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풍경 1 1920-1940 - 서울에서 한라까지
안창남 외 지음, 이지누 엮음 / 호미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풍경과 추억마저 거듭 진화하였지만 감동은 통한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경성의 하늘! 이 하늘을 날 때 나는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라 하더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도시라 하더라도,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장차 크고 넓게 발전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렇게 만들 사람이 움직이며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일은 결코 한두 차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는 모욕이었으며, 아니면 위험의 의미까지 지닌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본 경성과 인천


이 글은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이 우리의 ‘역사적인 첫 비행의 감회’를 적은 기행문이다. <개벽>(1923.1)에 실린 이 글은, 비행하는 동안의 여정과 감동을 적은 형태로서는 이 글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것이다.

우리나라 첫 비행의 역사적인 금강호(金剛號)는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것을 안창남이 부품을 모아 다시 수리한 것이었다. 이 낡은 비행기는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1922 12.2), 열차를 이용하여 노량진으로 수송한 후 육군항공대비행장(여의도)에서 사흘간 안창남이 조립하였다. 안창남은 동체에는 한반도를, 꼬리에는 금강산을 그려 넣어 역사적인 첫 비행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의 첫 비행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사건으로 민족적 자긍심의 기지개를 켜게 하는 쾌거였다. 첫 비행을 하는 여의도에는 총독부를 비롯한 5만 여명이 모여들어 이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모여 안창남의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울한 그때, 자전거대회에서 일본사람을 따돌리며 연일 승리를 거두던 엄복동이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청년 안창남이 있었다.

이때의 첫 비행은 에어쇼였는데 안창남은 창덕궁 위에서는 왕에게 예를 표하고 있으며 남대문을 감격스러워 하는 등 당시의 서울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전단지를 뿌리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위한 곡예비행을 하였다. 기후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대구를 비롯한 다른 지역을 비행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대목도 보이는데 청년 안창남의 아름다운 마음씨도 유감없이 엿볼 수 있는 이 기행문 한편이 주는 감동이 크다.

…참으로 일본에서 비행할 때마다 기수를 서쪽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며 달려오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 아 경성의 하늘. 어느 때고 내 몸을 따뜻이 안아 줄 내 경성의 하늘! 그립고 그립던 경성의 하늘에 내 몸을 날릴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남대문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대문을 열어 놓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같이 "오오. 경성아!" 하고 소리치고 싶게까지 반가웠습니다. 비행기 위에서 뛰노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하늘에서 본 경성과 인천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소박하나 깊은 감동, 우리 땅 밟기의 제대로 된 여정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고 우리의 풍경이나 정서는 물론 추억까지 바뀌었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바뀌고 진화를 거듭하는 풍경과 정서를 어찌 탓하랴. 우리들은 유년 시절의 순수와 고향을 틈틈이 그리워한다. 이것은 한편 문명의 발전에서 오는 편리함의 산물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순정과 순수’를 송두리째 잃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가장 인간적인 본성 아닐까?

<잃어버린 풍경1-서울에서 한라까지>는 담백하면서 단정한 문체들로 1920년부터 1940년 우리 땅을 솔직하게 밟고 있다. 화려한 수식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적당히 절제된 글들은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든다. 우리들에게 여행은 목적지부터 훑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지만 글을 통하여 이들이 보여주는 여행의 여정은 ‘오직 걸으면서 만나는 인간과 자연’만 보인다. 19편의 글마다 글쓴이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들이 돌이킬 수 없는 당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순정을 잘 말해주고 있어서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간직하고 있는 가치 또한 남다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어쩔 수 없이 잃어버려야만 했던 것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 아닌가?

글 들 중에는 나혜석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 알려진 것도 보인다. ‘해인사 풍광’이란 이 글은 지인으로 지내던 일엽스님을 만나러 간 해인사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나혜석의 필치는 당시의 가야산이나 해인사를 주변으로 한 암자들까지 자세히 기록하였고 당시 스님들의 생활까지 담백하게 적고 있다.

또 한편의 글, 신림의 ‘진관사행’이란 글에 보면 지금의 홍은사 거리인 홍제원을 지나 녹번동, 불광동을 향하는 길에 신림이 느낀 행복감을 생생하게 적고 있다. 그런데 실감나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자연을 찾아 떠나는 그 느낌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근원은 한 가지임을 새삼 느꼈다.

우리들이 자주 만나는 기행문들은 멋진 영상과 맛있는 음식점을 함께 하기 예사다. 반면 우리 근대의 지식인들이 남긴 이 기행문집은 최대한 절제한 느낌이 역력하다.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이런 소박한 글이 언뜻 고루해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글맛은 무엇이며, 매력은 무엇일까. 편안한 감동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당시의 풍경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이 기록적인 기행문들은 사진가 이지누가 ‘개벽’ ‘삼천리’ ‘별건곤’에서 가려 뽑았다. 글마다 이지누의 ‘우리 땅 밟기’에 대한 애정이 잘 녹아 있는 설명글을 볼 수 있다.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제대로 된 여정은 이런 여행인가 싶다. 아름다운 글은 이런 글들이지 싶다. 세월을 건너 쌓인 먼지를 털고 우리 앞에 온 글들이어서 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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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0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책일 듯.
호미 책들이 좋더라고요.
땡스투 누릅니다.^^
 
알이 닭을 낳는다 - 생태학자의 세상보기, 개정증보판
최재천 지음 / 도요새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생태학자의 세상보기, 세상읽기

참새의 수컷과 암컷은 어떻게 구분할까? 앞가슴에 검은 깃털을 가지고 있으면 수컷이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에 의하면 서양 여자들은 털 있는 남자들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참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앞가슴의 검은 깃털이 발달한 수컷일수록 암컷들의 애정도 많이 받으며 그만큼 교미도 빈번하다고 한다.

앞가슴 털이 발달한 수컷일수록 대체로 몸집도 크며 사회적 지위도 높다. 반대로 가슴의 털이 빈약한 수컷은 스스로 움츠리는 것은 물론 암컷들의 무관심과 함께 참새사회에서 소외된다.

'이 앞가슴 털이 과연 어느 정도의 영향일까?' 시애틀의 어느 대학 연구팀이 실험해보았다. 소외되고 있는 수컷참새 앞가슴에 까만 매직으로 가짜 털을 표시하여 참새사회에 보냈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 무적(?)의 참새를 그동안 기세등등하던 참새들이 슬금슬금 피하더니 자리까지 내어 주었다.

그러나 참새들은 일시적으로는 속았지만 금방 실험참새의 허울뿐인 실체를 눈치 채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앞가슴 털과 함께 남성 호르몬 '테스타스테론'을 이 참새에게 주입하였다. 그러자 실험참새는 이번에는 도전해오는 참새들에게 당당하게 맞서 싸웠으며 더 나아가 싸움을 걸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제대로 된 실력이나 기초 없이 일시적으로 갖게 된 거품 같은 힘으로 의기양양하던 실험참새는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알이 닭을 낳는다>의 첫 주제로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나 노력 없이 요행으로 얻은 떳떳하지 못한 '조건과 배경'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충고다. 그리고 실속 없는 거품에 대한 충고라고 할까? 허장성세와 요행으로 얻어진 '어떤 거품'은 결국 거품일 뿐이다.

알이 먼저? 닭이 먼저?

닭이 꼬꼬댁거리며 모이도 쪼아 먹고 짝짓기도 하는 걸 보면 닭이 닭이라는 생명의 주체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린 닭이 알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알이 닭을 낳는 것인지도 모른다. 닭의 눈으로 보지 않고 알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눈으로 보라. 닭은 잠시 이승에 나타났다 달이 차면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지만 태초에서 지금까지 면면히 숨을 이어온 알 속의 DNA야말로 진정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닭이라는 생명에게는 말이다.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보는 생명은 퍽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약간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면 스스로가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곤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알이 닭을 낳는다>는 생태학자의 세상읽기로서 저자의 의도를 잘 말해주는 제목이다. 같은 것일지라도 관점을 어떻게 하여 보는가에 따라 분명 달라진다. 저자는 생태학자답게, 또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생태이야기와 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적절히 접목시켜 강한 설득력으로 새로운 관점을 시도한다. 재미있는 비유와 다양한 생태학적인 소재들이 매끄러운 문체로 쏙쏙 파고든다.

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 20여 컷의 칼라화보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자료로 책 내용 일부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이 화보를 보고 충격을 받아 책을 바짝 끌어당겨 읽게 되었다. 또 이 화보를 통하여 제인 구달을 만났고, 제인 구달을 만나면서 좀 더 넓은 세계로 관심이 뻗어 나갔다. 보노보 원숭이가 성(性)을 이용하여 개인의 이득은 물론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야기도 다소 충격이었다.

보노보 원숭이는 성에 대해 무척 개방적이다. 침팬지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동물들이 번식기에만 성관계를 갖는 반면 보노보는 월경주기 내내 빈번하게 성관계를 갖는다. 보노보 암컷은 일생동안 줄잡아 5500번의 성교를 하며, 그 중 약 3000번을 첫 임신 전에 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그들의 성은 반드시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보노보들은 열매가 잔득 달린 무화과나무를 발견하면 우선 성관계부터 갖는다.

심지어는 서로 잘 모르는 패거리들이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에도 서로 잠자리부터 같이 한다. 암컷들이 성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싸움이나 지나친 경쟁을 줄이는 것이다. 어느 동물에서나 이권을 위해 몸을 허락할 수 있는 것은 암컷뿐이다. '동물들도 몸 로비 한다' 중에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영장류일지라도 번식(임신)을 전제로 짝짓기(교미)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소 충격적이었다.

동물들의 생태이야기는 물론 우리들의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들도 제법 많이 나온다. 동성동본 결혼을 둘러 싼 이야기, 어떤 경우에든 암컷에게 유리한 유전자 이야기, 달거리와 관련된 이야기 등. 아울러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의 다양한 도구 사용 이야기 역시 흔히 많이 알려진 것이 아닌 귀중한 자료들이다.

일일이 나열하지 못할 만큼 60가지 주제의 글들은 재미있으며 귀중한 자료들 또한 많다. 침팬지 사회의 동의보감이란 주제의 글은 야생에서 살아가는 침팬지가 풀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풀 13가지에 대한 관련 글이다. 긴 세월을 두고 어미에서 새끼로 전수되는 '엄마 손은 약손'식의 침팬지 사회의 질병치료가 신기하다.(닭의장풀, 무궁화, 무화과도 이에 든다)

아프리카 남부 사막에 사는 부족인 쿵산족 연구를 하던 리처드 리 박사 일화 또한 마음을 잡아끈다. 연구에 들어가기 전 추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선물을 하였다. 그런데 연구를 위하여 가는 지역의 집집마다 자신이 선물하였던 것과 똑같은 것이 있었다. 자신에게 선물을 받은 추장이 모두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쿵산족은 남보다 하나 더 가지는 것을 수치스러워 한다. 이 겨울에 다시 펼쳐 읽는 쿵산족의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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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5-12-07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컷들이 성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싸움이나 지나친 경쟁을 줄이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충격이네요. 근데.. 성의 무기로 편의를 도모하는 인간들도 많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크게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_-; 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저도 궁금한데요? ㅋㅋ

필터 2005-12-07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그런데 문제는 보노보는 원숭이라는 사실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이용하는 문명을 많이 쓰고 사는 족속이지만 원숭이나 침팬지는 성을 이용하거나 즐긴다는 개념보다 종족번식으로만으로 생각하던 저여서 놀랬었지요...^^
 
세계 챔피언
로알드 달 지음, 정해영 외 옮김 / 강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세계 챔피언>은 로알드 달의 베스트 단편집으로 이야기들마다 소재 자체가 여전히 독특하다. '하하, 이럴 수 있어?' 상상을 뛰어 넘는 소재는 어이없도록 황당무계하고 기묘하지만 유쾌하다. 또 작가가 내세우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몽상가 기질이 농후한 사기꾼들로 이들은 내기에 집착하고 일확천금을 위하여 한결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한건 단단히 거머쥐기 위한 계획의 치밀함이 이렇게 정성스러울 수 있을까? 눈물겹고, 우스꽝스럽다가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방법에 탄복하며 이들이 꿈꾸는 몽상적 사기에 공범이 된다. 해외토픽으로 가끔 보게 되는 은행털이범의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보는 것처럼 유쾌하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끌로드의 개'에 포함된 연작 다섯 편은 '몽상과 사기의 절대고수'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인 끌로드는 '세계 챔피언'에서 땅 부자 빅터 헤이즐이 부자들의 사냥 파티를 위하여 풀어 둔 수많은 꿩을 단 한번에 잡아들일 것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쿵! 쿵!… 백 이십 마리? 맙소사. 어떻게 백 이십 마리의 꿩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잡긴 제대로 잡았나? 재미는 치밀한 계획 과정인데 읽어 보는 것만이 그 맛을 제대로 알게 한다. 그만큼 묘사가 생생하고 치밀하며 뛰어나다.

이 세계 챔피언급 몽상가 사기꾼 끌로드는 경견대회에서는 일확천금을 노린다. 그러나 개를 지성으로 훈련시키는 대신 쌍둥이 개를 훈련(?)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여 결국 원하는 목적을 얻는다? 몽상가 끌로드가 들려주는 개를 빨리 달리도록 하는 방법이나 달리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과 개의 화를 돋는 방법은 쉴 새 없이 웃게 만든다. 이런 방법들이 실제로 쓰이나? 싶을 만큼 로알드 달의 설득력은 대단히 강하다.(피지씨)

몽상과 사기에 관한 한 세계 챔피언인 우리의 끌로드는 이제는 여자 친구에게 청혼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고민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렇다면 직장을 구하는 것이 최선일 텐데 일확천금을 얻기 위하여 개를 키우는데 정성을 쏟는다(호디씨) 그런데 어느 날, 쥐 잡이 사내가 나타나 쥐를 잡기는커녕 쥐를 핑계로 끌로드의 돈을 '쓱~!' 챙기고 사라진다(쥐잡이 사내) 그야말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식인데,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나 펼쳐내는 기발한 방법들은 핑글핑글 웃게 만든다.

다섯 편의 연작 '끌로드의 개'가 꿈꾸는 몽상이라면, 나머지 여섯 편은 다소 환상적인 느낌이다. 나머지 이야기들을 대략 훑어보면.

여성에 대한 혐오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목사가 조신한 로치 양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하는 순간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들고 만다(조지 포지). 비썩 마른 아기에게 로열 젤리를 먹이자 몸무게가 급격히 불면서 벌처럼 변해간다(로열 제리). 소리 잡는 기계를 통하여 장미의 비명소리를 듣는가하면(소리 잡는 기계), 죽은 남편의 뇌가 인공 심장에 의지해 살아나기도 한다('윌리엄과 메리') 그리고 '달리는 폭슬리'는 저자의 성장기를 다룬 이야기다.

이야기 한편 한편은 치밀하게 톱니바퀴처럼 물려 한권의 베스트 단편집을 이룬다. 기발한 몽상과 치밀한 계획은 읽는 내내 공범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마무리 부분은 한결같이 그냥 거품 없이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만다. 이들의 사기와 몽상은 아름다운 현실을 위한 해프닝 일뿐이다. 이들이 꿈꾸는 몽상은 깨지고 사기는 번번이 실패하여 더 재미있다. 이래서 전 세계 독자들을 열광시키는구나 싶을 만큼 맛있게 빠져 들었다.

이 베스트 단편집에서 저자는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한 술수 등을 차근차근 밀도 높게 풀어 독자들을 이야기 듣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연작 '끌로드의 개'의 주인공 끌로드는 작가의 분신이랄 수 있다. 끌로드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내기를 시도하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이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런 끌로드의 깨져버리는 몽상을 이용하여 번번이 성공한다.

이야기의 귀재 로알드 달은 아무나 쉽게 예측 못하는 무서운 상상력, 섬세한 묘사, 타고난 호기심과 설득력으로 소설 내기에서 언제나 독자를 이겨 먹는다. 끌로드가 그렇게 눈물겹도록 치밀하게 계획함에도 번번이 실패하는 것에 비해 작가는 번번이 성공한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 <맛>을 읽은 독자라면 2000년 '세계 책의 날'에서 전 세계 독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독자로 로알드 달을 뽑은 이유를 충분히 알 것이다.

로알드 달은 그야말로 세계 챔피언이다. 그가 독자들을 상대로 꿈꾸는 일확천금은 책을 읽는 독자들마다 그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 베스트 단편집은 사기꾼과 몽상가가 주인공이지만 권선징악도 앞세우지 않고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몽상과 사기에도 세계챔피언이 있다.

단편 하나마다 독특하고 재미있다. 로알드 달의 매력이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감동하는가. 직접 맛보는 수밖에.

"로알드 달은 철두철미한 프로다. 그에게는 허술한 작품이 없다. 모든 작품이 완결되어 있다. 무서운 상상력, 수공으로 짠 비단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묘사, 타고난 호기심과 설득력으로 잘 무장된 소설은 무섭고 섬세하게, 흡반과 같은 마력으로 독자를 잡아끈다. 이십여 년 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손에 쥐었는데도 뜨겁게 쿵쿵대는 작가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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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사랑 2005-12-0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금방도 올리셨네~^^
로알드 달은 읽기는 재미있는데 리뷰 쓰기가 난감하더라고요.
저의 고민을 채워 주셨군요.

필터 2005-12-0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이거 절대로 내세우고 싶은 리뷰 아닙니다...그냥 재미로 읽었으니 그냥 재미로만 읽으라고 서평 썼습니다...^^

2005-12-0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을 피하는 방법 - 권재현 기자의 한잔의 선식
권재현 지음 / 늘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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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을 피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자신을 지켜 줄 무기 하나 없이 넓은 들판이나 숲 속에서 곰을 만났다고 하자. 그것도 그리즐리(북미 회색곰)나 공격적인 흑곰의 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어라고 도망칠 것인가? 납작 엎드려 죽은 척 할 것인가?(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로 만났던 것처럼) 아니면 죽을 때 죽더라도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인가? 미련 곰탱이. 뛰어 도망 가보았자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해. 그러니까 아예 그냥 편안하게 녀석의 먹이가 되어 주는 거야?

<곰의 습격들 : 원인과 대피방법>(헤레로 저)을 보면,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그리즐리를 만나면 우선 나무에 올라가든지, 나무가 없다면 곰과 눈을 마주치거나 등을 보이지 말고 아주 천천히 뒷걸음치면서 시간을 벌라고 한다. 헤레로만이 아니라 거의 많은 책들이 우선 제시하는 방법인데 3000여km의 트레일 종주에 도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부르는 숲>(홍은택 번역)을 쓴 빌 브라이슨은 책에다 이 방법은 한심한 이야기요, 자신이라면 "냅다 뛰겠다"는 것이다.

반면, 나무타기의 명수인 흑곰을 만나면 나무에 올라가보았자 결국 흑곰과 나무 위에서 싸워야 하는 일이 생기니 죽은 척 하라고 하는데 그래보았자 물어뜯기는 것이 결론이란다. 그리고 냄비 같은 것이 있으면 정신없이 두들겨서 소음을 내거나 돌을 던지라고 말한 다음 결론으로 곰을 향해 돌진하라고 헤레로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냄비나 돌을 던져 소란하게 하고 돌진하는 것) 곰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덧붙이기를, 곰을 피하는 방법으로 등산을 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내어 자신이 있음을 미리 알려 곰과 마주친 순간 곰이 당황하지 않게 하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구태여 자신의 존재를 미리 알려 그렇지 않아도 배고파 있는 곰을 끌어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럼 곰을 피하는 방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야? 곰을 이기는 방법은 정말 없다는 말인가?

결론은 변덕이 심한 곰을 피하는 방법이란 없다. 또 현명하게 곰을 피하는 방법을 누가 제시한다 하더라도 곰마다 특성이 모두 다르므로 제각기 특성에 맞추어 대처해야만 그나마 겨우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곰의 기분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곰을 피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들판이든 숲으로든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곰이 무섭다고 등산을 포기할 것인가? 들판에 나서기를 주저 할 것인가? 그렇다면 곰도 비웃고 말 정말 미련 곰탱이 같은 짓이다.

곰(운명)아! 올 테면 와라, 내가 간다. 맞서 싸울 것이다.

기자란 몇 개의 눈을 가져야 하는가?

"처음 기자가 될 때 책과 영화속의 가상인생을 넘어선 짭짤하고 시큼한 삶의 진면목을 몸으로 익힐 거라 믿었습니다. 또한 그런 지식의 전달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삶은 결코 숭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서러운 눈물과 시큼한 땀 냄새 물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바뀌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량이 바뀌고, 공간의 차이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입체고, 중층이고, 다성(多聲)이었습니다."-머리글 중에서

<곰을 피하는 방법>은 권재현이 동아닷컴 기자칼럼에 '권재현의 한 잔의 선식'이란 제목으로 2003년 7월부터 2005년 7월 까지 3년간 연재하였던 글 80여 편중에서 추린 것이다. 권재현 기자의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시각과 관점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오늘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의 어떤 유행이나 문제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비교해보며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들은 자기의 주관에 의해서만 어떤 문제들을 받아들이며 평가하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진실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남도 자기가 옳다는 것에 동의해주길 바라고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믿어 주길 바란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의 사람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진실을 갖게 된다. 이 사람 역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은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진실이라고 믿어 주고 따라 주길 바란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자신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이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오직 하나의 진실로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진실이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진실은 오직 하나뿐일까?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결국 죽는 것, 살다가 죽는 것에는 최소한의 먹이를 필요로 하는 것'이란 절대적인 진실을 빼고 모든 문제들이 오직 하나만의 진실을 가지고 있을까?

곰은 운명이고, 또한 우리들이 받아 들여야만 하는 사회의 많은 이야기들이다. 제각기 다른 곰의 특성이나 마주친 순간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책이나 음악, 영화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문화 등의 시각과 관점을 차분히 정리해주고 있다. '기자란 몇 개의 눈을 가져야 하는가?'에 못지않게 나도 이런 시각을 길러보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렇게 정리하여 보아야겠다는 부러움이 섞인 바람이다. 그야말로 글 읽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읽는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내가 느낀 것은 '기자는 몇 개의 눈을 가져야 하는가?'였다. "기자라면 천개의 눈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많은 눈을 가지고 남이 못 보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하며, 남이 이렇게 보면 다른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기자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란 가급이면 많은 눈을 가지고 많이 보고 편견을 깨뜨린 시각과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들이었다.

기자란 몇 개의 눈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눈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남보다 깨어 있는 것, 앞서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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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풍경 - 이인 그림산문집
이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다. X레이가 심장을 찍어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사진기는 사람의 마음을 찍어 그대로 보여 주었다. 감투나 박사학위 같은 명예가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수 넓은 비싼 집이나, 고급 승용차가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돈다발이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가 찍혀 나오는 여자들이, 여자가 찍혀 나오는 남자들도 있었으며, 바다가 찍혀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기분 좋은 느낌과 함께 아이들에게서는 대부분 로봇, 꽃, 아이스크림 등이 찍혀 나왔다.

<내 가슴 속 램프>(정채봉)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이십여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신랄함이 오랜만에 생각났다.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들도 분명 있는데, 내 마음을 찍으면 무엇이, 어떤 것들이, 어떤 색이 나올까?

무엇이 가장 선명하게 찍혀 나올까? 가장 많은 말을 하게 하는 이유, 돈? 틈틈이 보았던 활자들? 가위가 나올까? 모질게 잘라내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리움을 잘라내라고? 주전자? 아니면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아슴아슴한 얼굴?

..아버지는 중년 이후 글씨 쓰는 것을 업으로 살다 10여 년 전 생을 다하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그 어느 때부터인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글씨와 각(刻)을 하셨다. 늦게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셨고 나또한 어느 자식처럼 아버지를 따랐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글씨와 각'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고도성장을 해가던 1970~1980년대의 먹물 묻은 아버지의 손은 허물어져 가는 자존심일 뿐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버지가 쓰던 붓으로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짓거리를 한다. 즐겁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그에게 가까이 가 있다. 내 아이들 역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모습에서 느꼈던 그것을. 그래서 두렵다.
-'글씨도 아닌 그림도 아닌'


<색색풍경>은 이인의 그림산문집으로 원형의 색감과 불교적인 사유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글에서 밝히는 것처럼 붓을 쥔 아버지는 선망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아버지를 흉내 내고 있었다. 화가란 왠지 가장으로서 모습보다 자신의 세계를 더 내세우는 이기가 날카로울 것만 같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고뇌랄지, 생활인으로서 성찰의 글들이 산문집 곳곳에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원색과 덧칠해짐이, 자꾸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끈다. 자꾸 만날수록 정이 새록새록 드는 사람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산문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원색이나 묵향을 물씬 품은 굵직한 글씨는 사려 깊고 솔직한 사람만 같다. 반복되어지는 덧칠은 사람과 사람간의 부대끼는 것을 피하지 않는, 마음을 툭 터놓은 솔직한 만남 같다고 할까?

조각조각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서 다가와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에 각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 하나씩 넣어보았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에 나를 점찍고 내 마음에도 다시 점을 찍고 선을 그려 넣었다. 나란히 함께 가는 선을 그려 넣었다. 아름다운 동행이다.

화가가 알고 싶었고, <그림산문집-색색풍경>을 몇 번 넘겨보았지만 도무지 눈에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인정받은 빼어난 글 솜씨로 깊은 성찰과 사유에서 얻어진 이야기들을 그림 모퉁이나 그림의 옆에 적어두었건만 나에게 와서는 그림과 접목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그런데 어느 날 외면하고 싶던 조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외면하고 낯선 것들, 그것은 나의 일상 한순간들이었고,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던 나 자신이었으며 내 삶이었다.

화가는 말한다. '그림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림을 보는 것은 '화가의 의도를 빌려 나 자신을 보는 것이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각각 낯설게 존재하는 것들이 한 공간에 따로 걸리고, 혹은 놓여지고, 혹은 쌓이면서 결국 아름다운 공간아 되듯 무수한 조각들이 모여서 내 삶의 조각보를 이룰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강한 색 조각들이다. 지금 내 삶은 어떤 색의 어떤 조각들일까?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한 조각, 내 마음을 찍어보면 어떤 것들이 나올 것이며 어떤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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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5-11-2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되어지는 덧칠은 사람과 사람간의 부대끼는 것을 피하지 않는, 마음을 툭 터놓은 솔직한 만남 같다고 할까? -> 표현이 너무 좋은데요? ^-^ 마지막 구절도 참 와 닿는 것 같아요. 필터님. 예전에 댓글을 남겼다가.. 지웠던 적이 있었요. 보셨나요? 시기가 별로 안좋아서 그 때 글을 남기는 것은 좀 아니다 싶어서요.. ^-^ 정말 좋은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서. 올라오는 리뷰마다 다 저에 마음에 박히네요. 표현력도 너무 좋으신 것 같구요. 인사드립니다.

2005-11-2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