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서에서 여자가 일하는 걸 찬성할 수 없어. 꼭 너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난 싫어."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존재 자체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본색과 10대 특유의 고집이 드러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그런 식으로 내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곤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나도 소방서에서 일하는 바보들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바보들은 뽑지 말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죠 뭐! 물론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소방서의 남자 동료들은 화재 현장에서 나와 말을 섞지 않고, 내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즐겼다.

그들은 나를 이름이 아니라 ‘스플릿 아스split arse’?(여성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옮긴이)라고 불렀다. 당시 내 나이 열여덟이었고, 그들 중에는 나만 한 딸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태도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동료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그보다도 더 원하는 것은 소방관이 되는 것이었다.

대원 간의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감을 강조하고 부르짖는 평소의 태도를 생각하면 나를 그렇게 따돌리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의 행동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소방관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인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내가 더 잘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아무도 다시는 나처럼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괴롭힘은 별명을 부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소방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초기에 다른 대원들이 내 장비를 고장낸 적도 있었고, 근무지를 옮기는 동료의 사물함에 장난으로 냄새나는 썩은 생선을 넣어놓고 내가 한 일이라고 떠넘긴 적도 있었다. 성희롱을 당한 횟수는 세기도 힘들 만큼 많다. 원치 않는 남성 성기 사진들을 받고, 내가 남자가 아니니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당시 나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문제 삼지 않았다. 어리고, 자신이 없었던 데다, 힘의 균형이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문제삼으면 내 평판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그냥 참았다. 지금은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데 대해 크게 후회하고 있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많이 노력해왔다. 이제는 그런 문제가 있으면 바로 지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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