球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또 좋아하는데, 내게 다가오는 ‘공’뿐만 아니라 책, 사람, 상황에 대한 안목이 인생을 좌우한다.

<머니볼>은 깨끗한 영화다. 루저를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고 성공보다는 성공의 법칙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지배적 논리에 익숙해서 그 논리가 계속 틀리더라도 흔들리지 않지만,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비판하고 조롱한다.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시행착오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의 실수를 자신이 옳다는 증거로 삼는다.

인간의 몸은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수들의 몸은 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유동적이다. 몸은 우주의 기운과 습관(기록)과 운명의 복잡한 교차로다. 이 영화는 확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통계는 그 결과이고 예측의 근거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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