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미국인은 ‘나이스’하단 말을 파프리카처럼 대화 곳곳에 집어넣는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그리고 나쁜 시력이 "그의 얼굴에 마법과도 같은 특별함을 부여해주었는데, 외부에서 받은 느낌을 나타내는 대신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드러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니체는 여러 치료법을 시도해보았고, 다른 면에서는 매우 의심이 많았던 사람치고는 돌팔이에게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갔다.

깊은 밤 한 악마가 찾아와 네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온다. 이 거미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이 순간도, 나 자신도 전부 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끝없이 다시 뒤집힐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 중 하나인 너 자신도!"

니체의 나쁜 시력은 아무도 모르는 축복이었다. 덕분에 니체는 책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니체는 책을 읽지 못할 때 걸었다.

니체는 신학이었던 전공을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문헌학으로 바꾸었다. 그리 대단한 변화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니체에게는 저항의 행동이었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니체만큼 과거의 삶을 멀리 내던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3

니체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니체는 기차를 싫어했다. 난방이 안 되는 객차를 싫어했다. 기차가 흔들리는 것을 싫어했다. 니체는 구토를 많이 했고 하루를 여행하면 3일은 쉬어야 했다.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라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니체는 느낌표를 사랑한다! 가끔은 두세 개씩 붙여 쓰기도 한다!!!

니체의 짧고 간결한 문장은 트위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 다르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철학자는 충격을 준다. 많은 철학자는 논증을 한다. 일부 철학자는 영감을 준다. 오직 니체만이 춤을 춘다. 니체에게 패기와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나는 춤추는 법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미친 것처럼 열렬히, 일말의 자의식도 느끼지 않고 춤을 춘다.

니체는 모든 훌륭한 철학자의 영혼은 춤추는 사람의 영혼과 같다고 말했다.

니체는 "변변찮게 걷는 것보다 서투르게 춤추는 편이 낫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세상을 다른 식으로(그것이 허리를 굽혀서 다리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로처럼 ‘부정확’한 방식일지라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니체는 사랑하는 이에게 거부당하고 독자에게 무시당해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니체는 말한다.편집은 안 돼. 집중 안 하지?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네 삶의 전부를 받아들이거나, 전부 잃거나 둘 중 하나야. 예외는 없어.

영원회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한 학자가 말한 "결혼 테스트"7를 해보는 것이다. 긴 결혼 생활 끝에 막 이혼을 마쳤다고 상상해보라. 지금 아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전 파트너의 청혼에 다시 "네"라고 답할 것인가?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앞으로 더욱더 배우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에게 다시 나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지독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자기 극복 행위다."

"진정한 자신은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그게 어디든 당신이 평소 ‘나’라고 여긴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친구 제니퍼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본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니체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안다. 성공의 모습은 자기 운명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의 모습은 시시포스의 행복이다.9

만약 우리의 삶이(아니, 온 우주가) 실제로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세상이 전과 달라 보인다. 니체 또한 이러한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니체 버전의 영원회귀에는 그런 해피엔딩이 없다. 나는 한 치의 벗어남 없이 똑같은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춤추는 것. 춤춰야 할 이유를 기다리지 말 것. 그냥 춤출 것. 마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내키는 대로 흥겹게 춤을 출 것. 삶이 행복해도 춤을 추고, 삶이 괴로워도 춤을 출 것.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 춤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 것. 아니, 외칠 것.다 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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