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나는 이유는 기다림 자체보다는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마치 그 안에 답이 있는 것처럼(그 안에 답은 없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 걱정은 아무 쓸모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결코 사소하지 않은 내 걱정의 에너지가 열차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내 조바심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고, 만약 내가 조바심치기를 잠시라도 멈추면 온 우주가 소멸할 거라고 믿어왔다.

여러 다양한 철학은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소로의 저항 정신은 10대의 마음을 끈다. 니체의 불꽃같은 강렬한 아포리즘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중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토아철학은 나이 든 사람을 위한 철학이다. 몇 번의 전투를 이겨내고, 패배도 몇 번 해보고, 상실도 경험해본 이들을 위한 철학이다. 크고 작은 인생 역경의 시기를 위한 철학이다. 고통과 질병, 거절, 짜증나는 상사, 건조한 피부, 교통체증, 카드빚, 공개적 망신, 지연되는 열차, 죽음 같은 것들. 스토아학파를 낳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철학에서 무엇을 배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든 행운에 준비되는 법."

스토아철학의 흐름은 미국 역사를 관통한다.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를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들에게서 시작해1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스토아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빌 클린턴은 마르쿠스의 《명상록》을 지혜가 가득한 경이로운 작품으로 여기고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삼았다.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견유학파인 크라테스였다. 견유학파는 고대의 히피들이었다. 이들은 아주 조금만 먹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권위에 도전했다.

제논은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진 주랑’이라는 뜻이다)에 자리를 마련했다. 스토아 포이킬레는 양옆으로 기둥이 늘어선 주랑으로, 이곳에서 사람들은 장을 보고 사업을 하고 잡담을 나누었다. 제논은 실제 전투와 신화 속 전투를 그린 벽화 사이를 힘차게 걸어 다니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스토아학파가 주랑, 즉 스토아에서 모였기에 이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에게 철학은 공적인 행위였다. 이들은 결코 정치에서 물러나 있지 않았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3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정말 아름다운 유리잔이 아닌가? 수백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유리잔의 끝을 예상하고 유리잔이 있음에 더욱 감사해한다. 애초에 유리잔을 가져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한다. 친구의 부서진 유리잔과 그때 자신이 줄 수 있는 위로를 상상한다. 아름다운 자기 유리잔을 타인과 함께 나누는데, 다른 사람들 역시 로고스, 즉 합리적 질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너무나도 참인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문장이다.당연히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말을 들으려고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왔던가?

자신이 더 똑똑하거나 더 부유하거나 더 날씬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것은 본인이 먹거나 먹지 않은 것 때문이거나 받지 않았거나 받았던 건강 검진 때문이거나 하지 않았거나 지나치게 많이 한 운동 때문이거나 먹거나 먹지 않은 비타민 때문이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갖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토아학파는 답한다.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아픈데도 행복하고, 위험에 처했는데도 행복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행복하고, 나쁜 평판을 듣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데려오라! 신들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스토아철학자를 보게 될 것이다!"

적이 우리의 몸을 해할 수는 있어도 우리 자신을 해할 순 없다. 스토아철학을 공부한 간디는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나를 해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고통이 밀려드는 와중에 롭은 간신히 에픽테토스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롭은 이 말을 되뇌고 또 되뇌며 밀려드는 고통을 다스렸다.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전보다 나았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나았다. "내 몸은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한다는 환상을 전부 제거했어요."

지난 일을 돌아보면 이런 스토아적 태도가 결과를 바꾸진 않았음을 롭도 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롭이 고통을 견디는 방식을 바꿔주었다. 롭은 고통스러웠지만 삶이 다르게 흘러가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더하진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55년에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로마 황제의 고문이었던 에픽테토스의 주인은 그를 때렸다. 에픽테토스는 태연하게 고통을 참았다.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는 에픽테토스의 주인이 그의 다리를 비틀며 고문하기 시작했다. "계속 그렇게 하면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 에픽테토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주인은 계속해서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었고 결국 다리가 부러졌다. 에픽테토스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다리가 부러질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에픽테토스는 평생 다리를 절었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키케로는 궁수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궁수는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궤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숨을 내쉰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2000년 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이 정확하다거나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스토아학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감정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5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화를 내는 운전자는 부정확하다. 이 운전자가 부정확한 것은 2 더하기 2가 3이라는 말이 부정확한 것과 같다. 삶이 지금과 다르길 바라는 것은 이성의 지독한 실패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인상에서 동의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식 멈춤(나는 이를 "위대한 멈춤"이라 부른다)이 도움이 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선명한 인상에 빠져들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인상이여, 잠시 기다리게.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해주게. 너를 따져보게 해주게.’"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발가락을 찧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낸다고 해서 나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동의를 거둘 수 있다.이것이야말로 온전히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로렌스는 말 그대로 고통에 마음을쓰지 않았다.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았다.

징징대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이름부터가 와이너다Weiner(징징대는 사람이라는 뜻의 Whiner와 발음이 같다-옮긴이). 투덜거리고 끙끙거리고 불평하고 푸념하고 투정을 부리고 싶다. 하지만 스토아철학의 격언을 떠올리며 꾹 참는다. "훌륭한 사람은 탄식하지도, 한숨을 쉬지도, 불평하지도 않는다."

마르쿠스도 불평불만이 고통을 줄여주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내게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면에서든 불평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때때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6

그로부터 몇 년 후 마이애미에 살 때, 나는 여름인데도 가끔씩 차의 에어컨을 껐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차 안은 점점 더워졌고 땀에 젖은 피부가 폭스바겐의 가죽시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즐겼다. 더위가 어떤 느낌인지를 상기하고, 현대식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에게 변치 않는 깊은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자발적 박탈일까? 그럴 수도. 하지만 나는 이것을 자발적 박탈이 아닌 간헐적 사치라 생각하고 싶다. 예상치 못한 1등석으로의 좌석 업그레이드, 모두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레스토랑에서 돈을 펑펑 쓰는 것, 1주일간의 캠핑 여행에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이 숙소가 아니라 나의 태도다. 게다가 스토아철학은 상황이 언제나 더 악화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세네카는 인생이라는 화살이 어디로 날아갈지를 예상해보라고 말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유배, 고문, 전쟁, 난파 사고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7하라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최소한 스토아철학은 그렇다고 말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는 나이팅게일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 내가 백조라면 백조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토아철학은 "지금 가진 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안다. 욕망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바란다는 뜻 아닌가? 어떻게 이미 가진 것을 욕망할 수 있지? 내가 보기엔 니체가 이 질문에 가장 훌륭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에 체념하지 마라.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지 마라.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욕망하라.

스토아철학은 힘들다. 스토아철학은 쉽지 않으며 쉬운 척하지도 않는다. 그리스의 중용 사상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전부 아니면 전무의 철학이다. 사람은 고결하거나 고결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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