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유리공을 가만히 손에 쥐어본다. 따뜻함이 느껴질 때까지 쥐고 있는다. 그녀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힘을 다해 걸었다. 꽃을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의 마음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히? 히? 공부해야지······."
그런 일도 있었다. 작은 방 한 칸의 뮌헨 숙소, 욕실로부터 책상까지의 서너 걸음을 딛는 동안 저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한심하던지. 손에 든 책을 놓지 못해서 화장실을 못 가고 있다가 읽을 책이 몇 장 안 남자 문득,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그제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잽싸게 화장실을 다녀오던 참이었다.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이던가.
그런 천치 같은, 쉰여덟 아낙이 읽고 있던 작은 책은 푸코의 《담론의 질서》였다.

글의 힘, 아직도 때로는 세상을 움직이기도 하는 글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는 지난 몇 년간 골똘히 생각해온 주제이다. 어떻게 그런 글들은 쓰여지는 걸까.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이제쯤은 가끔 그런 글을 스스로 쓸 수도 있어야 하건만, 이제야 가까스로 그런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읽기는 쓰기와 맞닿아 있는 것이어서, 편중된 읽기는 수상쩍다.

천성이 수줍어 글쓰기라는 표현예술에 매진할 용기가 없었다.

읽어야 할 책, 공들여 가르쳐야 할 보석 같은 제 학생들을 제쳐두고 남의 가게 기웃거리며 나다닐 염치도 없었다.

무엇을 얻을 생각이 무의식에조차 없는 채로, 써야 할 글을 쓰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허영심 없는 예술은, 적어도 내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삶과의 괴리만 적나라하다.

예컨대 경제관념이 없다. 또한 돈을 쓸 기회도, 가끔 학교식당에서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더 벌어들일 시간이야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살아졌다. 그것도 남 보기에 썩 잘 살아졌다. 내 아이들은 저렇게 계산이 안 되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계산 없이 쏟아넣는 일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다. 저만큼 일을 하는 데는 무슨 무서운 속셈이 숨어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유추의 자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때마다 궁극적으로는 부족한 나를 돌아보고, 경계를 제대로 긋고, 내 일에 전념하는 기회가 되어 오히려 감사하기는 했지만, 참 아팠다.

간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돌아보면 글을 배워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 같다. 글을 만나고, 글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또 같은 글을 읽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도 되고······. 얼마나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는지, 그 사람들의 마음속이야말로 내 삶의 천상적 지분인 것 같다.

돌아보니 천치가, 세상에서 한 가지는 야무지게 해낸 일이 있다. 좋은 도서관들에 내 자리를 만든 일이다. 뮌헨에도, 베를린에도, 바이마르에도, 케임브리지에도, 잠시 들른 더블린에까지도 ‘G’자 어름의 서가 근처 창가 ? 근년에 Goethe(괴테) 연구에 몰두한 탓이다

예술과 학문을 지닌 자
종교도 가진 것이다.
그 둘을 소유하지 못한 자
종교를 가져라.

종교를 내려깎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한껏 높이는 말이다. 노년의 지혜가 배인 대시인의 과감한 단언을 내가 흉내 낼 수야 없지만, 그래도 예술 혹은 학문이 내게 무엇이겠는가를 이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정리될 것 같다.

학문 -- 이 천치의 종교. 이제, 그 밖의 모든 것을 거의 다 버린 이제야, 읽기와 쓰기가 내게서 시작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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