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체험을 할 때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면서 느낀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누군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더 무섭고 불안하며 치료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당시 영어를 잘하진 못했지만 중환자실에 일하면서 미국 중환자 간호 저널을 보며 최근 중환자 간호의 경향이 어떤지 알아보곤 했다. 지식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는 관련 저널을 읽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란 생각을 항상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아주 적절하게《미국 중환자 간호 저널(AmericanJournalofCriticalCare,AJCC)》에서2008년에 소개된DailyGoalsWorksheet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 사용되는Worksheet에는 단순히 큰 계획들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식이, 재활, 그날의 검사, 통증관리, 수면조절 등등 환자의 회복과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이Worksheet가 가진 많은 장점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이Worksheet와 관련된 논문을 포함한 근거 있는 자료들 모아 의료진들을 설득할 준비를 했다. 사실 이를 도입하고 싶었던 이유가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한 치료계획 공유 이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간호사’에게도 이런 치료계획 공유가 더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와서‘처방’이라는 것을 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고 처방을 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의료인으로서 처방을 내고 난 뒤 그 처방이 실제 이루어졌는지 확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확인하지 않는 이유가 처방을 이행하는 간호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방이 이행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본인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이 의료인의 업무라면 본인이 낸 처방이 제대로 이행되어 환자가 적절한 치료와 중재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그 처방 이후 환자 상태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 또한 의료인의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처방을 수행하는 사람은 간호사이고 그렇기에 처방에 대한 간호사와의 의사소통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호사로서 그 처방이 왜 이행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빨리 이행되어야 하는지 알면 그에 따라 업무의 우선순위를 변경해 일의 효율도 증진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왜 이행하는지 궁금해 하는 환자 혹은 보호자에게‘의사가 처방을 내서 해야 됩니다.’ 이상의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환자도 본인이 어떤 치료를 받을 예정인지 또 스스로 이행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알아야 치료에 더 협조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치료계획은 환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환자와 그 가족이 치료계획을 설정하는 팀에 포함되어야 한다. 환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는 것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 체험을 통해 침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로만 둘러싸여 본인의 치료계획이나 목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는 것은 불안감만 조성할 뿐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더 열정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간호사로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근무환경 혹은 업무 분위기가 굉장히 삼엄하다는 것이었다.

간호사는 일하면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사람이 참 많다. 의사, 동료 간호사, 약사, 환자, 보호자, 간호조무사, 방사선사, 다른 부서 간호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원무과 직원 등 잠깐 생각했는데도 이 정도이니 실제로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며 일을 하는 직업임에 틀림없다.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직업이면 실제 옆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간호사라도 의사소통이 편해야 덜 힘들 텐데‘간호사의 진짜 적은 간호사’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같이 일하는 선후배 간호사들과의 의사소통을 가장 어려워하는 간호사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회식을 통해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든 회식이 그런 건전하고 건설적인 자리가 아님을 알기에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단체 회식을 반기는 간호사보다 그렇지 않은 간호사들이 더 많았다.

같이 일하는 간호사들이 동료로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기를 바랐고 단순히 개인적인 부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입 밖으로 말할 일 없는 본인이 가진‘간호’에 대한 가치관들이 공유되기를 원했다.

직업에 대한 애정이나 가치관을 입 밖으로 꺼내보는 것은 그 직업에 대한 또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상기시켜줄 수 있기에 좀 더 자주 언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달 무작위로 같이 일하고 있는 중환자실 간호사들 중 두 명을 선정하여 본인이 생각하는 간호사로서의 강점과 간호에 대한 가치관에 대해 인터뷰하고 프로젝트의 이름처럼 본인이 생각하는‘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또한 다른 간호사들에게 인터뷰 당사자인 그 간호사만의 장점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언급된 고유의 장점을 토대로 그 간호사만의 별칭을 만들었다. 간호사로서의 가치관에 대해 생각해보며 초심을 다시 찾고,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기 바쁜 부정적인 업무 분위기를 완화하고 서로의 장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보자는 뜻이 담겨있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칭찬’에 약하다. 사소한 칭찬이 생각지 못한 엄청난 동기부여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간호사 생활을 하며 경험했던 간호사 세계는 이‘칭찬’에 참 인색하다고 생각했다.

돈도 들지 않고 힘도 들지 않는 것이 칭찬인데 굳이 인색할 필요 없지 않을까?

‘Murse’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처음 듣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Murse는 남성을 뜻하는Male이라는 단어와 간호사를 뜻하는Nurse가 합쳐진 합성어로 미국에서 남자 간호사들을Murse(멀스)라고 부른다.

업무 특성 때문에 간호사는 여자 직업이 되어야 한다? 어째서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왜 꼭 여자의 일이 되어야 하는가? 남자 간호사에 대한 역사가 길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첫 남자 간호사가1970년대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그리 짧은 역사도 아니다.

미국에는 한국보다 훨씬 많은 수의 남자 간호사들이 존재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직업에 대한 성(性) 고정관념이 확실히 덜하다. 예를 들면‘간호사는 여자 직업이고 소방관은 남자 직업이다.’

남자 간호사에 대한 낯설음은 여전하고 그에 대한 성 고정관념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수는 늘고 있는데 남자 간호사에 대한 사람들의 생소함은 왜 여전한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생각한 세 가지 잠재적인 이유를 공유하고 싶다.
첫째는 남자 간호사 리더의 부재. 쉽게 말하면 유명한 사람이 없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 남자 간호사의 존재는 여전히 낯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남자 간호사의 존재를 알리기엔 간호를 이끄는 남자 간호사 리더 이야기나 성공한 남자 간호사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 수는 매년 늘어나지만 앞서 설명했던‘간호 관리자’의 역할을 하는 남자는 아주 드물다. 한국에서 일할 당시 그 큰 삼성서울병원의 수많은 간호 관리자 중에 남자는 단 한 명이었다. 동료 간호사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남자 간호사로서 본받을 만한 롤 모델의 부재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남자 간호 관리자나 간호계 내 남자 리더의 부재는‘역사가 짧기 때문에’라는 이유일 수도 있고‘그런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 아직 없기 때문에’라는 이유일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자 간호사 중에서도 리더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현재 일하는 남자 간호사들 혹은 앞으로 일하게 될 남학생 간호사들에게도 큰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롤 모델을 갖는다는 것은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리더들 중 누군가가 조금 더 나아가 간호계를 이끄는 리더들 중 한 사람이 되는 날도 꿈꿔본다. 물론 앞서 성(性) 고정관념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표출했기에 굳이‘남자’ 간호사 리더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포인트는 남자 간호사도 같은 간호사이기에 병원의 간호부를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간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의 제한된 활동 반경. 한국에서 일할 당시, 대부분 의식이 있는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일반 병실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남자 간호사들보다 환자들이나 보호자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술실 혹은 면회시간이 극히 제한된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들이 더 많았다.

PA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같은PA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한국PA와 미국PA는 교육 및 훈련과정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PA는 국가적으로 자격이 인증된 직업이며 주 정부의 법 보호 아래 면허를 가지게 되고 업무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명백하게 지정되어 있다.

한국은PA가 하는 일이 각 병원 혹은 부서마다 다르고 보통은 의사가 위임한 일을 한다.

한국PA 간호사는 전공의 수가 부족한 과에 많은 편이다. 수술을 직접 보조하는PA도 있고 레지던트들이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병실에 입원해있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는PA도 있다. 어떤 날은 수술실 어떤 날은 내원 환자를 돌보는 일, 이런 식으로 둘 다 수행하는PA도 있다. 최근에 전공의 근무시간 제한법이 통과되면서 전공의들이 주당80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지정되면서 부족한 의료 인력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텐데 이 잘못된 형태로 확립된 한국PA 간호사 제도를 확대시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 생길 수 있는 문제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은 이PA 간호사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국가가 인정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은 인력으로부터 받은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PA 간호사도 결국은 같은‘간호사’라는 타이틀이기에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전문 간호사’는 무엇인가?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2000년부터 시행된 전문 간호사(AdvancedPracticeNurse,APN)는 보건복지부장관이 인증하는 전문 간호사 자격을 갖고 해당 분야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의료기관이나 지역사회 내에서 간호대상자(개인, 가족, 지역사회)에게 상급수준의 전문가적 간호를 자율적으로 제공한다. 또한, 환자, 가족, 일반간호사, 간호학생, 타 보건의료 인력 등을 교육하고 보수교육이나 실무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에 참여한다. 현재 의료법에서 인정하고 있는 전문 간호사 분야는 보건, 마취, 가정, 정신, 감염관리, 산업, 응급, 노인, 중환자, 호스피스, 종양, 임상, 아동으로 총13개이다.’

PA 간호사를 여기서 언급한 이유는 남자 간호사 중에 특히PA 간호사 역할을 수행하는 남자 간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PA 간호사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이유는 비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같은‘간호사’로서 걱정의 마음이 있어서이다. 의사인력이 부족한 것은 분명한 문제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PA라는 이름만 빌려 미국의PA 시스템을 법이나 체계적인 교육 및 훈련과정 없이 흉내만 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문화나 관습으로 인한 영향은 간혹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동안은‘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처음 간호사로 일한9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 책이 조금이나마 그 인식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

남자가 간호학과를 다니는 것이, 남자가 간호사로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겨지는 날. 그리고 남자가 간호계의 리더가 되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그런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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