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은 자신이 원한 같은 걸 품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떤 이들이 ‘나 아직 밥 안 먹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름다움이란 내면에서 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
"네."
"음, 너의 내면은 못생긴 외면과 일치한다는 뜻이란다."
캘빈은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부어오른 손을 꽉 쥐었다. 주교는 말했다.

어린아이가 독학으로 배운 것은 타고난 권리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화학이 복잡하다는 점, 때로는 비정하리만큼 뒤틀리고 꼬였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캘빈은 이 새로운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화학이라는 그 학문 자체에서 그가 숨기지도 키우지도 못한 원한이 피어났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아가야만 했다.

펜팔 친구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둘은 아주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고백이란 게 그렇듯 속내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에게 말하는 게 더 편하다고 둘 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혼자만의 비밀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당연하다.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다. 그녀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게 바로 사랑의 정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해서 정말로 내 모습을 바꾸고 싶은 마음.

엘리자베스는 누구보다도 캘빈의 연구를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그 어떤 친족보다도 그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녀에겐 유품에 대한 권리가 없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과학자 중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긴 하다. 과학을 믿기는 믿는데, 그게 자신에게도 적용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들 말이다.

연구란 건 다 이런 것이다. 돈을 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문제다.

자신의 실패를 떠올리는 게 중요하단 말을 누군가가 했던 기억이 났지만, 여섯시-삼십분은 동의할 수 없었다. 실패란 천성적으로 잊을 수 없는 법이니까.

"그대가 살아갈 날은 많이 남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마음의 창을 열어 햇빛을 받도록 하라"

누군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와, 네 인생이 곧 바뀔 것이며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살아가게 되리라는 말을 무슨 임무처럼 전달하곤 했다. 그녀는 앞으로 직업도 없어지고, 연구도 못 하게 되며, 방광 기능 조절도 안 되고, 발톱도 제대로 안 보이고, 잠도 푹 못 잘 것이며, 피부는 푸석푸석해지고, 허리가 아플 것은 물론이고 임신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는 온갖 자잘한 자유를, 이를테면 어떤 어려움도 없이 운전대 앞에 앉는 자유 같은 걸 전부 잃어버릴 거라고들 말해댔다.

파마머리 여자는 끔찍한 두 살이니 지긋지긋한 세 살이니 악마 같은 네 살이니 무시무시한 다섯 살이니 하는 소리를 극적인 묘사와 함께 늘어놓더니, 숨도 돌리지 않고 세상 예민한 아동기와 여드름을 덕지덕지 단 사춘기에 이어 사람 새끼가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도록 말 안 듣는 중고등학생을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부터 이런 걸 생각해놓으면 좋을 것 같아. 중요한 점을 기억해두면, 때가 왔을 때도 침착할 수 있으니까.

"잘했어요, 조트 양. 마취도 안 하고 끝까지 분만을 했군요. 그간 로잉 머신을 해온 게 도움이 될 거라고 내가 말했죠? 아이 폐가 아주 튼튼해요."

어떤 집은 아이 이름을 같은 머리글자로 짓는다. 예를 들어 애거사와 알프레드, 이런 식으로. 어떤 집은 각운을 맞추어 몰리와 폴리, 이런 식으로 짓는다. 여섯시-삼십분의 집은 시간에 맞추어 짓는다.

셋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묘한 기쁨이 사방에 가득 감돌았다. 캘빈이 죽은 뒤 처음으로, 다시금 그들은 전환점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자, 계획한 것 이상으로 자신을 많이 드러낸 기분이 들었다.

특히 묻지도 않았는데 해주는 충고가 제일 싫어요.

"자신이 최우선이 되는 시간을 가지는 거죠. 오롯이 나만의 시간요. 아기도, 일도, 죽은 에번스 씨도, 더러운 집도 다 제쳐두고요. 딱 나를 위한, 엘리자베스 조트를 위한 시간을 가져봐요. 뭘 필요로 하든, 뭘 원하든, 뭘 찾든 그 시간 동안 자신의 욕구를 충실하게 추구해봐요."

"그런 다음에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해리엇 슬로운은 살면서 예뻤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해리엇이 보기에 캘빈과 에번스는 이상한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슬로운 씨가 해리엇이 어떤지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점을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앞으로도 평생 그가 해리엇을 눈여겨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무지하고 편협하고 천박하고 둔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다. 멍청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슬로운 씨는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지 깨달을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그가 역겨운 점은 또 있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남자들이 흔히 그러듯, 슬로운 씨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통하는 매력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멍청한 사람들이야 멍청하니까 그 점을 모른다 쳐도, 볼품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볼품없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슬로운 씨는 홀로 추했다. 그 이유는 내면이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슬픔이란 원래 제멋대로 발현되는 법이다.

이름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름은 그 존재가 평생 흔들게 될 깃발과도 같으니 좋은 것을 가져야 마땅한 법이다.

"제가 해병대에서 배운 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매일 아침 이부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하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뭔지 아세요? 동트기 직전에 우현에서 차가운 물을 얼굴에 철썩 맞는 거예요. 그러면 만사가 해결되죠."

아기를 키우는 건 저 먼 행성에서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것과 비슷하구나.

"조정이 재미있는 점은 말이죠, 앞을 보지 못하고 노를 저어야 한다는 거예요. 조정이라는 운동은 마치 우리에게 자신을 앞서가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같달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조정은 아이 키우는 거랑 아주 흡사합니다. 조정도 육아도 인내심과 지구력, 힘과 헌신이 필요하니까요.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 보지 못한다는 것도 그래요. 오로지 우리가 어디까지 왔나만 볼 수 있죠.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안심이 됩니다. 안 그래요? 물론 배가 뒤집어지는 일만 없으면 말이죠. 뒤집어지면 정말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삶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끝없이 일어나는 실수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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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2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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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2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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