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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 이재호와 함께 천년 침묵의 미(美)를 만나다 걷는 즐거움
이재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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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자. 진흥왕 14년(553) 2월에 대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와, 대궐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다. 공사 17년 만에 담장까지 완성했으며, 진흥왕 25년(574)에 주존불을 만들었고 선덕여왕 15년(645)에 황룡사 탑을 세웠다. 하지만 고려 고종 25년(1238) 겨울에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총 93년이 걸려 이 절을 완성했고 593년간 존재하다 폐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서라벌의 중심 황룡사 편 

1976년에 발굴조사를 시작, 사적 제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는 관광지로도 워낙 유명한 곳인지라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 저마다의 사정으로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분황사, 낙산사, 오어사와 함께 애틋하고 눈물겨운 삼국유사의 현장으로 더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 속 황룡사 이야기는 여러 편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 해당하는 93년 동안 지은 절이니 전해지는 이야기가 오죽 많으랴.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일연 스님이 기록하지 않았으면 나 같은 후세인에게는 절대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정수스님 이야기다. 

이런지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늘 그래왔듯, 삼국유사의 현장만을 답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한겨레 출판 펴냄)을 펼쳐 제일 먼저 읽은 것은 '서라벌의 중심 황룡사'와 '얼어 죽는 아기와 여인 구한 정수 스님'편이다.

1200여 년 전 서라벌. 눈 쌓인 어느 날 황룡사 정수 스님은 탁발을 마치고(어떤 책은 삼랑사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설명) 돌아오는 길에 '천엄사' 문 밖을 지나게 된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한 거지 여인이 어린 아이를 낳고 얼어 죽을 지경이다. 정수 스님은 여인을 끌어안아 몸을 녹인다. 얼마 되지 않아 여인의 숨이 돌아오자 정수 스님은 입고 있던 법복을 모두 벗어 거지여인을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로 황룡사로 달려간다. 오직 한 벌 뿐인 법복을 벗어준 스님은 거적을 덮고 밤을 지냈다던가! 

황룡사 정수스님이 거지여인을 구해준 '정수 스님 구빙녀'는 참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삼국유사 관련 책을 읽을 때면 먼저 찾아 읽고 또 읽는다. 그래도 "그 정겨운 장면에서는 늘 눈물이 흐른다"라는 저자처럼, 몇 번을 읽건 늘 뭉클한 감동이 앞선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거리를 걸으며 잘 알고 있는 사람 떠올리는 양 떠오를 때도 많다.

오래 전 분황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삼국유사를 지금처럼 재미있게 읽지 못했던지라 신라의 유적지 중 하나려니 설핏 구경하고 말았었다. 그러나 다시 가면 희명 보살의 애끓는 모정-향가 '천수대비가'의-의 울음소리에 쉽게 발을 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딸을 데리고 분황사 북벽 관음보살 앞에 이른 희명 보살은 눈먼 딸을 부여잡고 울며불며 눈먼 딸이 세상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향가 '천수대비가'는 이를 노래한 것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오니, 보살의 천개의 눈 중 하나만 덜어 두 눈이 먼 제 딸에게 주어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비를 베푸소서. 둘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만을 덜어 내 딸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소서. 나같은 불쌍한 중생에게 베풀지 않을 자비라면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 그 대자대비가 무슨 소용이리오. 누구를 위해 쓸 천수천안 대자비란 말이오?"-향가 '천수대비가'를 임의로 풀어 씀

지장보살과 함께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눈으로 구석진 곳 중생들의 아픔까지 헤아리고 천개의 손으로 그 아픈 중생들을 보살핀다고 한다. 그래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관세음보살님께 희명 보살은 한편 애원하고 한편 협박하다시피 한다. 나 같은 중생을 외면하는 자비가 어디 진정한 자비란 말인가! 내 딸처럼 불쌍한 사람에게 쓰지 않을 것이면 대체 누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 것인가! 라고 따지면서 말이다.

'정수스님 구빙녀'와 향가 '천수대비가'에는 종교(인)의 바람직한 자세와 역할이 잘 녹아 있다. 때문에 이 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참담한 그 시절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기어코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의도가 짐작되어 가슴 뭉클해지곤 한다.

"스님이 활동했던 13세기, 칼을 든 무인들이 권력을 잡았고, 온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몽골은 고려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얼마나 참담했을까. <삼국유사>의 주무대인 서라벌 장안은 약탈과 방화로 얼룩졌을 것이고, 경주 황룡사도 몇날 며칠 불탔을 것이다. 아마 하늘도 구슬피 울었겠지. 이런 쓰라린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한 일연 스님은 왕조사 중심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단군신화를 맨 처음 등장시켜 <삼국유사>를 써 내려갔다. 사람의 일생은 관 뚜껑을 덮었을 때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스님이 끝맺음을 한 곳에서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다." - 책 속 군위 인각사 편에서

삼국유사는 일연 자신이 머물렀던 곳이나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 기록한 것이다. 이런 삼국유사를 읽으며 우리가 유독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3년이나 조실로 머문 선원사가 있는 강화는 정작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려의 왕이나 귀족들에게 강화도는 몽고의 침략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피신할 수 있었던 '천만다행한 땅'이었을 것이다. 또한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해내기를 염원하며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호국의 땅이기도 했을 것이다.

국난극복의 염원을 담은 팔만대장경은 일연 스님이 조실로 있던 선원사 주관으로 일연 생전에 제작됐다. 게다가 신라 635년에 창건한 보문사나 고구려 372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전등사까지 있고 보면 강화는 불도인 일연 스님 자신에게도 남다른 곳이 될법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팔만대장경에 대한 지극한 발원이나 자부심을 단 한 줄이라도 기록할 법하건만 일연 스님은 끝내 침묵, 팔만대장경이나 강화에 대해 일체 적지 않는다. 때문에 삼국유사에는 강화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연에게 강화는 정권야욕에 눈먼 무인들이 활보하던 땅이요, 몽고군의 말발굽에 백성들을 내어주고 도망쳐 온 왕이 머물던 치욕의 땅에 불과했기 때문 아닐까? 때문에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아닐까?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쳐 온 땅에서 염원하며 제작한 팔만대장경에 깃든 부처님의 자비보다 살육의 현장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해 줄 분황사 관음보살의 자비가 더 많이 필요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위정자나 종교인의 그럴싸한 백 마디 말이나 백성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수많은 정책들보다 자신의 한 벌 옷을 벗어 얼어 죽는 생명을 살리는 정수 스님의 보살행이 전쟁으로 헐벗고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정작 필요한 감로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도를 짐작하면서 읽다 보면 삼국유사는 훨씬 의미심장하게 읽혀진다.

"삼국유사, 끝까지 제대로 읽어 봤어요?"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은 사람 또한 드물다. 역사 전공자들은 원문 한번 독파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있고, 문과 출신들은 원문은커녕 번역한 책이라도 읽지 못했다는 중압감을 안고 있다.…(중략)…삼국유사를 순서대로 쓰지 않고 풀어헤쳐놓고 가능한 한 감동적인 이야기부터 쓰되 계절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황룡사 정수 스님이 얼어 죽는 거지 여인과 아기를 구해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추운 겨울을 기다려야 했다.

…(중략)…돈이 인격이 된 우리 시대, 너도나도 고통스럽다고 난리다. 그러나 몽고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며 나라가 쑥밭이 되어버린 일연 스님의 시대만큼 참담했을까. 우리 모두 가슴에 멍이 들고 마음으로 울지라도 희망의 싹을 기다려 보자. - 저자의 말 중에서


우리들이 한때 신빙성이 떨어지는 설화나 잡스러운 야사 취급을 하여 삼국유사를 뒷전으로 밀어놓았을 때 정작 일본에서는 삼국유사의 가치를 인정하여 활발하게 출판됐다. 그리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삼국유사에 매료됐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들이 오늘날 향가 25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왕조나 귀족들 중심으로 쓰여진 수많은 고전들이 외면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것도 삼국유사 덕분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오늘날 수많은 역사 유적지의 발굴과 복원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은 삼국유사의 현장만을 답사한 책이다.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으로 유명한 기행전문가 저자 이재호는 삼국유사의 현장들을 찾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남긴 것들을 토대로 그곳의 풍경과 역사 등을 오늘날의 가치관과 맞물려 들려준다.

광덕과 엄장을 깨달음으로 이끈 두 남자의 한 아내 이야기, 원효의 부정과 설총의 애끓는 정, 정복왕 진흥왕의 사랑, 진지왕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오어사와 천룡사지, 중생사… 거듭 읽어도 재미있다. 읽을수록 묘미가 있다. 오죽하면 혹자는 "천지귀신도 감동케 한다"라고도 표현할까.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등 삼국지 읽기를 권하는 말들이 회자한다. 이 말에 이끌려 나 역시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읽기 전이다. 삼국유사를 알고 난 이상 삼국유사보다 더한 고전은 없다는 생각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별 볼일 없는 백성들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워낙 유명한 삼국유사이건만 온전히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워낙 방대하여 전문가들까지 온전히 읽어내지 못한 삼국유사를 저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의 가치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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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산행기 - 평일에 산에 가는 나, 나도 정상에 서고 싶다
김서정 지음, 지만 그림 / 부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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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혹의 나이에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몸뿐 아니라 마음도 헤매고 있었다. 어떤 이는 30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40대에 대통령이 되기도 하는데, 나는 내가 일해 온 분야에서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아니 회사에 손해만 잔뜩 끼친 채 물러나야 했기에 그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내 분야에서 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무렵 문득 북한산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운명처럼, 도둑처럼, 연인처럼, 분신처럼, 또 다른 삶처럼 내 안에 북한산이 쓱 비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난생처음 걸은 산성계곡 길

<백수 산행기>(부키 펴냄)의 저자 김서정은 산행보다는 등산로 입구 음식점에서 술 마시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회사 야유회 등으로 산에 따라가 등산로 입구 계곡에 앉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힘들게 위에 가면 뭐가 있냐? 그러지 말고 계곡 식당에 앉아서 닭백숙에 막걸리나 한잔씩 하자고!"

"거봐. 다시 제자리로 올 걸 왜 그렇게 힘들게 갔다 와?"


이러니 동료들 모두 하는 산행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이런 김씨에게 어느 날 북한산이 눈에 들어  온다. 베란다에서도 쉽게 보일만큼 가까이 있던 북한산이건만, 산에 간다는 사람을 뜯어말리는 편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불쑥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백수가 되어 집에서 뒹구는 것도 이젠 지쳐버린,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도 별 신통한 확답을 듣지 못해 스스로 지치고 무료한 김씨는 북한산으로 향한다. 근처 할인마트에서 구입한 가장 싼 등산화와 등산복. 김밥 한 줄과 오이 몇 개가 든 까만 비닐봉지와 생수 한 병이 김씨의 첫 등산 차림이다.

오랫동안 산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깡말랐던 청년기와 달리 살도 많이 쪄서 산행이 쉬울 리 없다. 게다가 몇 달 전에 허리까지 다쳤으니 오죽하랴. 앞에서 누가 오거나 뒤에 누가 오는 것 같으면 지레 주눅이 들어 비켜서기 일쑤다. 작은 바위라도 오르려면 어설픈 자신을 누가 구경하나 싶어 두리번거리는 것이 먼저다.

'살기 위해 살을 빼야하니 죽기 살기로 어쩔 수 없이 산행을? 안됐다!'

이와 같은 동정과 멸시의 눈길을 느끼기도 하면서 산행초보 김씨는 남들이 30분 걸렸다는 길을 2시간 만에 간신히 도착한다. 그런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김씨는 이 어려운 산행에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산에 가려고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며칠 후 김씨는 나 홀로 산행을 한다. 이유는 없다. 누군가와 동행을 할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백수 산행기>는 이처럼 산(행)과는 전혀 상관없던 김씨가 어느 날 북한산을 만나기 시작, 5년이 지난 지금 정반대의 삶을 살기까지의 산행초보 어느 날들을 고백하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산행지침서라고 할까? 아니 산행 초보자의 산행 체험 극복기라는 말이 더 옳겠다. 

최근 몇 년 동안 등산 인구가 참 많이 늘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산행관련 지침서들도 참 많다. 하지만 이런 지침서들이 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책이나 인터넷 정보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산행코스(지도), 가는 방법, 등산 정보 등 표현만 다른 비슷한 정보들이기 일쑤다. 

천편일률적인 이런 정보들은 산행초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백수 김씨처럼, 지난해 가을부터 산행을 시작한 나와 같은 사람들은 등산 지도 보는 것부터 워낙 서툴기 때문이다.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곳으로 가야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기 일쑤, 산에 접근이 쉽지 않으니 이런저런 정보들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김서정의 <백수 산행기>는 5년 전만 해도 산행하는 사람들을 나서서 말리던 저자가 우연히 산행을 시작하고 터득한 것들을 들려주는 것이라 산행 시 참고할 수 있는 살아있는 정보들이 많다. 

때문에 그 어떤 정보들보다 활용도가 훨씬 높을 것 같다. 북한산의 수많은 능선들의 특징과 그 길에서 주의할 것,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길, 산행 때 반드시 필요한 것과 주의할 것, 대중교통편과 산행시작 지점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산행초보인 자신이 그 길을 만날 때의 상황과 극복과정 등 자신의 체험으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신조 때문에 군부대가 들어섰다는 우이령쪽을 보았다. 우이령은  길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길을 우이령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양반들은 주로 '우이령'으로 불렀고, 일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소귀 고개'라고 불렀다. 한때는 북한산을 소귀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삼각산은 양반 계급이 즐겨 썼고, 북한산은 일반 백성이 즐겨 부르던 이름으로, 이 두 이름과 더불어 소귀산도 북한산을 부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혹자는 소귀산이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삼각산을 그냥 쉽게 풀어서 삼각산-세귀산-소귀산으로 부른 것이라고 한다. 삼각산보다는 세귀산이, 세귀산보다는 소귀산이 발음하기 편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물을 부르는 이름도 사는 형편에 따라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도성의 문을 두고도 양반들은 '숭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백성들은 모두 남대문으로 불렀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남쪽에 있는 문이니까 남대문이라 부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책 속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톡톡히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은 그 산에 얽힌 이야기와 지명 유래 등의 상식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성봉이나 상장봉에 얽힌 이야기, 김신조 바위나 동굴, 보현봉이나 문수봉 등의 불교식 북한산 봉우리 등을 또 다른 즐거움으로 만날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실감나게 읽은 이유는 저자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사는 나 역시 저자처럼 북한산을 풍경으로만 바라보다 저자가 5년 전에 그랬듯, 어느 날부터 '나를 살려줄 고마운 은혜'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이미 톡톡한 어려움을 감수하며 올랐던 그 봉우리들을 저자 역시 고생고생하며 오르고 있기에 동병상련까지 느꼈다고 할까?

같은 아파트 사람들이나 산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평일 날 산에나 가는 백수 김씨였던 저자 김서정은 이제는 그때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제 그는 산행을 시작하던 그때보다 20kg 가량 덜어내 훨씬 날렵해진 몸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틈틈이 '북한산 고객만족 모니터링단' 활동 등 북한산을 오르는 또 다른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요즘 같은 경제 불황에 40대 가장의 실직은 엄청난 삶의 시련일 것이다. '실직'이라는 인생의 암흑기에 시작한 산행은 저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거나 새로운 삶을 구상하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때론 재미있게 때론 자조적으로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북한산 산행에 녹여 들려준다. 저자처럼 삶의 암흑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젊은 날의 좌절로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산에만 갔다 오면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는 동안 산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어서였다. 어느 날 나는 북한산 산행기를 체계적으로 쓰고 싶어졌다. 그게 북한산에 대한 예의 같았다. 산행기를 쓰다보니 역시 문제는 길이었다. 얼마만큼 길을 많이 아느냐가 산행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타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전문 등반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 다만 북한산이 있어 참 행복했고, 북한산은 없어지지 않기에  앞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이라는 말만 하련다. 북한산은 내 영원한 친구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북한산과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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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 가는 길 - 하늘과 땅을 함께 배우는 여행길
전용훈 지음, 심보선 사진 / 이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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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 가는 길>(이음 펴냄)을 읽다가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지폐의 뒷면을 새삼스럽게 봤다.지폐 뒷면에 보현산 국립천문대의 구경 1.8m짜리 천체망원경이 혼천의와 함께 도안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우리나라 국립천문대의 주망원경이라 실었으려니' 했었던 그 천체망원경이다.

프랑스 텔라스사를 통해 30억 원에 들여온 이 망원경의 렌즈 구경은 1.8m. 국내 가장 큰 규모로 보현산 정상의 국립천문대(해발 1천124m)에서 영천 시내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 2개를 분리해 볼 수 있을 정도라는 소문이다. 대단한 성능이다. 하지만 이 망원경은 한참 동안 제 구실을 하지 못했었다.

이 망원경이 '첫 빛 받기'를 하고 전 국민들에게 공표한 것은 1994년 7월. 설치 초기부터 대형 망원경의 중요한 부분인 전자부(구동제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에러를 되풀이 했다. 이에 제작사에 여러 차례 문의하여 바로잡아보고 제작사의 기술자까지 여러 번 다녀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에러'는 몇 년 동안 계속됐다. 

결국 망원경을 쓸 사람들, 즉 보현산의 천문학자들이 망원경 수리에 팔을 걷고 나선다. 그들은 망원경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전자부를 자체적으로 새로 구성, 구동 알고리즘을 만들어 제작사의 전자부를 완전히 대체해버린다. 이런 대대적인 수술로 더 이상의 에러는 나지 않아 오늘날 우리의 명실상부한 국립천문대의 주 망원경으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 망원경은 1년 동안 세계 유수의 과학 잡지에 실리는 수십 편이 넘는 논문을 생산한다. 이 망원경으로 지금까지 발견한 새 별은 10개나 된다(첫 별에 보현산, 나머지에는 최무선, 이천 등 한국과학 선각자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성능과 기능이 더욱 보강, 국내외 저명한 천문학자들이나 천문학 전공 학생 등이 사용허락을 받고자 높은 경쟁을 할 정도이다.

저자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별보는 일'이 '별 볼일 없는 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우리의 천문관측 여건 및 대중화'는 선진국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선진국 같으면 망원경을 설치하고 운용하는 팀과 그 망원경을 이용해 연구를 하는 팀이 따로 있지만, 보현산 천문대의 연구원들은 이 둘 다를 모두 할 수 있는 팔방미인이 돼야만 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하고 싶지만 우리의 여건은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단다. 스패너를 들고 나사를 돌리고, 전자장비의 납땜을 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기도 한다.

여름마다 해야만 하는, 1.5톤에서 2톤에 이르는 망원경 주거울 코팅도 연구원들 몫이다. 우리나라 과학 연구의 열악함을 보여주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이런 과학 현실이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처럼 어둡다고 할까. 하지만 <천문대 가는 길>에서 만난 천문학자들의 이와 같은 집념과 열정의 고군분투는 하늘 방향의 지표가 되는 북극성처럼, 혹은 유독 밝은 샛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듯했다.

"이 망원경(소백산 천문대의)이 우리나라 천문학이 자생력을 갖추도록 하는데 제1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대견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소백산의 망원경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살아있는 기기이지만 외국에서는 같은 수준의 망원경 중 현재 제 구실을 하는 망원경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망원경은 아직도 1년에 SCI급 세계 유수 학술지에 실리는 5~6편의 논문을 생산하고 국내 전문잡지에 실리는 논문까지 약 15~16편의 논문을 생산하고 있다. 동급의 망원경으로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소백산 망원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변광성 연구를 '한국식 연구'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특장 분야로 인정한다고 한다. - 소백산 천문대 편에서

우리의 어려운 천문관측 현실에 보현산 국립천문대와 더불어 천문관측의 듬직한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곳은 소백산 천문대. 우리의 천문관측 첫발이 시작된 곳으로 렌즈구경 61cm 반사 망원경이 주망원경이다.

소백산에 국립천문대가 설치된 것은 1974년 7월, 이 망원경은 그해 12월에 도입되었다. 서울대학교에 천문기상학을 개설(1958)한지 16년만의 일이다. 근대 천문학이 망원경을 사용한 연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열악한 출발이다. 첨성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수많은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후손으로서 너무 때늦은 감이 있는 부끄러운 출발이다.

그런데도 국제천문연맹(IAU)이 '짧은 기간에 이룩한 대단한 천문관측의 성과'라고 평가할 만큼의 우수한 천문관측 연구 성과들을 어떻게 내고 있는가. 이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애리조나 주 레몬산 천문대에 홀로 서 있는 소백산 천문대의 쌍둥이 망원경 덕분이다.

이 망원경은 우리나라 대덕천문과학원 연구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원격제어 컨트롤, 관측 돔을 열고 소백산 천문대가 쉬는 시간의 천체를 관측한다. 레몬산 망원경이 이렇게 관측한 결과를 대덕천문과학원 컴퓨터에 보내오면 소백산에 전송, 천문학자들이 받아 연구를 한다. 우리와 밤낮이 정반대인 미국의 자연조건을 적극 활용, 그 효과를 극대화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구경 61cm급의 망원경이 우리나라 대표 망원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왜 우리나라에는 구경 5m, 10m급의 대형 망원경이 없느냐고 묻는다. 사실은 한국과 같은 계절풍 기후대에 속한 지역에서는 소백산 망원경보다 큰 망원경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더 큰 망원경이 있다고 해도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다. 망원경이 크면 관측에 유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 망원경이 놓인 곳의 기상조건을 거의 고려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국내의 기상 조건에서 소백산 망원경이나 보현산 천문대의 구경 1.8m 망원경보다 더 큰 망원경은 그 쓸모가 크지 않다. - 책속에서

우리의 대표 망원경은 보현산 국립천문대의 1.8m 망원경과 소백산 천문대의 61cm 쌍둥이 망원경. 가까운 일본의 8.4m. 남아프리카에 설치 된 구경 11m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이 망원경들은 부족한 비용과 우리의 실제 관측일 수(170~190일 가량)를 고려한 천문학자들의 적극적인 아이디어로 세계 선진국들의 규모 큰 망원경들과 당당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천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국내 30여 군데의 천문대 중 천문대 여행을 일부 전문가들이나 천문관측에 뜻을 둔 사람들이나 꿈꾸는 것쯤으로 어려워하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전국 각지의 천문대 10곳을 선정, 천문관측과 관련된 별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천문대가 주최하는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나 축제 등의 프로그램들도 자세히 소개한다. 역사까지 전공한 저자는 '천문대 가는 길'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천문대 가는 길에 인접한 고장의 역사의 현장과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 들려주는 이야기들 또한 간결하면서도 정서적이라 책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별이 쏟아지는 마루'를 뜻하는 '별마로 천문대'가 있는 영월에서는 김삿갓이 묻힌 곳과 단종의 슬픔을 대신 울어준 소나무 앞에서 김삿갓과 단종의 비애를 만난다. '금구원 조각공원 천문대' 가는 길에는 만권의 책을 켜켜이 쌓은 형상인 채석강과 유서 깊은 내소사가 있다. 김해 천문대 가는 길에 만나는 허황옥과 쌍어문의 비밀도 반갑다.

경기도 양주 '송암스타스밸리'는 국내 내로라하는 한 기업가가 차곡차곡 돈이 쌓인 말년에야 돈의 제대로 된 쓰임새를 깨달아 조성한 곳으로 한때 조각공원으로 유명했던 장흥에 있다. 김해 천문대의 학생들과 연계한, 시민을 찾아가는 천문관측 프로그램도, 대전시민천문대의 별 음악회에 거는 기대도 크다. 서귀포 천문과학문화관 가는 길에 들려주는 조선시대 노인성 관측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책에는 저명한 과학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신기한 천문관측 사진들이 많다. 그 사진들을 찍은 사람은 아마추어 천문가인 고 박승철씨. '한국 근대 천문사에 신기루 같은 존재인 그의 이야기와 함께 책 전반에 실린 그의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탐내는 사람들이 있을 법'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그의 이야기와 사진들도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본문도 좋고 부록까지 좋은 책들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야기마다 뒤편에 별도의 부록을 실었는데, 별자리 여행을 위한 관측 장비와 사용법부터 북극성으로 하늘 찾기, 별똥별 헤아리기, 밤하늘의 별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별지도, 사계절 별자리, 탄생 별자리들의 재밌는 점성술 이야기 등, 이 부록들 참 마음에 든다. 천문대를 향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밤하늘 보기에 도움 될 그런 부록들이다.

1995년 봄에 이 책 두 번째 주인공으로 개인 천문대 1호인 금구원 조각공원 천문대에 간적이 있다. 조각공원의 조각품들을 만난 우리는 천문대 관측 돔 앞에서 몇 번 망설이다가 스스로 쭈뼛해져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거대 망원경으로 별을 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호기심은 많았지만 전문가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란 선입견에 위축되어 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선뜻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천문대 가는 길>은 천문대 여행서로는 국내 첫 책이다. 책의 맛을 최대한 살리고자 저자와 출판사 편집자, 사진가가 동행하여 쓰고 만든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이 좀 더 일찍 나왔다면 눈앞의 천문대에서 발길을 돌린 후 오랜 세월 후회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박차고 천문대 가는 길에 나섰으면 한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길가에서 강물과 들꽃과 나무와 절터와 석탑들을 함께 돌아보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바람이 나의 소망이 되고 있다.

망원경 하나 사서, 올 여름 들어 부쩍 "저건 내별!"이라며 밤하늘을 자주 보는 사춘기 딸아이와 함께 밤하늘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유년기에 자주 보던, 나이를 먹으며 잃어버린 별똥별을 볼 수 있을까.

저자에 의하면 "달빛이 없는 캄캄한 밤이라면 별똥별을 잘 볼 수 있다. 맑은 밤하늘을 10~20분 정도만 바라보면 한두 개의 별똥별은 꼭 볼 수 있다. 맑은 밤하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똥별은 매일 지구에 2500만 개나 떨어진다. 하루 동안 지구에 떨어지는 별똥별의 총량은 약 100톤이나 된다고 한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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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의 향기, 나무 - 나무 칼럼리스트 고규홍의
고규홍 지음 / 들녘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2006년 4월 4일 천연 기념물(천연기념물 제470호)로 지정된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이다. 이 나무는 높이 약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 4.68m로, 물푸레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크고 아름답게 자랐다.

물푸레나무는 크게 자라는 활엽수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화성 전곡리의 나무처럼 아름답고 크게 자라기란 힘들다.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나 생활 용품 등을 만드는데 워낙 유용하게 쓰여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한다. 때문에 노거수로 자랄 수 있는 세월이 모자란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 전에 유일했던 천연기념물 물푸레나무는 파주 적성면의 수령 150년짜리. 이보다 훨씬 크게 자란 나무가 화성의 물푸레나무다.

화성 전곡리의 이 물푸레나무는 6.25이전까지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무에 의지하여 가뭄이 들면 단비를 기다리며 기우제를 지냈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당굿)를 지냈다. 뭇사람들의 억울한 하소연인들 듣지 않았으랴.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사람들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무가 영영 묻힐 뻔했다. 이런 나무를 일아 본 사람은 고규홍씨. 어떤 단체가 아닌 개인이 신청하여 천연기념물이 된 유일무이한 경우다.

<옛집의 향기, 나무>는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게 한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의 신간이다. <이 땅의 큰 나무>, <절집나무>, <알면서도 모르는 나무 이야기>로 이미 국내 노거수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걸로 인정받은 저자가 사람들의 사연을 품고 있는 노거수 23그루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시조작가로 시조의 현대적 부활을 위한 신운동과 고전 발굴 연구에 힘썼던 국문학자 이병기.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한 청소년 교육에 힘쓰다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투옥(1942년)되었던 가람 이병기.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선생의 생가 앞마당에는 탱자나무 한그루가 정원수로 꼿꼿하게 서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얼을 지키기 위해 타향 멀리에서 생활해야 했던 선생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선생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지켜보았을 저 한그루의 탱자나무. 이 집의 탱자나무만큼 곧게 서 있는 탱자나무를 아직 본적이 없다. 결코 곧게 자라는 나무가 아닌데, 어쩌면 이렇게 올곧게 자랐을까? 나무도 키우는 사람의 색깔과 분위기를 따르는 것일까. 갖은 협박과 압제에도 굴하지 않았던 선생의 이미지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 오래된 옛집에서 겉은 사뭇 온유해 보이지만 서릿발 같은 가시를 세운 아주 특별한 탱자나무 한그루를 만난다.-이병기 생가의 노거수 탱자나무 편에서.

워낙 크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가지가 서로 엉켜들면서 자라다 보니 울타리로는 그야말로 적격인 나무가 탱자나무다. 오죽하면 적의 침입을 막고자 성의 울타리로 심었을까. 인천 강화도에 가면 성의 울타리로 심어진 탱자나무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염집의 울타리로 즐겨 심던 탱자나무, 과수원 울타리로 즐겨 심던 탱자나무, 시골 학교 울타리로 심어지던 나무, 어쨌거나 탱자나무는 울타리로 기억되는 나무다. 하지만 선생의 생가 탱자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우뚝, 당당하게 서 있는 조경수다.

선생의 조부가 심었다는 이 나무는 200살가량으로, 현재 전북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탱자나무가 제일 길게 자라는 높이는 3m가량, 하지만 이 나무는 현재 5m에 줄기 둘레만 60cm라니 놀랍다. 주인의 꼿꼿함을 먹고 자란 나무라 이처럼 꼿꼿한 걸까?

옛사람의 사연을 간직한 나무는 이것만이 아니다. 대구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굉필을 그리워하는 어떤 이가 심은 것이다.

도동 서원의 상징목인 이 나무의 수령은 400년가량. 김굉필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며 마음 달랬을 나무요, 역적의 자손으로 앞날이 막힌 후손들의 몰락을 아프게 바라보았을 나무다.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 한 나무, 그 가지 하나가 땅을 기듯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어찌나 크던지, 30년 전에 가지 하나가 부러졌는데 부러진 그 가지하나가 8톤 트럭 하나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으로, 문화재 지정을 할 거라는 '예천 삼강리 주막'에는 한그루 회화나무가 쓸쓸하게 서 있다. 예로부터 선비집안의 이삿짐에 반드시 챙겼다는 학자수인 이 나무는 양반가 사랑채에나, 서원 혹은 누각에나 어울릴까 주막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강변 가 주막에는 버드나무나 어울릴 듯하지만, 버드나무 대신 서 있는 것은 한 그루 회화나무. 2005년 10월 초하룻날에 죽은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를 회상하는 듯 서 있는 이 나무가 있는 주막은 예전에는 낙동강을 나룻배로 건너 온 사람들이 반드시 머무르던 곳이다. 그러니 이 나무는 수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으랴.

이 회화나무뿐일까? 나주 쌍계정의 푸조나무, 봉화 청암정의 왕버들, 담양 면암정의 굴참나무, 화순 물염정의 벚나무, 정선 고학규 가옥의 뽕나무, 예안 향교의 무궁화 등 전국 옛집에서 사연 특별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을 나무 23그루가 책 속에 등장한다.

모 일간지 12년 기자 생활을 접고 10년 동안 나무만 쫓아 매해 5만 킬로를 작정하고 다니는 저자가 어떤 날은 수백리 길을 갔음에도 나무가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아 되돌아 온 사연이 있거나, 이미 본 나무이건만 님 보듯 그리워서 설렌 마음으로 찾았던 나무 등이다.

나무를 좋아하는 터라, 정확히 말하면 잎이 돋기 전의 나뭇가지들을 좋아하여 삶의 위안을 그들로부터 어지간히 받기도 하는 터라, 나무 이야기나 실컷 들어 보자고 선택한 책이었다. 특별한 나무들을 덕분에 어지간히 만났다.

무엇보다 각별하게 얻은 것이란, 나무는 저를 아껴주는 사람의 마음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아주는 사람을 거울삼아 그 모습을 닮아 자란다는 것이다. 또한, 나무 한그루를 통하여 만나는 역사나 옛집의 향기, 옛사람들의 고단한 세월을 만나 봄도 자못 남달랐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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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가 파헤친 조선왕릉의 비밀 2 - 여기자가 파헤친
한성희 지음 / 솔지미디어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도대체 유적지인 능 근처마다 왜 갈비집이 저렇게 많지?"

"조선시대에는 농경사회라서 소를 중요시 여겼고 국가에서 관리했기때문에 함부로 소를 잡을 수 없었고 백성들이 평소에 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웠지. 그렇지만 왕릉은 제례를 위해 소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었고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곳이었어. 고기는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왕릉 제사 덕분에 능 근처에서 소갈비 요리가 발달됐고 지금까지 이어진 거라구"-책속에서


홍릉갈비, 태릉갈비...갈비 집 간판 중에는 왜 능 이름이 많이 들어갔을까? 오래전부터 무척 궁금하던 것인데 뜻밖에 이 책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선사시대부터 농업을 중시해 온 우리에게 소는 무척 중요한 일꾼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경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쟁기질하는 소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소의 가치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땅이 없어도 소 한 마리 있으면 소 쟁기 품을 팔아먹고 살수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개인재산이지만 소는 함부로 팔 수 없었고 처분할 때도 관청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자연 소고기는 귀할 수 밖에!


그러나 일반 백성이 소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때가 있었다. 능제, 즉 왕릉제사가 있을 때였다. 능제에는 소를 잡았고 이때 고기를 몰려 든 백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살코기를 발라내고 남은 뼈로 국물을 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곰탕의 시작이다.


고기를 먹어 본 놈이 고기 맛을 안다고 이후 고기를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자 고기 맛을 비교적 쉽게 맛볼 수 있는 왕릉 주변에서 다양한 고기요리가 생겨난다. 포천의 이동갈비의 내력은 모르겠는데 홍릉갈비나 태릉갈비, 수원갈비는 이렇게 생겨났다. 모두 조선의 왕릉이 많은 곳들이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다. 앞으로 아이들과 갈비를 먹으러 갈 때마다 왕릉 이야기 하나씩은 해주어야겠다.


왕릉과 우리 역사, 어떻게 알아가면 될까?


왕릉은 왕과 왕비가 묻힌 무덤이다. 왕실 무덤이라 가장 많은 정성을 기울이다보니 당시의 뛰어난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왕릉을 조성했다. 또한 내세와 발복사상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조형물을 넣어 조성. 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왕릉에는 조성될 당시의 역사, 풍습, 가치관, 건축학 등 당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 많다. 우리가 역사를 알기 위해 왕릉을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왕릉. 어떻게 알아 가면 좋을 까? 우선 왕릉의 이름을 해석해보는 것이다. 왕릉의 이름만 보아도 왕릉 주인의 살아생전의 삶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온릉과 사릉을 보자.


온릉은 단경왕후의 무덤.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는 연산군과는 처남매부간이다. 단경왕후는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지만 왕비의 고모가 연산군의 부인이기 때문에 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한지 7일 만에 폐위된다. 왕비는 죽는 날까지 남편 중종을 그리워하며 눈물 적셨다고 한다. 때문에 왕비가 죽자 ‘따뜻하다’는 뜻의 ‘온’을 넣어 '온릉'이라 이름 붙였다.


사릉은 정순왕후의 무덤. 정순왕후는 단종비. 삼촌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죽은 단종의 무덤을 향하여 평생을 시름에 젖어 살았다고. 그래서 ‘생각하다’는 뜻의 ‘사’를 넣어 ‘사릉’이라 이름 붙였다. 이렇게 왕릉이름을 따라 역사를 알아 가다보면 '역사는 딱딱하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역사가 한결 부드럽고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성이다. 현직 기자이면서 문화재 해설가이기도. 글은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묻어난다. 또한 현장 해설을 담고 있어서 왕릉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서 그간 딱딱하고 어렵게 여기던 역사와 한층 가까워 질 수 있다.


역사에 관한 책은 왠지 어렵고 딱딱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역사관련 저자들이 남자들이다보니 여자 독자들에게는 다소 딱딱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또한 남자들만의 시각에 의한 역사관련 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 책이 알려주는 역사에 대한 친근함은 더 강하다.


저자는 왕릉이 왜 중요한지, 왕릉 조성과정부터 왕릉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역사에 친근함을 느끼도록 이끌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역사를 알아야만 하는 간절한 이유와 만나게도 된다.

 

참, 그간 왕릉 관련 책은 풍수학적인 시각으로 아주 조금 언급한 책만 있었고 이 책처럼 왕릉만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없었다. 이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장감이 생생한 사진까지 풍성하게 만날 수 있어 ‘읽는 맛, 보는 맛, 알아가는 맛. 새기는 맛’이 남다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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