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행간에서 실감이 뚝뚝 묻어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이혼은 나쁘다는 훈계를 하려고 아이를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정적으로 이혼이라는 어른들 문제의 책임을 왜 아이에게 떠넘기는가?

아이들은 문제를 자기 탓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우나? 같은.

앞서 예술은 주관적 진실이라 말한 바 있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하지 않을 뿐, 사실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이 힘을 얻는다.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사실’을 확보한 인물들은 뜬금없이 착하지도, 뜬금없이 천박하지도 않다. ‘진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단순한 얼개에 세부가 풍성하다.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얼개는 단순하고, 세부가 풍성하다.

작가는 드러난 것을 스케치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면에 숨은 진실을 캐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 신상부터 탈탈 탈탈 탈탈탈탈 탈탈…….

기승전결.
그렇게 도식적으로 쓰고 싶진 않다는 사람도 봤는데, 아니, 일단 도

식적으로 쓰자. 적어도 도식을 제대로 익히자. 도식이 왜 나쁜가? 기승전결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계의 비술이다. 가장 기초적이며 가장 확고한 스텝이다.

『축구 생각』의 축구 소년 안대용은 축구 금지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욕망과 걸림돌의 충돌, 갈등이다. 이야기는 대용이 ‘축구를 하려는 시도’라는 플롯에 따라 전개된다.

1) 축구파 애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기?실패
2) 방과 후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기?실패
3) 학원까지 끝나고 달밤에 축구하기?실패
4) 성적을 올려서 축구 허락받기?성공

대용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가 애들이랑 같이 논다. 애초에 축구 소년이지 않은가. 고뇌보다는 몸싸움이 적성에 맞다. 축구가 아니라도 친구들과 노는 건 뭐든 재밌다. 그게 대용의 선택이요 본심이요 성격이요, 작품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바다.

사는 게 그렇지 않은가. 중요한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바라는 대로, 뜻한 바대로,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어째서인지 급한 날은 신호등이 내 앞에서 바뀌고, 발 아픈 신발을 신은 날은 지하철에 빈자리가 없다. 어째서 내가 지각을 한 날은 교문에 무서운 선생님이 있고, 내가 교과서를 안 가져온 날은 기습적인 검사가 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기대한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꿈꾸던 만큼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심지어 키도 크지 않았다. 순정만화처럼 낭만적인 연애를 해 보지도, 완벽한 결혼을 하지도 못했다. 꿈꾸던 만큼 부유해지지도, 성공하지도 않았다. 아니, 꿈 따위가 다 뭔가. 생각도 못한 온갖 실수와 실패와 상처와 좌절, 심지어 배신과 배반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급기야 노안을 비롯한 노인성 질환의 방문을 받고 있다. 똑똑, 이제 중년이신데 어디 보자……. 여덟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떨까? 어린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안길 수 있다. 혹은 어린 나의 충격적인 언사에 지금의 내가 총 맞은 것처럼 가슴앓이할 수도 있겠다(타임머신 결사반대).

당장 오늘의 나만 놓고 생각해 봐도 그렇다. 글은 뜻대로 안 풀리고, 책은 마음만큼 안 팔리고, 자식은 기대대로 안 커 주고, 통장은 가볍고 사랑은 멀고 우정은 복잡하다. 내일이 된다고 딱히 나아질 건 없다. 하루만큼 나이를 더 먹고, 그만큼 노안이 심해지고 주름살은 늘어나고 죽음에 가까워질 뿐.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태 그렇게 당하고도, 내일은 조금 나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없지 않다. 정말 괜찮다.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자식을 믿고, 사랑을 한다. 연휴 동안 뱃살이 늘었지만 깻잎전은 최고였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눈앞이 깜깜하고 사방이 절벽인 때도 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는, 우리는.

인간의 지성과 연대와 의지. 그것으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모순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예스 위 캔.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지금의 우리는 하늘의 도움도 초인적인 힘도 믿지 않는다. 세계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도 잃었거나 잃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저마다 해답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아니 나에겐……. 종교일 수도 가족일 수도 돈일 수도 힘일 수도 친구일 수도 사랑일 수도, 그래, 취미 생활일 수도. 뭐가 됐든 지금의 우리는, 나는, 스스로 그 답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라고.
어린이라고 다르지 않다.

동화라고 현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이 독자이기에 더더욱 정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작가라면. 독자에게 정직하지 않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잘 쓸 수는 없다.

작품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그것이 우정이나 야구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헛된 위로 따위 하지 않는다. 매기는 깊은 좌절과 슬픔을 맛보았다. 선량한 짐은 끝내 상처를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서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틀림없이 눈은 다시 좋아질 거야……."

동화가, 지금의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해 줄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울지 마라.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거란다. 그것을 잘 알았으니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다 이겨 내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란 없는 법이고, 나는 나다운 이야기를 나의 내포독자에게 전한다. 우리의 이야기가 얼마나 널리 공감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조상의 뜻에 달린 것.

어째서인지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쓰겠다는 사람은 늘어 가는 것 같다.

지금 한창 책을 내고 있는 작가, 이미 고전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쓴 작가, 고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작가, 어느덧 전설이 된 작가도 있다. 국내 작가는 물론, 외국 작가의 작품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문학은 절대 평가의 영역이지만, 책은 상대 평가의 영역에 속한다.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책으로서 평가받고 선택받는 게 아니다. 대형 서점에 꽂힌 책들을 떠올려 보라. 표지가 보이게 누운 책 말고, 벽면 책장을 따라 나란히 꽂혀 있는 수천, 수만, 수십만 권의 책들.
세상의 모든 책은 그중 하나다. 저 혼자 외따로이 존재하는 책은 없다.

손톱에서 피를 내는 자해는 혼자서, 골방에서, 남몰래. 그리고 문학은 우아하게.

일단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나의 진심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건 그냥 대형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많은 책, 책이 되고 싶은 무수한 이야기가 있음을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저만의 빛으로 반짝이는 책이 있다. 많은 책들과 나란히 꽂혀 있어도 어느새 눈길을 끄는 책, 저만의 의미로 빛나는 책.

『패티의 초록 책』은 그런 빤한 인식에 놀라움을 준다. 이렇게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리고 연령대가 낮은 독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SF가 있구나! 이야기 자체도 훌륭하다. 게다가 SF동화들 속에 섞어 놓고 보면 더더욱 빛난다. 자신만의 빛으로.

책을 내는 일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며, 이는 인과에 따르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확신하는 건,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게 『로봇의 별』을 기존의 SF동화와 다르게 만들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라고 모두 환상은 아니거니와, 환상이라는 단순한 개념은 전략이라 하기 어렵다.

요즘 들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써 놓고 환상동화라 우기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부디 훌륭한 환상동화집으로 눈을 한껏 높이고 기발한 창작의 전략으로 근사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길 바란다.

창작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써서 책상 서랍에 넣어 둘 게 아니라면.

‘도토리’라는 새로운 인물상은 기존의 동화 속 장애아동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멀리서 자신의 책이 꽂힐 책장을 살펴보고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아갈 바를 정한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더 잘 쓰겠다가 아니라 다르게 쓰겠다는 고민이다.

안타깝게도 『초정리 편지』를 습자지로 베낀 듯한 역사동화가 많다. 그래 놓고 어찌하여 시대는 나를 몰라주느냐고 피 토하듯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시대가 그대를 몰라주는 게 아니라, 그대가 시대를 몰라주는 것이니…….

확실한 것은 한윤섭 작가는 창작에 앞서 상당한 동화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동화를 쓰기 위해 3천 권의 동화를 읽었댔나, 읽으려고 했댔나……. 아무튼 그만큼 많은 동화를 읽고 고민한 속에서 『봉주르, 뚜르』라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봉주르, 뚜르』 한 권을 달랑 읽고서, 나도 외국 배경으로 써야지! 허둥지둥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다. 『봉주르, 뚜르』처럼 외국을 배경으로 하되, 지극히 한국 대단지 아파트 같은 재미없고 의미 없는 동화를. 그런 걸 전문 용어로? 정답! 짝퉁이다.

피부를 까맣게 태운다고 이효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앞가르마를 탄다고 이정재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설사 그 친구 말대로 내가 잘 쓴들, 누구누구 같다는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다음으로 쓴 작품이 「우리들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이번에는 친구가 누구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작품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녀서는 결코 독창적인 작품을 쓸 수 없다. 다른 작품에 대해 모르는 채 자기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작품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런저런 곳에서 동화 창작 강의를 하며 습작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껏 나보다 동화를 많이 읽은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 어떤 책도 읽으면 도움이 된다. 좋은 작품은 문학에 대한 좋은 상을 그리게 해 준다. 나쁜 작품의 가르침은 그보다 구체적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마냥 들뜨는 대신 이미 998권쯤 비슷한 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둘도 없이 특별한 사연이라 생각하는 그 경험담과 닮은 이야기가 이미 9,998번쯤 되풀이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너무나 새롭다고 자부하는 그 이야기는 지난달에 출간되어 한창 호평을 받는 바로 그 책과 닮았다는 걸 알게 되고, 너무나 감동적이라고 믿고 있는 그 이야기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기성작가의 망한 졸작과 똑같다는 걸 알게 된다.

강의를 듣는 것도 좋고, 습작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독서다. 사실 이걸 따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글을 쓰겠다고, 그것도 자신이 쓴 글을 책으로 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평소에 독서 말고 뭘 할까? 책 말고 달리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어떤 때는 내가 책을 사는 걸 좋아하는지,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억이 허락하는 가장 오래된 날로부터 지금껏 내게는 책이 가장 좋고 귀하고 재미있고 각별하다. 책을 읽는 일 또한 그러하다.

그중 단 한 권의 책, 더 이상 꽂을 자리가 없을 만큼 빽빽한 책 동네에서 기어이 틈새를 벌려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책을 쓰리라.
그만한 야심과 포부로 책장을 살펴보기 바란다. 희망적인 소식은, 아직 빈자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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