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청소를 대단히 잘하진 않았다. 카일라스는 더러운 것을 없애는 대신 그저 위치만 바꿔놓았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이었고, 알고 보니 변덕스러운 노트북과 프린터를 다루는 귀재였다.

카일라스는 어깨너머로 나와 아내의 말을 들으며 영어를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망했어"와 "당장 나가" 같은 구어를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일라스는 우리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중에 나와 아내가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카일라스도 우리와 함께 갔다. 엄밀히 말하면 카일라스는 여전히 우리의 고용인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카일라스는 우리를 자기 부모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우리가 새로 맡은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분기별로 돈을 송금해주었기 때문에 카일라스는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엔 너무 더운 델리의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다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본 인도인 친구들은 내 노력에 회의적이었다. "너무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은 미국인처럼 생각하는 게 무슨 정신병인 것처럼 말했다. "카일라스는 낮은 계급, 낮은 카스트 출신이에요. 모든 걸 해낼 순 없다고요. 현실을 좀 직면해요."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더 들쑥날쑥한 궤도를 따랐지만, 결말은 영화만큼 행복하다. 지금 카일라스는 허름한 동네에서 중산층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살고 있다. 또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집주인이기도 하다. 2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그 건물의 꼭대기층에서 산다. 1층에는 딸의 이름을 따서 에마라는 이름을 붙인 작은 문구점을 열었다. 그곳에서 공책과 펜, 간디 사진이 있는 지갑을 판다. 카일라스와 나는 더 이상 금전적으로 매여 있지 않다. 우리의 유대는 그보다 더 견고하다.

나는 인도인이 아니다. 금욕적인 사람도 아니다. 비폭력을 실천하긴 하지만 못 그럴 때도 있으며 은은한 수동공격성도 있다. 간디는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나는 그 누구도, 심지어 우리 집 개 파커도 이끌지 못한다. 파커는 더 큰 힘에 복종한다. 바로 음식이다. 사망 당시 간디의 소유물은 작은 숄더백에 다 들어갈 정도였다. 내가 가진 물건을 다 넣으려면 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필요하며, 나는 지금도 쇼핑 중이다. 하지만 간디는 내게 말을 건넸고,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간디는 투사였다. 그는 영국과 싸웠고, 편협한 외국인 및 인도인과 싸웠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싸움은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었다.

자기들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며 자랑하는 부부를 한번 떠올려보자. 그들의 이혼 소식이 들린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만 하면 싸움은 생산적이다. 양쪽이 윈윈하는 해결책에 다다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싸우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해결책에 다다를 수도 있다. 동점으로 끝났지만 경기장이 전보다 더 푸릇푸릇하고 건강해진 축구 경기를 떠올려보라. 간디는 싸움을 필요악이 아닌 필요선으로 보았다. 우리가 잘 싸우기만 한다면 말이다.

미국의 기자이자 전기 작가인 루이스 피셔는 간디의 아시람에서 그를 만났을 때 가슴이 떡 벌어진 탄탄한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2 간디의 "다리는 가늘고 긴 근육질"이었고 실제 키 165센티미터보다 훨씬 커 보였다. 간디는 "매우 남자다웠고 남성의 강철 같은 신체와 의지를 가졌다." 피셔는 썼다.

용기와 남자다움이 없는 남자는 절대로 수동적인 저항자가 될 수 없다."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었다.

나는 투사가 아니다. 나는 물리적 충돌을 회피한다. 내가 해본 유일한 주먹다짐은 열일곱 살 때 볼티모어 교외에 있는 하워드 존슨 호텔 주차장에서 새벽 2시경에 일어났고, 코가 부러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 코였다.

대부분의 사람들,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충돌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충돌이라고 여기며, 가능하면 피한다. 편집자, 가족, 이웃, 나와 함께 지하철에 탄 승객들과의 충돌(예상된 충돌) 역시 피한다. 내가 이런 회피 전략을 언제 어떤 이유로 습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신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신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자신보다 더 나은 버전의 인간을 존경한다. 간디는 신이 아니었다.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열두 살 때 간디는 부모와 형의 돈을 훔쳐 담배를 샀다. 몰래 숨어서 육식을 하기도 했는데(간디가 속한 카스트에서는 육식을 금지한다), 자신처럼 영국인의 육식 식단이 신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던 한 친구와 함께 강가에서 염소 고기를 씹어 먹었다.

간디는 열세 살 때 결혼했다. 그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질투심 때문에 아내 카스투르바를 채찍질하기도 했다. 한번은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아내를 위협하기도 했다. 카스투르바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창피하지도 않아요? 나보고 어디로 가라고요?"

간디는 인도의 아버지였지만 제 자식에게는 형편없는 아버지였다. 정계에서도 간디는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엉망이 된 자신의 정치 캠페인을 "히말라야 산맥처럼 커다란 실수"라 칭했다. 간디가 벌인 실험에 관해 말하자면, 도를 넘은 것들이 있었다. 일흔다섯 살에 간디는 자신의 금욕 서약을 시험해보겠다며 종손녀 마누를 포함한 어린 여성들과 나체로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생각을 바꾸길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괴짜와 변덕쟁이, 미치광이"를 끌어 모아 그들을 전부 수용한 사람이었다. 지독한 수줍음과 자기 회의를 극복하고 한 국가를 이끈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되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대제국과의 기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신이나 성인군자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준 사람이었다.

간디는 영적 잡식동물이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까지 여러 다양한 종교의 별미를 맛보았지만, 결국 간디의 허기를 확실히 채워준 것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였다

"의혹이 나를 덮칠 때, 너무나도 실망스러울 때, 눈앞에 아주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바가바드기타》를 펼치고 나를 위로해줄 시구를 찾는다. 그리고 압도적인 슬픔 한가운데에서 즉시 미소 짓기 시작한다."

필요하다면 그것이 폭력이더라도 자기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기존 해석이다.

간디는 이 책을 다르게 읽었다. 그는 《바가바드기타》가 "오늘날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묘사한 하나의 비유라고 말했다. 진짜 전쟁터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 아르주나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운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기초적인 본능에 굴복하는가,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는가? 간디는 《바가바드기타》가 사실은 비폭력을 향한 찬사라고 생각했다.

"네겐 노력할 권리가 있지만, 반드시 그 노력의 결실을 취할 권리는 없다. 절대로 보상받기 위해 행동에 나서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5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우리는 결과 중심적이다. 헬스 트레이너, 비즈니스 컨설턴트, 의사, 대학, 세탁소, 갱생 프로그램, 영양사, 재정 자문가. 많은 곳에서 결과를 약속한다. 이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결과를 지향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전제에는 그다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과정 중심적인 접근법이 결과 중심적 접근법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간디의 생각조차도 동적이었는데, 기민한 두 눈과 표정이 풍부한 얼굴에서 그 동적인 특성이 잘 드러났다. 간디를 만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반짝이는 거울"이라 말했다. 한 기자가 간디에게 본인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달라고 하자, 간디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학문적 글쓰기와는 잘 안 맞아요. 행동하는 것이 나의 영역입니다."

간디의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처럼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대의명분을 위해 다른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레닌은 자신의 집단 학살 명령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간디는 절대로 비폭력을 하나의 전략으로, "마음대로 걸쳤다 벗었다 하는 옷"으로 여기지 않았다. 비폭력은 하나의 원칙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이다.

우리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에만 퇴짜를 놓을 수 있다. 이 작은 개자식 파커는 내가 볼 수 있게 도와준다.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거나 총에 손을 뻗는다. 너무나도 빤한 반응이다. 간디라면 나의 파커 문제를 힐끗 보고 창의적으로 생각해보라고 충고할 것이다. 실험을 해봐.

대부분의 인도인은 간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카일라스가 내게 말한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진이 들어간 돈을 좋아한다. 그게 다다. "사람들은 간디가 겁쟁이라고 말해요. ‘상대방이 나보다 더 강하면 간디처럼 행동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더 강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해요." 슬프게도 이것은 흔한 오해 중 하나다.

내 생각은 델리의 공기만큼 깨끗하다. 나는 충돌을 피하려고 다른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리고 말없이 뚱하게 있는 것으로 내 불만을 표현한다. 나는 은밀하게, 깨끗하지 못하게 싸운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쟁 중이다. 간디는 수동-공격적이지 않았다. 간디는 공격-수동적이었다. 그의 행동은 겉으로는 공격적이거나 적어도 적극적으로 보였지만, 그 밑에는 그 어떤 적의도 없었다. 오직 사랑뿐이었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돈을 훔치고 담배를 피우고 육식을 한 것을 아버지께 고백하는 편지를 썼던 때를 회상한다. 간디는 손을 덜덜 떨면서 아버지께 쪽지를 건넸다. 아버지 간디는 자세를 바로 하고 쪽지를 읽었고, "진주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를 적셨다." 간디는 말한다. "그 진주알 같은 사랑의 눈물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했고 내 죄를 씻어주었다. 그런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오직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가끔 간디는 화를 폭발시키면서 자기 가슴을 세게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간디는 말년을 향해 가면서 이런 자기 학대에서 벗어났고, 친구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 누구에게도 성질을 내지 말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논쟁이 어쩌면 그저 다른 갈등 상황의 시작일 수도 있다."11 《간디의 방식: 갈등 해결 핸드북》의 저자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말한다. 또한 당신은 "베일을 쓴 폭력"에 기댐으로써 파트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해치게 된다.

반대로, 파트너에게 ‘양보’해서 이탈리아 요리를 먹는 데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내내 뚱한 채로 저녁을 먹는다. 이건 그저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심지어 더 나쁘다. 부정직하고 "깨끗하지 못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무 원칙도 없는 척하느니 자기 원칙을 두고 싸우는 편이 낫다.

다른 요리를 제안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요리. 하지만 그건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며, 그러는 사이 아래에 숨은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간디는 이런 타협을 경계했다. 그는 기브 앤드 테이크에 찬성했지만 그것이 원칙의 문제일 때는 달랐다. 자기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곧 굴복하는 것, "모두 주고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간디는 말했다. 더 나은, 더 창의적인 해결책은 양측이 자신이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간디는 "그저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늘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간디에게는 반대자가 많았지만 적은 없었다. 간디는 사람들에게서 최고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선량함도 보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지금의 모습이 아닌 앞으로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았다.

부드럽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라. 간디가 말했듯, 당신의 목표는 비난이 아니라 변화이므로.

갈등의 양측은 전체 파이가 아닌 진실의 일부만을 지닌다. 파이의 조각을 거래하는 것보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간디가 늘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요구가 많았고, 가끔은 냉혹하기도 했다. "간디와 함께 사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13 한 추종자가 말했다. 나는 그만큼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나는 그럴 거야." 내가 카일라스에게 말한다. "나는 간디와 함께 살 거야."
내 말을 마치 다른 사람의 말처럼 내 귀로 들으면서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가끔 우리는 입으로 직접 말해야만 진실을 깨닫는다

나는 더욱 안락해지려는 노력에 상당한 시간과 돈을 쓴다. 그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에피쿠로스라면 뭐라고 말했을까?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다.

사망했을 때 간디의 소유물은 안경과(식사할 때 사용하는) 나무 그릇, 회중시계, 그리고 "그 어떤 악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일본인 친구가 준 자그마한 자기 원숭이 세 점뿐이었다.

결과는 내가 원한 것과 달랐지만 내 괴로움의 뿌리에 있는 것은 결과가 아닌 나의 욕망이다. 게다가 나는 앞으로도 싸울 일이 많을 것이다. 싸울 일은 언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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