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 대답이 그대로 허공에 맴돌게 놔두었다. 사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해리는 다른 사건들에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남겨진 사람이 슬픔과 싸우면서, 슬픈 감정이 마치 회유하고 속여야 할 짜증스럽고 성가신 적인 양 붙잡고 씨름하는 표정. 상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죽은 이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런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분은 똑똑하기도 했어요. 최고의 거짓말은 진실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사라는 해리의 악몽에 나타날 부류가 아니다.

앞서 흥분은 오랜 추적 끝에 사건이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쌓일 때, 범인을 체포하여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거라는 기대가 있을 때, 상황을 변화시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을 때 자주 올라오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감정은 대개 사건을 해결한 후 며칠 혹은 몇 주씩 술병을 붙잡고 살면서 생기는 알코올과 얽힌 우울증이었다.

트룰스는 강력반에서 해리 홀레보다도 인기가 없는 인물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해리는 그가 부러웠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트룰스의 그 능력이 부러웠다. 하긴, 해리도 남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도 없었다. 아니, 경찰의 사명에 대해 현실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모든 책임을 모른 척하는 건 트룰스의 능력이었다.

"잘했어요." 트룰스가 씩 웃었다. "망누스는 멍청이예요."
해리는 그에게 손을 내미는 뜻으로 한 말인지 어떤지 모르고 그냥 대꾸하지 않았다. 더는 무분별하게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해리는 숨을 참았다. 언젠가 숨을 오래 참아서 죽을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건 체내에 산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산화탄소가 많아서 죽는 거라는 내용도 읽었다.

그동안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헤로인과 같다. 한번 맛보면, 행복이란 게 있는 줄 알면 다시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행복은 소박한 만족 이상의 무엇이므로. 행복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행복은 전율하는, 예외적인 상태다. 지속하지 않을 게 분명한, 초, 분, 날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의 슬픔은 나중에, 행복에 이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온다. 행복한 순간에 이미 다시는 이렇게 행복할 수 없고 지금 가진 것이 사라질 거라는 지독한 진실을 통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빼앗기는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미리부터 걱정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그 능력을 저주한다.

라켈은 늘 침대에서 신문을 보았다. 그가 좋아할 기사를 발견하면 읽어주기도 했다. 셸 아스킬센의 단편처럼. 그럴 때 그는 행복했다.

해리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색 바다 같은 보츠 공원에 아직 회백색 눈의 섬들과 작은 대륙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며칠 새 보츠 교도소로 이어진 라임 나무에 움이 트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달쯤 지나면 싹이 나고, 오슬로에는 하룻밤 새 봄의 공습을 받은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무의미할 것이다.

해리는 "하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이 없는 걸 알았다. 그저 본능적인 반대, 자신을 버티려는 저항, 세상이 현실 그대로 흘러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부정일 뿐이었다.

숲 향기. 그녀가 어떤 향수를 쓰든 향기 교향곡의 저변에는 따스한 햇볕이 비추는 노르웨이 숲 향기가 깔려 있었다.

라켈은 어떻게 찍혀도 못 나온 사진이 없었다. 전혀. 단 한 번도 잘못 나온 적이 없다. 젠장.

인적이 드문 묘지에 들어와 보는 이 없는 곳에서 개똥을 그냥 싸지르고 도망치는 개 주인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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