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는 우아하게 나이 들지 않았다. 나이와 싸우면서 마지못해 억지로 나이 들었다. 보부아르는 불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했고, 자신의 분노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노했다. 하지만 결국 보부아르는 노화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노화를 받아들였으며, 본인은 아마 부정하겠지만 나이 듦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확실하게 나이 든 남자가 아니라 애매하게 나이 든 남자다. 젊은이보다는 늙었지만 진짜 늙진 않았다. 사이에 낀 이런 곤란한 시기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중년 후반’은 ‘후반’이라는 말 때문에 별로지만 ‘노년 초반’보다는 훨씬 나은데, ‘노老’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늙지 않았다.

지는 싸움이라는 것, 나도 안다. 이미 후퇴가 시작되었다. 내 수염이 처음 회색으로 변했을 때 나는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매주 수염을 갈색으로 염색했다. 하지만 염색을 하는 간격은 나도 모르는 사이 1주일에서 2주일로, 3주일로 늘어나고 있다. 결국 내가 흰 수염에 굴복하는 날을 상상할 수 있다. 충돌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늙지 않았다.

나의 자기기만 능력은 수염 몇 가닥이 처음으로 하얗게 셌을 때 생긴 것이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돈 쓰는데 신중한 젊은 남성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어쨌거나 ‘성공적인 노화’(정말 터무니없는 단어다.아, 이제 나는 나이도 성공적으로 들어야 하는 거야? 좋네 좋아. 무능하다고 느낄 만한 일이 또 하나 생겼군)에 관한 과학 연구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다이어트와 운동법, 예방의학에 관한 책도 부족하지 않고, ‘노인 요양 시설’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홍보하는 광택이 흐르는 안내 책자도 부족하지 않다. 철학이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줄 수 있을까?

노화는 질환이 아니다. 병이 아니다. 비정상이 아니다. 문제가 아니다. 노화는 연속체이며, 우리 모두 그 연속체 위에 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늙어가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도 당신은 늙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나 할아버지보다 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똑같은 속도로.

나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나이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노화를 연구한 철학자 얀 바스는 말한다. "나이는 그 무엇의 원인도 아니다."1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여행은 나의 ‘기투企投’였다. 기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실존주의 용어다. 기투는 우리가 일상의 환경을 초월하게 해주고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우리의 기투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기투와 부딪칠 거라고 경고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뒤얽혀 있다. 우리는 타인이 자유로운 만큼만 자유롭다. 나의 기투(부녀간의 사랑 넘치는 프랑스 여행)는 소냐의 기투와 정면충돌했다. 소냐의 기투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내 경험상 다리는 몸을 상쾌하게 하고 정신을 자극한다. 또한 훌륭한 은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실존주의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다룬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더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데,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자기 불행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한 번에 한 붓질씩 자기 자화상을 그린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곧 그 자화상이며 "오로지 그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

좋은 소식은, 우리가 사실성을 초월할 수 있고 자신의 사실성,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는 거야.

카페를 사랑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카페 위에서 태어났다. 보부아르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는 발코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발코니에서 카페 드 라 로통드Cafe de la Rotonde가 내려다보였다. 어느 날 부모님이 나가고 집에 안 계실 때 보부아르는 여동생에게 아래층으로 몰래 내려가카페 크림cafe creme(크림 커피-옮긴이)을 마시자고 했다. 동생 엘렌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엄청

어린 나이에, 실존주의자가 되기도 전에, 실존주의자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전에 보부아르는 "내 삶은 현실이 될 아름다운 이야기, 내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만들어낼 이야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실존주의다. 따라야 할 각본도, 지문도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이라는 이야기의 저자이자 감독이자 배우다.

보부아르가 어찌나 근면하고 유머가 없었는지, 한 친구는 보부아르에게카스토르Castor, 즉 비버(비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동물로 유명하다-옮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별명은 평생 보부아르를 따라다녔고, 보부아르는 이 별명을 명예의 훈장으로 여겼다. 보부아르의 전기를 쓴 프랑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일이라는 단어에는 무슨 마법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이 단어는 특별한 광휘, 특별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보부아르에게 일은 삶의 암호와도 같았다."3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내 방어 수단은 일이다. 그 무엇도 내가 일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노년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읽기 쉽지 않은 585페이지짜리 책, 《노년》이다. 다음은 이 책의 한 문단이다.

제한된 미래와 얼어붙은 과거. 이게 바로 노인들이 맞이하는 상황이다. 많은 경우 이 상황은 노인들을 마비시킨다. 모든 계획이 이미 수행되었거나 폐기되었고, 삶은 스스로 제 문을 닫는다. 그 무엇도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더 이상 그 무엇도 할 것이 없다.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었다. 배심원이 없으면 판결도 없다. 무인도의 여성은 생물학적 노쇠를 경험하겠지만 나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보부아르가 흄의 기요틴과 비슷한 인지적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존재-당위’의 함정이 아니라, 내가 ‘그럴 수도-반드시’ 문제라고 부르는 함정이다. 내가 루소처럼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깔 수도 있다고 해서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이 절망에빠질 수도 있다고 해서반드시 그들이 절망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보부아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이라면 이러한 선택지를 인정할 것이다.

내 생각에 보부아르는 키케로의 밝음을 지나치게 만회하려 했던 것 같다. 보부아르는 로마인의 장밋빛 렌즈를 새까만 선글라스로 바꾸었다. 선글라스는 해로운 광선에서 눈을 보호해주지만 빛을 차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빛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노년이 천천히 죽어가는 암울한 시기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은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창의적 결과물을 내는 시기일 수 있다. 가장 좋은 사례가 누구냐고? 바로 시몬 드 보부아르다.

"좋게 나이 드는 건 자유에 더 가까워지는 거야. 나쁘게 나이 드는 건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고."

나이가 들면 통제에서 수용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수용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수용을 가장한 저항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우텐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은퇴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특정 역할(은행원, 기자, 웨이터)로 평생을 살다가 급작스럽게 이 정체성을 빼앗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지? 우리는 톨스토이의 소설 속 주인공 이반 일리치처럼 자신의 삶 전체가 거짓말이었음을,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이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유한성에 직면한 사람은 공연이 끝나자마자 배역에서 빠져나오는 배우처럼 자신의 역할을 더욱 기꺼이 폐기한다. 어쩌면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도 해방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순간이 너무 늦게 왔다 하더라도.

과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나는 치유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 측면이다.
"추억에는 일종의 마법, 나이에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마법이 있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그 마법의 뿌리는 과거에 있지만 마법이 꽃을 피우는 것은 현재다.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과거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만약 우리가 지나온 세계가 황폐하다면 음침한 사막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회상의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있지만 그와 비슷한 부정적 단어, 예를 들면 죄책감이나 후회를 의미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던 고대 그리스인처럼 살면 왜 안 되는가?

나 또한 인생의 흐름을 되짚어보기 시작하고 뜻밖의 행운을 발견한다. 친구가 가장 필요했을 때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친구. 꼭 알맞은 때에 나타난 꿈의 직업과, 그리 꿈 같지 않았던 뒤이은 해고. 힐마르라는 이름의 한 아이슬란드 작곡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내가 만나야 했던 때에 전부 다 만났어요."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관찰이다.

우리는 위대한 정리를 통해 그저 인생의 흐름만 되짚어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하나씩 추억을 재구성한다. 보부아르는 마치 수공업자처럼 이 과정을 촉각적으로 설명한다. "현재 나는 내 삶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고, 지식의 불완전한 조각들을 다시 읽고, 다시 보고, 깎아내고, 간극을 메우고, 모호한 것을 명확히 하고, 산산이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하나로 붙이고 있다."

회상의 또 다른 위험(얼마간 보부아르의 발목을 붙잡은 위험)은 ‘만약에 함정’이다. 보부아르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내리지 않은 선택,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만약 다른 시대에, 다른 가족에게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몸이 아팠을 수도 있고 공부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르트르를 안 만났을 수도 있다. 마침내 보부아르는 이런 생각들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흘려보낸다. 보부아르는 "나는 내 운명에 만족하며 내 운명이 어떤 식으로든 변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니체의 악마 앞에서다 카포를 소리 높여 외친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우리가 맺는 관계의 질은 행복 방정식의 가장 중요한 변수다. 보부아르는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회고록 《모든 것이 끝나고All Said and Done》에서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 나의 애정과 우정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라고 말한다.

나이 들었을 때 친구를 잃는 것이 특히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과거의 일부까지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일부까지도.

‘난 너를위해 살지는 않지만 너 덕분에, 너를통해서 살아.’ 우리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8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부아르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의 특이한 성격을 더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겸손해지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유치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코페르니쿠스적 순간을 경험했다.

노인들의 문제는 어린 척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어린 척을 못 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실 일곱 살을 따라 해야 할 때 스물일곱 살처럼 군다. 노년은 호기심, 더 나아가 경이를 되찾는 시기다. 결국 철학자는 뇌가 더 커진 일곱 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행은 삶에 새로움을 되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 보내는 이틀은 익숙한 환경에서 보내는 30일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극작가 유진 이오네스코의 여행 공식에 동의했다. 여행을 통해 보부아르는 계속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보부아르는 여행길에서 평화를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원을 품은 순간을 산다. 나 자신의 존재도 잊어버린다."

보부아르는 노년에 수동성이 아닌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열정은 반드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소일거리가 아닌 프로젝트를 가져라. 프로젝트는 의미를 제공해준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패러디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 즉 개인과 집단에, 대의명분과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폭은 1968년에 베트남전 반대운동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스폭은 여든 살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에 공공연하게 항의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9 이게 바로 노년의 장점 중 하나다. 줄 것은 더 많아지고 잃을 것은 더 적어진다. "노인의 노쇠한 신체에 깃든 두려움 없는 맹렬한 열정은 감동적인 광경이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습관은 우리와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다. 습관이 왜 생겨났는지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그 가치를 의심하기만 한다면 습관은 유용할 수 있다.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관을 지배해야 한다.

일흔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데에도 장점이 있다." 니체처럼 보부아르도 지난 삶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오랫동안 즐겼다."

노년은 삶의 패러디가 아니다. 삶 자체가 삶의 패러디다. 노년은 특히 강력한 한 방일 뿐이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삶에 매달린다. 하지만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건설적인 물러남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건설적인 물러남은 만사 무관심하거나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게 아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여전히 기차에 탄 승객이고 여전히 다른 승객을 신경 쓰지만, 부딪치고 흔들리는 것에 전보다 덜 불안해하고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덜 걱정하는 것이다.

아흔일곱 살까지 살았던 버트런드 러셀은 관심사의 원을 확장시켜서 "더 넓고 덜 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아의 벽이 조금씩 약해지도록, 자신의 삶을 점점 더 보편적인 삶에 어우러지도록 할 것"11을 제안한다.

프랑스의 평론가 폴 발레리가 시에 관해 한 말은 우리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 삶에는 결코 끝이 없다. 그저 포기할 뿐. 끝마치지 못한 일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세상에 끝마치지 못한 일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삶을 온전히 살아낸 것이 아니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계획 안에서 내 계획을 발견하면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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