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까요? 하지만 정만으로 부부가 결합된다면 이 세상에 괴로움도 없겠지. 속담에 추녀가 정이 깊다고는 하나 추녀의 깊은 정 때문에 상당한 곤란에 처하는 남자도 있는 법이오."

그분과 자신이 서로 비슷한 운명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은 아픔과 같은 희열로 신부의 가슴을 조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대의 기쁨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가 체험한 그런 육체의 고통을 아직 모른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했다.

모래처럼 조용히 흘러가는 이곳에서의 매일이, 강철처럼 긴장된 기분을 조금씩 좀먹어 간다.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처럼 그렇게도 기다리고 있던 고문이나 육체적 고통도 자기에게는 이미 가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따뜻한 물과 같은 안이함을 한번 맛본 이상, 다시금 이전과 같이 산중을 방황해야 한다거나 산속 움막에 몸을 숨겨야 한다면 더 커다란 이중의 각오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대우가 좋아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고문이 가해질 날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안이해진 육체는 그만큼 고통에 약한 법이다.

자신의 마음가짐이 조금씩 느슨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문을 가해 올 것에 틀림없었다.

"일본인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고……."
성 자비에르 신부님이 썼던 말을 생각해 낸 신부는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행위란 오늘까지 교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이것이 옳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하다는 식으로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민은 결코 행위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연민은 정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 말들은 그가 소년 시절 푸른 하늘이나 과수원에 바람이 지나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마음에 되살리던 성구였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능력을 다하여’ 한 가지 일만을 응시하는 것이 신부가 되고 나서의 그의 일이었다.

보이지 않게 숨기고 있는 그 깊은 상처에 아픔을 줄 마음은 이제 추호도 없었다.

저 귀가 크고 혈색도 살집도 좋은 부교오 이노우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찻잔을 손으로 안듯이 받쳐 들고 천천히 더운물을 마시던 얼굴. 자기가 항변하자 어느 정도 납득한 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미소를 보내던 얼굴. 헤롯은 그분이 고문을 받고 있을 때, 꽃으로 장식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스님도 언제나 사와노 씨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계셨던 거요. 인자(仁慈)의 길이란 필시 나를 버리는 것. 나[我]란 말이요, 쓸데없이 종파에만 사로잡힌 것을 말하오.

저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얼마나 놀라운 모독일까. 페레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란 모든 국가와 지리적인 관계를 초월한 하나의 진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선교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신부는 페레이라의 말을 부인할 만한 선교 경험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이 나라에 온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거짓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페레이라의 고독과 자신의 적막함을 비교했을 때, 신부는 비로소 자존심이 만족되어 미소 지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딱딱한 마루방에 몸을 누이고 잠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산다는 것도, 하나님이나 믿음에 대해 번민하는 것도, 어쩐지 피곤하기만 했다.

드디어 모든 결말이 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야릇하게도, 이것은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는 깨끗하고 신선한 흥분이었다.

그러면서 인간이란 어떠한 사태에 놓여 있어도 허영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아직 이런 감정조차 느낄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치욕과 모멸을 견디는 얼굴이 인간의 표정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그분이다.

오로지 이 얼굴이 이방인 가운데서의 그리스도교인의 얼굴일 것이라고 신부는 생각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이 패이도록 단단히 묶인 밧줄의 통증은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가 괴로운 것은 자신을 향해 아우성치고 있는 군중들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한 사실은 그 선교사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결코 배교하지 않고 믿음에 불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된 신부를 갑자기 울고 싶을 정도로 감동시켰다.

분노나 증오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경멸의 느낌은 아무래도 씻어 버릴 수가 없었다.

인간이 성경 속에 쓰인 신비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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