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장(예를 들면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온다는 입장)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자마자 다른 무언가가 우리의 확신을 뒤엎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처럼 편안함과 확신에서 끝없이 멀어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그가 생각에 도달하는 방식(망설이며, 빙 돌아서)이다

나처럼 몽테뉴도 몸과 마음이 늘 부산하다.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처럼 강박적으로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단다. 나처럼 손 글씨가 형편없고 자기가 뭘 썼는지 잘 알아보지 못한다. 나처럼 돈 계산에 약하고 세상사에 남달리 무능하다("계약서를 꼼꼼히 읽는 것만 아니라면 그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나처럼 요리를 못한다("내게 온갖 조리 도구를 준다 해도 나는 아마 그냥 굶는 편을 택할 것이다"). 나처럼 세상과 교류하긴 하지만 강렬하고 저항 불가능한 필요 때문에 주기적으로 세상에서 도망쳐야 한다. 나처럼 감정 기복이 심하다. 나처럼 스스로에 대해 글 쓰는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어쨌거나 쓰긴 쓴다. 나처럼 몽테뉴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나와 달리 자기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우리는 매일 아침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대해 걱정하며 잠에서 깨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왜 걱정하는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죽으면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몽테뉴에게 가장 쓰라린 죽음은 친한 친구였던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죽음이었다. 라보에티가 전염병으로 서른두 살에 사망했을 때 몽테뉴는 "나 자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몽테뉴가 나처럼 필요할 때는 그럴듯한 외향형처럼 굴 수 있는 내향형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우리 같은 사교적 내향형들은 세상을 속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꾸며낸 외향성은 우리를 소모시킨다. 진을 빼놓는다.

몽테뉴는 이 탑의 모든 면을 사랑했다. 탑에서 가족의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것을 사랑했다. 탑의 고요함을 사랑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시선 끝에 책이 보이는 것을 사랑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푹 파묻혀 있으며 우리의 시야는 코의 길이밖에 안 된다." 몽테뉴가 말했다. 그러니 코를 움직일 것. 여기저기 다른 곳에 코를 들이밀 것. 외적 거리는 내적 가까움을 가능케 한다.

오래된 격언들 사이에 몽테뉴가 직접 적은 글귀가 보인다.크세주Que sais-je.3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이 짧은 문장은 몽테뉴의 철학과 그가 살아온 방식을 깔끔하게 압축해 보여준다.

몽테뉴는 확신하기 위해 의심했다. 한 번에 하나씩 의심하며 자기만의 확신의 탑을 쌓았다.

몽테뉴도 여러 각도에서 세상을 보았다. 한 생각을 집어 들고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고양이도 그렇게 바라보았다. 내가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고양이가 나와 놀아주고 있는 걸까? 몽테뉴는 궁금했다. 너무나도 몽테뉴다운 생각이다. 모두가 아는 것(모두가 안다고생각하는 것)을 시험해볼 것. 가지고 놀 것. 몽테뉴는 말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그 생각을 가지고 놀아보라.

몽테뉴는 자기 철학이 아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간청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몽테뉴는 알려준다. 우리는 시도하고 실수하고 시시포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함으로써 스스로를 알 수 있다.

몽테뉴에게는 자신의 우연한 철학을 담을 문학 형식이 필요했다. 그런 문학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몽테뉴는 직접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에세이다. 프랑스어로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에세이는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몽테뉴는 "나는 나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었다"라고 말하며 이를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 칭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빠르고 단호하게 걷고, 키가 작고 다부지다고 말한다. 몽테뉴는 밤색 머리칼과 "통통하진 않지만 동그란" 얼굴을 가졌다. 하얗고 곧은 자신의 치아를 자랑스러워한다. 시를 사랑하고, 여름의 열기를 싫어한다. 자신의 땀 냄새를 참지 못한다. 저녁을 먹은 뒤에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한 번도 없다. 늦잠 자는 것을 좋아한다. 똥 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똥 쌀 때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운동 신경이 둔한데, 승마만은 무척 능숙하다. 잡담을 싫어한다. 체스와 체커 게임을 좋아하지만 둘 다 잘 못한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꾼다. 기억력이 나쁘다. 빠른 속도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서 가끔 자기 혀를 깨물고 어떤 때는 손가락을 깨물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처럼 와인에 물을 타서 먹는다.

몽테뉴도 그러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몽테뉴는 초기 에세이에서 "약간 다른 사람의 물건 냄새가 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갈수록 그는 점점 자신감 넘치고 대담해진다. 어느새 나도 그를 응원하고 있다. 딴소리가 구구절절 이어질 때 딴 데 정신을 팔았다며 그가 나를 비난할 때조차 나는 응원을 멈추지 않는다("내 글의 주제를 놓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부주의한 독자다"). 몽테뉴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았을 때 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빌리고 구걸하라고 배웠더라도 우리 모두는 "우리 생각보다 더 풍요롭다." 몽테뉴가 말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삶의 목표는 아니다.

몽테뉴는 "그때는 내 삶이 내 입술 끝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고 회상한다. 이상하게도 그는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마치 부드럽게 잠으로 미끄러지듯이 기꺼이 자신을 놓아주었다. 몽테뉴는 만약 이것이 죽음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아니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5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걱정하지 마라. 때가 되면 자연이 전부 다 제대로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을 것이다. 괜히 걱정하지 마라."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예를 들면 게으름이 그랬다. 몽테뉴는 종종 시간을 낭비하는 자신을 질책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질책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정말 바보다. 우리는 ‘그 사람은 평생을 허송세월했어’라거나, ‘난 오늘 한 게 없어’라고 말한다. 아니, 그동안 살아 있지 않았단 말인가?"

"고통스러운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화는 그리 잔인하지 않다." 몽테뉴는 말한다.

그는 14세기에 마신 약 덕분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처음에 그는 불멸을 크나큰 축복으로 여기고 좋은 곳에 쓰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점차 그는 불멸을 저주로 여기게 된다. 그가 사랑한 모든 사람이 죽는다. 지루하다(심지어 꿈조차도 지루하다). 관용도 사라지는데, 불멸의 존재는 희생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는 긴급함과 활력이 빠져 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불멸이 죽음보다 훨씬 더 나쁘다.

몽테뉴는 1592년 9월 13일 자기 저택에서 쉰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늙은 나이가 아니었다. 사망 원인은 편도선이 감염되어 목에 고통스러운 농양이 생기는 편도선염이었다. 마지막 며칠간 몽테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화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활동"으로 여긴 사람에게는 특히나 가혹한 고통이었다.

빌려온 진실은 빌려온 속옷만큼이나 잘 맞지 않으며 그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몽테뉴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을 것. 자신의 경험을 믿을 것. 자신의 의심도 믿을 것. 경험과 의심의 도움을 받아 인생을 헤쳐 나가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다가갈 것. 타인과 스스로에게 놀라워하는 능력을 기를 것. 스스로를 간질일 것. 가능성의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 것. 그리고 몽테뉴는 동포인 시몬 베유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제발, 주의 좀 기울여.

하지만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인생의 사소한 좌절을 침착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쯤이면 아마 추측 가능할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깨진 액정이 무언가를 나타내는 조짐이며, 좋은 조짐은 아니리라 결론 내린다. 그리고 계산한다. 액정이 아래쪽을 향해 떨어질 확률은 겨우 50퍼센트인데, 그 50퍼센트의 확률이 내게 일어났다. 사건 종료. 온 우주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깨진 액정은 마치 기관차처럼 우울과 불안을 줄줄이 끌고 온다. 박살 난 휴대전화는 박살 난 인생을 상징한다. 나를 포함해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 소로가 말한 "무한한 세상에서의 나의 몫"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소로가 "쉽게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부른 이런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깨진 액정 위에 시선을 고정한다. 정확히 말하면 액정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다. 나는 액정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는 이 각도로, 그다음엔 다른 각도로. 나는 고장 난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기보다는 휴대전화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는 것은 곧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보통은 따분한 대화지만, 이따금 이런 대화가 시적인 특징을 띨 때도 있다. 눈의 언어에 유창한 소로 같은 사람에게 삶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 편의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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