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자면 작가가 되고부턴 언니의 패션도 바뀌었다. 일의 변화 때문도 있겠지만 개를 키우기 시작한 것도 영향이 있는 듯하다. 같이 산책을 가거나 놀아줄 수 있도록 운동화를 신고 운동복처럼 편한 옷으로 지내게 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의 보티첼리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마리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서 "이게 르네상스로구나!"라고 했다.

베로나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의 집에 갔다. 몇 번이나 간 적이 있는 나는 밑에서 기다렸더니, 마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베란다에서 양 팔을 펼치며 "오오, 로미오, 로미오"를 외쳐 다른 관광객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리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했다. 한번 맘에 들면 단숨에 거리를 좁혔고,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의 싫은 곳이 눈에 띄고 그러면 또 금방 식는다. 아마도 여행을 준비할 무렵 M씨와의 관계는 좋았으리라. 그러나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싫증나 있었나 보다. 모처럼 마리가 찾아와주었지만 나는 껄끄러운 두 사람 사이에서 녹초가 되었다. 수개월 뒤 내가 귀국했을 때는 결국 M씨를 만나지 못했다.

일류 요리를 추구하던 나는 유럽의 고급문화를 배워야 했다. 고급 레스토랑 예절도 알아야 했고, 고급 음식점에 이상한 옷차림으로 갈 수도 없다. 살 수 있고 없고를 떠나 명품에도 흥미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탈리아 명품은 정말 매력적이다. 명품가게를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마리는 그런 나를 경박하게 여겼다.

"상류의 맨 꼭대기를 모르면 아래의 것도 못 만들어. 후지산의 높이가 있으니 산자락이 있는 거잖아"라고 반론하고 싶지만 일일이 반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류 음악을 들어도 일류 회화를 봐도 이런 말을 듣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좋은 식기를 사면 ‘사치’가 되어버린다. 어쩔 수 없이 돈이 드니까. 그렇지만 역시 ‘사치는 멋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얼마 동안은 어느 식당에 가도 내가 만드는 게 더 맛있다고 여기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몇 년쯤 지나 이탈리안 붐이 일자, 일본의 이탈리아 식당 수준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동생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마리도 여러 곳에 가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카운터만 있는 수타면 가게를 생각해냈다. ‘가베노아나’라는 파스타 전문점이 몇 년 전부터 인기 있던 참이다. 수타면이라면 삶는 시간이 더 짧겠지. 미리 소스를 만들어놓고 면을 뽑아두면 라면집처럼 손님에게 빨리 요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토마토소스, 미트소스, 크림소스 등을 단골 메뉴로 정해두고 그날그날 바뀌는 메뉴가 몇 있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다지 성가시지도 않을 것 같다.

날마다 책장을 지나다니며 본 『소공자』 『소공녀』며 『레미제라블』 등의 책표지 글자는 확실히 생각나는데 나는 단지 그 표지만을 기억할 뿐이다. 마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이 전집을 독파했다.

피아노 걸상 높이 조절용으로 전에 쓰던 사람이 놓고 간 두툼하고 커다란 네크라소프의 책도 전 주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엉덩이 밑에 깔았을 뿐이지만 마리는 제대로 읽고 팬이 되어 훗날 대학 졸업논문으로도 모자라 대학원 연구 주제까지 이 19세기 러시아 시인으로 잡았다.

언니를 독서광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소비에트 학교였다. 우선 저학년 동안은 모든 수업이 국어뿐이다.

학교에서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시인, 문호의 문장을 되도록 많이 외우도록 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과목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늘어나지만 시와 함께 뛰어난 산문 구절을 암송해야 하는 것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학예회 등의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낭독이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반납할 때면 사서 선생님께 어떤 내용이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야 한다. 책을 대충 읽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전체의 틀을 알고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해 다른 이도 알아듣도록 들려준다. 이 훈련이 마리의 논리성을 키웠고 원래 뛰어나던 이야기꾼 능력을 한층 높여주게 된 것 같다.

일본의 학교도 독서감상문 따위는 그만두면 좋으련만. 아이들이 책을 읽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써본들 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도, 책이 좋아지지도 않아 보인다. 더구나 남에게 제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책 읽기 싫은 마음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책을 자주 선물한다. 예를 들어 체육대회에서 상을 받는다거나 무슨 성적이 좋았다거나, 일본이었다면 상장이나 기념품이 나올 장면에서 소설이나 시집을 선물 받았다. 귀국하기 위해 학교를 떠날 때도 책을 받았다. 내가 받은 책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나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디킨스를 탐독했고 팬이 되었다.
일본에만 있었더라면 마리의 독서도 그렇게까지 깊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독서의 폭도 그리 넓어지지 않았으리라.

귀국 뒤 아버지는 요요기에 있던 일소 도서관에 우리를 데려가서 러시아어 책을 빌릴 수 있도록 수속했다. 우리는 일본어가 많이 서툴러서 한동안 책을 읽는 것도 러시아어 쪽이 이해하기 쉬웠고, 우리 둘이 말할 때도 러시아어가 편했다. 게다가 이제 만나지 못하게 된 친구들 생각 때문도 있다. 다들 이 책을 읽었겠지 하고 상상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19세기 문호뿐 아니라, 동시대 소련의 SF, 아동소설 등 아무튼 도서관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두 주일에 3권인가 삼 주에 4권인가를 빌릴 수 있었으나 마리는 언제나 꽉꽉 채웠고 모자라면 내 몫까지 빌렸다.

아버지는 진보초에 있는 러시아 도서 전문점인 나우카 서점에도 데려갔다. 여기서 러시아 과학잡지 <나우카 이 지즈뉴과학과 생활>의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부류의 잡지로 과학에 대한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이 실려 있었다. 마리의 에세이는 사실은 이 잡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꽤 있다.

어느 작가를 읽기 시작하면 그 작가의 작품을 구할 수 있는 한 몽땅 읽었고,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전집을 낼 정도의 유명 작가들 작품은 모조리 읽어댔다.

책을 읽느라 밤도 자주 새웠다. 방을 함께 썼으니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꼼지락거린다. 일찍 자고 싶은 동생은 이 무렵 언니와 자주 싸웠다.

마리는 ‘하루에 7권’ 읽는다며 호언장담하고 다녔는지 정말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점에서는 남편도 지지 않았다.

히사시 씨가 기증한 책으로 고향 야마가타 현 가와니시 마을에 ‘지필당遲筆堂 문고’라는 도서관이 세워졌다. 히사시 씨 사후에 보낸 책을 합하면 장서는 22만 권이 넘는다. 작업을 위해 스스로 산 것도 있지만, 아는 저자나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책도 가득해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 있던 책도 많다. 그래도 장서 가운데 80퍼센트는 책장을 넘긴 흔적이 있고 그 20퍼센트 이상에는 메모며 책갈피 등 열심히 읽은 흔적이 있다.

이노우에 히사시는 말한다.

내 장서는 20만 권쯤 있다고 한다. 과연 하루 30권 정도로 책을 읽고 있으니 그 정도 될지 모르겠다. 바쁜데도 책을 많이 읽는다는 소리를 듣지만 나만의 독서법이 있다. 물론 한 권 한 권 꼼꼼히 읽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 뭔가를 찾으려 할 때는 우선 차례를 읽고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한다. 일본 학자들은 대개 결론을 맨 마지막에 쓰고 있으니 우선 뒤쪽부터 본다. 여기서 생각했던 것이 적혀 있지 않다면 그 책은 전반부도 별다른 게 없다고 내 멋대로 생각한다. 반대로 일부를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전체를 읽는다.

한 번 읽고 마음에 남는 책은 반드시 표지 뒤에 나만의 색인 같은 것을 써 다이제스트를 만든다. 이렇게 맘에 들어 열심히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는 책과 적당히 휘리릭 읽어버리는 책으로 나뉜다.

하루 3, 40권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대나무 공예 장인이 많고 많은 대나무 속에서 어떤 감촉으로, 이 재료는 이렇게 만들어봐야겠다고 직관적으로 영감이 떠오르는 것처럼 이는 하나의 직업적인 훈련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책에서 얻은 것을 일단 몸에 넣어 연표를 만들거나 여러 가지 시행해봄으로써 내 지식의 원천이 되어 쓰는 작업으로 연결된다. 몸속으로 들어온 여러 정보가 모여서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모여 이번에는 지혜를 만든다.
?『깊은 내용을 재미있게?창작의 원점』PHP, 2011

22만 권 중 20퍼센트 이상 책에 메모나 갈피가 끼여 있다는 것은 책을 모으기 시작해 약 50년으로 잡으면남편 이노우에 히사시 씨는 2010년에 향년 75세로 영면 하루 평균 3권의 책을 읽으면서 메모했다는 계산이다. 따라서 언니가 하루 7권 읽었다는 것도 훑어본 책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덧붙이면 마리는 걸어서 삼 분 거리 생선집에 고양이 찬거리를 사러 갈 때도 가방에 사전이며 그때 읽고 있던 책을 넣어 다녔다. 늘 그리도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녔으니 어깨 결림이 나을 새가 없었다.

미야베 미유키도 마리보다 먼저 관심을 가졌더랬다. 이건 자랑.

언니는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그리고 온 정열을 다해 권한다. 언니가 쓴 서평을 읽노라면 전화 걸어올 때의 그 상기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도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마리에게 권했다. 어른이 되어 우리 자매가 나눈 대화의 화제는 음식 아니면 책, 연극, 영화 정도다.

이 점에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마음이 통했다. 재미있다고 느낀 점, 마음에 드는 표현도(대개는 웃기는 곳이지만) 같았다. 마리가 작고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좋은 책을 만나면 ‘아, 마리는 이 책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싶어 언니의 평론이 그립다.

2015년에 출간된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마음산책, 2015를 마리는 어떻게 읽었을까. 벵갈어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영어로 교육을 받아 영어로 글을 써 세계적 작가가 되었으며 어른이 되고 나서 공부를 시작해서 정말 좋아하지만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이탈리아어로 쓴 책이다.책에는 이탈리아어로 쓴 짧은 소설 2편도 실려 있다. 이 행위와 작품에 대한 언니의 평론을 읽고 싶다.

2006년 5월, 만 쉰여섯 살이 된 지 얼마 뒤 마리는 영면했다.

대략적인 구성도 히사시 씨가 잡아주었다. 더욱이 마리의 스물세 권 저서 하나하나에 해설도 붙여주었다. 지필당 문고 담당자도 나도 첫 작업이라 모르는 것도 많아 겨우 전시 형태를 갖춰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 기적 같고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도 이 작업으로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가족을 잃게 되면 아무래도 병으로 고생하던 시기의 후회스러운 일만 떠오르게 된다. 전시회를 위해 마리의 생애를 어릴 적부터 쭉 돌아보면서 즐거웠던 일, 싸웠던 일, 우스웠던 일 등등 내가 아는 언니의 여러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서 기뻤다.

다시마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래 러시아어에 없다 보니 통조림에는 ‘바다의 양배추’라고 표기되어 있다.

『미식견문록』에서 가장 공들여 쓴 꼭지는 「진짜 할바를 찾아서」가 아닐까. 여기서 마리는 ‘할바’라는 과자를 소개했다. 공들인 증거로 시청자의 요청이 많아 언니가 작고한 지 7년이 지난 2013년 가을,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과자를 재현하는 NHK 방송국 교육채널 프로그램 <그레텔의 아궁이>에서 이 할바를 다루었다.

언니는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여동생은 못 먹어본 걸로 적었으나 실은 먹었더랬다. 이라가 모두에게 맛보여 준 것은 여름 캠프의 탁구대 옆이었다. 상세하게 장소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도 이 맛에 까무러치게 매료당했기 때문이다. 입안에서 솔솔 녹아내리는 것이 라쿠간 같기도 하지만 좀 더 찐득하고 달고 기름지다.

"온 세계를 다니며 취재하셨는데 당신이 가장 맛있다고 느낀 음식은 뭐죠?" 하고 물으니 ‘할바’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리사학교의 그 누구도 할바를 몰랐으니 나는 으쓱했다.

그 일이 있은 뒤 할바가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진 나는 각국 요리 책 레시피를 뒤져 찾게 되면 노트에 옮겨 적어가며 몇 번이나 만들어봤다.
그러나 아무래도 잘 안 된다.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만 비로소 만들 수 있는 과자이니만큼 기술자로서 특별한 수련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언니의 에세이를 읽고 알게 되었다.
훗날 요리 교실 학생들이 그리스에 다녀온다기에 지나가는 말로 혹시 할바를 찾거든 좀 사다 달라고 했더니 진짜로 찾아 가져왔다. 물론 마리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 이래로 터키나 그리스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부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언니가 쓴 에세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진 덕에 할바는 조금 유명해져 이젠 인터넷으로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싶도록 만들다니, 마리, 대단해!

그녀와는 마리가 영면했을 때 전화한 이래였으니 9년 만이다. 편지에는, "마리의 열혈 팬이라는 젊은 한국인 아가씨가 베오그라드까지 날 찾아왔더라. 마리 책이 영어나 러시아어로 나왔다면 나도 읽을 테니 보내줘"라고 쓰여 있다. 언니 책은 영어, 러시아어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어 애독자도 많다. 지금은 대만에서도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

야스나의 편지에 이어 이번에는 11월, 독일에 살고 있는 리차를 만나고 왔다는 일본 독자로부터 메일이 왔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이 여학생은 마리의 모든 점이 좋다며 『프라하의 소녀시대』에 등장하는 세 명의 그 뒤가 궁금해 유럽까지 확인하러 다녀왔다고 했다. 이 우연이 큰 힘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마리가 쓴 말, 작품이 널리 읽혀 다른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고 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씀으로써 마리가 말하는 말의 힘(히사시 씨는 ‘앞으로 꼬꾸라지듯 맥진한다’라고 표현했지만)의 비밀을 푸는 실마리로 삼아보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제 틀 안에서는 개성적이요 재미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틀을 깨고 나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에게는 틀이란 게 없었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언니는 타고난 에너지로 정신을 자유롭게 활짝 열어젖히고 살았다. 그 결과로 약간의 곤란함도 즐거움도 함께 받아들였다. 덕분에 주위에도 불똥이 튀는 일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리워진다.

야스나, 리차가 내 등을 밀어주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을 볼 수 있을지 불안했다. 어린 시절 나는 뭔가 시작하면 처음에는 열심이지만 도중에 싫증이 나거나 귀찮아져서 내팽개치곤 했다. 소비에트 학교 시절, 공작 시간에 천으로 보조가방을 만들어 자기 이름을 실로 수놓아야 했는데, 수업 시간에 완성을 못하면 숙제로나마 끝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 ‘유리’의 ‘유ㄹ’에서 싫증이 나 자수를 그만두어버렸다.

어머니는 "유ㄹ에서 끝내다니 얘는 정말 유루훈ゆるふん, 옛날 일본 팬티인 훈도시를 헐겁게 맨다는 뜻으로 긴장감 없이 맺고 끊는 게 약한 사람에게 쓰임이네"라며 이름의 마지막 철자의 자수를 거들어 끝내주셨다. 이후 내가 뭔가를 도중에 그만두면 가족들은 ‘유루훈 유리짱’이라 불렀다.

어른이 되어 그런 점은 좀 나아졌겠지 싶지만 역시나 장롱 속에는 뜨다 만 스웨터가 몇 벌이나 잠자고 있다.

익숙지 않은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장을 보거나 저녁을 지어주는 등 삼시세끼를 맡아준 아들 사스케에게 우리 집 이야기를 쓴 이 책을 바친다.

유리에게 많이 의지했던 마리의 모습이다. 사실 맏이 특유의, 사랑하지만 어머니와 조금 껄끄러웠던 모녀관계며 여러 모로 완급조절을 해주는 유리의 자리가 많이 허전했던 것 같다.

입에 풀칠하려고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통역 일이지만 일거리도 별로 없었으니 평생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리는 30대 중반까지도 고민했다 한다. 대학원을 나와서 거의 10년이나 번민한 셈이다.

유명한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는 처형 마리에 대해 일본 문화사상 처음으로 통역론을 확립했고, 진실에 대해선 성실하게, 정의에 대해선 솔직하게, 힘 있는 것에는 신랄하게, 이에 더해 엄청 재미있는 작가라고 평했다.

서로 이끌리는 사람들은 영혼의 유전자에 어떤 자력이 있나 보다. 그리고 독자와 작가에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