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세대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침체기에 취업 시장에 들어왔다. 빚을 짊어진 채 재산을 모을 수 없는 상태로, 급여가 낮고 발전 가능성도 없는 일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부모, 조부모, 심지어 손위 형제들마저 누렸던 재정적 안정에 결코 다다르지 못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든, 얼마나 오래 일했든, 얼마나 몸 바쳐 일했든, 얼마나마음을 썼든 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로드맵이???가다 보면,바로 여기에 도착할 거라고 약속했던???어떻게 이 지경까지 잘못될 수 있는지, 얼마나 외롭고 황망한 길인지 알아버렸으니까.

우리는 일자리가, 혹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가, 오래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언제든 빚더미의 폭풍에 집어삼켜질 거란 두려움 속에 산다.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삶의 재정 문제에서, 일종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고투하다가 결국 나가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불안정에 길들여졌다.

밀레니얼, 특히 백인 중산층 밀레니얼은 자신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서사를 믿지 못하게끔 길러졌다. 앞선 세대처럼 우리도 능력주의와 예외주의를 먹고 자랐다. 우리 모두는 각자 흘러넘치는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그 잠재력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노력과 전념뿐이라고 믿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현재 인생에서 어떤 지위에 있든, 결국엔 안정성을 쟁취할 거라고 믿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밀레니얼 세대는 이 서사가 얼마나 공허하고 심히 환상적인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동료들에게,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사설과 자기계발서에서 이 판타지를 계속 들려주는 이유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그만두면 망가진 게 아메리칸드림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백인, 중산층, 시민권자라는 특권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겐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말이다.

미국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이제야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평생 이 사실을 알고 한탄해 온 사람들도 있다.

팬데믹의 한가운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코로나19가 위대한 정리자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코로나19는 당신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누가 중요한지, 무엇이 필요고 무엇이 욕구인지, 누가 남을 생각하고 누가 자기 생각만 하는지 명확하게 정리해 주었다.

우리의 일터는 전에도 시궁창이었고 불안정했다. 지금은더욱더 시궁창이고 불안정하다. 육아는 이전에도 피로했지만 지금은 더 피로한 일처럼, 완벽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일해야 한다는 느낌, 24시간 내내 터져 나오는 뉴스들이 내면을 질식시킨다는 느낌, 지칠 대로 지쳐 진정한 여가나 휴식, 혹은 그 비슷한 것에도 접근할 수 없는 느낌 또한 그러하다. 다가올 몇 년 동안 우리가 겪을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밀레니얼 세대와 번아웃의 관계, 연료를 지피는 불안정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나마의 변화라면, 번아웃이 우리 세대의 정체성에 더 깊게 뿌리내린다는 점 정도겠지.

앞서 이야기한 느낌들에 대해 행동을 취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조건은 딱 하나다. 반박 불가능한 중심점. 단지 반성에 머무르지 않고, 이번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명확한 사실들과 그 뒤에 남을 잔해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일상을 디자인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건설할 기회다. 문자 그대로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일과 개인적 가치와 이윤 동기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우리 각각이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실제로 필수적이며 보살핌과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의 업무 역량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다. 만일 당신이 이 생각을 너무 과격하다고 여긴다면, 나는 어떻게 당신이 타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단히 중요하고도 명확한 사실은, 망가지고 실패한 게 단지 하나의 세대가 아니라는 거다. 망가진 건 체제 자체다.

기억이 닿는 한, 나는 거의 쉼 없이 일해 왔다. 대학원생으로 시작해 교수를 거쳐, 저널리스트로서 2016년과 2017년 내내 미국 내의 정치 후보자들을 따라다니며 기삿거리를 찾았고, 어떤 날들은 하루에 수천 단어를 썼다. 지난 11월에는 텍사스 총기 난사 사건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뒤, 유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일부다처제에서 도망쳐 나온 여성 수십 명의 사연을 들었다. 내 일은 매우 중요했으며 무척 즐겁기도 했다. 제대로 된 휴식을 갖는 일이 힘들게 느껴졌던 이유다. 게다가 선거가 끝나고 조금 쉬지 않았던가. 그때 재충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자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참느라 애써야 한다는 사실은? 그거야 내 일과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사실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면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마사지와 얼굴 관리도 받았는데, 나쁘진 않았지만 그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잠깐이었다. 독서는 얼마간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흥미가 당기는 책들은 정치와 관련된 것이어서, 애당초 나를 피로하게 만든 근원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 중에 새로운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게 벌써 몇 달째였다. 자러 가야겠다는 마음만 먹어도 책임감 있는 어른이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들이 떠올랐다. 휴가는 아무런 감명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 할 일’ 목록에서 해치워야 하는 또 하나의 일거리로 느껴졌을 뿐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아주 꺼리는 동시에 갈망했지만, 뉴욕에서 몬태나로 옮겨온 뒤엔 시간을 들여 새 친구를 만드는 일 자체를 거부했다. 나는 무감각해지고 둔감해졌으며, 모든 것이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100퍼센트 번아웃이었다.

나는 번아웃이 감기처럼 걸렸다가 낫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번아웃 상태라는 걸 까맣게 몰랐던 이유다. 나는 몇 달째 잉걸불 상태로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 진짜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없었다. 대체로 일상을 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단조로운 잡일들에 불과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부엌 칼을 갈거나, 제일 좋아하는 부츠의 굽을 교체하거나, 내 반려견을 지자체에 등록하기 위한 서류 작업 같은 것들을 해낼 수 없었다.

내 방구석에는 친구에게 보내려고 구입한 선물이 몇 달째 방치되어 있었고, 조리대에는 반납하면 적지 않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콘택트렌즈 영수증과 자료가 놓여 있었다. 품이 많이 들고 만족감은 적은 이런 잡일들이 전부 해결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른 되기adulting(부모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겼던 일들을 스스로 해내는 것에 대해 두려움 또는 해냈다는 뿌듯함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의 일상적 스트레스에 관한 글들이었다. 어떤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의 밀레니얼은 대체로 성년기를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의 연속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어른 되기’는 동사가 되었다." 어른 되기의 일부는 할 일 목록 맨 끝의 일들까지도 처리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른 되기, 나아가 ‘해야 할 일’ 목록을 완료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현대 세상에서 사는 일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쉬운 동시에헤아릴 수 없이 복잡해서다.

우리에겐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의 목록이,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가 제일 먼저 할당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정신적 에너지는 유한하다. 아닌 척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때 번아웃이 찾아온다.

나는 왜 계속 일했을까? 직업을 갖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직업을 얻은 뒤에도 쉬지 않고 일한 까닭은 뭘까? 얻은 직업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노동자로서의 내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내 가치가 아주 곤란할 지경으로 뒤엉킨 시기였다. 나는불안정함이라는 느낌을???내가 지금껏 노력을 쏟아온 목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느낌을???떨칠 수 없었다. 노력하기만 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어릴 적부터 믿어온 생각과 화합시킬 수도 없었다.

나는 왜 크리스마스에 학위 논문을 쓰면서 기분이 좋았는가?

지금까지는 내 인생이 그저 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인생을 묘사하기 위한 언어를 그러모으고 있다.

번아웃은 1974년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진단되었다.1 번아웃과 탈진exhaustion은 관련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의 한복판에서는 고단한 과제에 뒤따르기 마련인 성취감이 영영 오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야 할 일들로 납작해진 인생이다.

우리 시대의 번아웃은 그 강도와 만연함의 격이 아예 다르다. 소매업에 종사하며 변덕스러운 스케줄 속에서도 짬을 내어 우버 택시를 몰고, 어떻게든 아이 맡길 데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번아웃에 빠진다.

고급 케이터링 점심 식사와 무료 세탁 서비스를 누리며 통근에 70분을 쓰는 스타트업 종사자도 번아웃에 빠진다.

강의 4개를 연속으로 수업하고 식권을 지원받아 끼니를 해결하면서, 종신 교수직으로 이어질 만한 일자리를 잡기 위해 논문 제출에 애쓰는 학자도 번아웃에 빠진다.

건강보험이나 유급 휴가 없이 스스로 정한 스케줄에 따라 일하는 프리랜서도 번아웃에 빠진다.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못한 만성적인 직장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직업적 현상"으로 세계보건기구로부터 공식 인정받았다.

번아웃은 우리 시대의 상태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면서 자녀를 위한 저축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 하늘 높이 치솟는 집값과 양육비, 의료보험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체계적으로 살아보려 아무리 열심히 애써도, 이미 빠듯한 살림살이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려 노력해도, 성년기에 주어지리라 기약했던 안정은 찾아올 기미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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