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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추억마저 거듭 진화하였지만 감동은 통한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경성의 하늘! 이 하늘을 날 때 나는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라 하더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도시라 하더라도,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장차 크고 넓게 발전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렇게 만들 사람이 움직이며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일은 결코 한두 차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는 모욕이었으며, 아니면 위험의 의미까지 지닌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본 경성과 인천
이 글은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이 우리의 ‘역사적인 첫 비행의 감회’를 적은 기행문이다. <개벽>(1923.1)에 실린 이 글은, 비행하는 동안의 여정과 감동을 적은 형태로서는 이 글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것이다.
우리나라 첫 비행의 역사적인 금강호(金剛號)는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것을 안창남이 부품을 모아 다시 수리한 것이었다. 이 낡은 비행기는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1922 12.2), 열차를 이용하여 노량진으로 수송한 후 육군항공대비행장(여의도)에서 사흘간 안창남이 조립하였다. 안창남은 동체에는 한반도를, 꼬리에는 금강산을 그려 넣어 역사적인 첫 비행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의 첫 비행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사건으로 민족적 자긍심의 기지개를 켜게 하는 쾌거였다. 첫 비행을 하는 여의도에는 총독부를 비롯한 5만 여명이 모여들어 이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모여 안창남의 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울한 그때, 자전거대회에서 일본사람을 따돌리며 연일 승리를 거두던 엄복동이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청년 안창남이 있었다.
이때의 첫 비행은 에어쇼였는데 안창남은 창덕궁 위에서는 왕에게 예를 표하고 있으며 남대문을 감격스러워 하는 등 당시의 서울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전단지를 뿌리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위한 곡예비행을 하였다. 기후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대구를 비롯한 다른 지역을 비행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대목도 보이는데 청년 안창남의 아름다운 마음씨도 유감없이 엿볼 수 있는 이 기행문 한편이 주는 감동이 크다.
…참으로 일본에서 비행할 때마다 기수를 서쪽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며 달려오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 아 경성의 하늘. 어느 때고 내 몸을 따뜻이 안아 줄 내 경성의 하늘! 그립고 그립던 경성의 하늘에 내 몸을 날릴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남대문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대문을 열어 놓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같이 "오오. 경성아!" 하고 소리치고 싶게까지 반가웠습니다. 비행기 위에서 뛰노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하늘에서 본 경성과 인천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소박하나 깊은 감동, 우리 땅 밟기의 제대로 된 여정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고 우리의 풍경이나 정서는 물론 추억까지 바뀌었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바뀌고 진화를 거듭하는 풍경과 정서를 어찌 탓하랴. 우리들은 유년 시절의 순수와 고향을 틈틈이 그리워한다. 이것은 한편 문명의 발전에서 오는 편리함의 산물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순정과 순수’를 송두리째 잃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가장 인간적인 본성 아닐까?
<잃어버린 풍경1-서울에서 한라까지>는 담백하면서 단정한 문체들로 1920년부터 1940년 우리 땅을 솔직하게 밟고 있다. 화려한 수식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적당히 절제된 글들은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든다. 우리들에게 여행은 목적지부터 훑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지만 글을 통하여 이들이 보여주는 여행의 여정은 ‘오직 걸으면서 만나는 인간과 자연’만 보인다. 19편의 글마다 글쓴이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들이 돌이킬 수 없는 당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순정을 잘 말해주고 있어서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간직하고 있는 가치 또한 남다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어쩔 수 없이 잃어버려야만 했던 것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 아닌가?
글 들 중에는 나혜석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 알려진 것도 보인다. ‘해인사 풍광’이란 이 글은 지인으로 지내던 일엽스님을 만나러 간 해인사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나혜석의 필치는 당시의 가야산이나 해인사를 주변으로 한 암자들까지 자세히 기록하였고 당시 스님들의 생활까지 담백하게 적고 있다.
또 한편의 글, 신림의 ‘진관사행’이란 글에 보면 지금의 홍은사 거리인 홍제원을 지나 녹번동, 불광동을 향하는 길에 신림이 느낀 행복감을 생생하게 적고 있다. 그런데 실감나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자연을 찾아 떠나는 그 느낌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근원은 한 가지임을 새삼 느꼈다.
우리들이 자주 만나는 기행문들은 멋진 영상과 맛있는 음식점을 함께 하기 예사다. 반면 우리 근대의 지식인들이 남긴 이 기행문집은 최대한 절제한 느낌이 역력하다.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이런 소박한 글이 언뜻 고루해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글맛은 무엇이며, 매력은 무엇일까. 편안한 감동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당시의 풍경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이 기록적인 기행문들은 사진가 이지누가 ‘개벽’ ‘삼천리’ ‘별건곤’에서 가려 뽑았다. 글마다 이지누의 ‘우리 땅 밟기’에 대한 애정이 잘 녹아 있는 설명글을 볼 수 있다.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제대로 된 여정은 이런 여행인가 싶다. 아름다운 글은 이런 글들이지 싶다. 세월을 건너 쌓인 먼지를 털고 우리 앞에 온 글들이어서 더 특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