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개 속의 고릴라
다이앤 포시 지음, 최재천.남현영 옮김 / 승산 / 2007년 8월
평점 :
"…사진 속의 코코와 퍼커는 가까스로 우리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이 책(안개속의 고릴라)을 쓰고 있는 1978년 나는 코코와 퍼커가 서로 한 달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책속에서
'코코'와 '퍼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둘은 인간에 의해 각각 십여 마리의 가족들이 몰살당한 야생의 고아들로, 독일의 퀼른 동물원에 보내졌었고 서로 의지하다가 한 마리가 죽자 남은 한 마리는 더 이상 살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아프리카 열대 우림에서 고릴라들과 생활하는 다이앤 포시(dian fossey,1932~1985.12.26)에게 어느 날 르완다 국립공원 관리소장이 찾아와 동물원에 보낼 새끼 고릴라 한 마리를 잡아 줄 것을 부탁한다. 고릴라 한 마리에 대한 대가로 독일의 퀼른시 공무원이 약속한 것은 랜드로버 1대와 금일봉.
고릴라의 가족 관계는 인간처럼 끈끈하기 때문에 새끼 1마리를 지키기 위해 집단의 고릴라들이 죽을 때까지 저항하고, 잡힌 새끼 고릴라도 결국 삶을 포기하고 만다는 사실까지 설명하지만, 야생의 동물들을 보호해야 하는 국립공원 소장에게마저 고릴라는 경제적 수단으로 유통이 가능한 상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그들이 새끼를 살리고자 저항하는 어른 고릴라들과 새끼가 속한 집단의 고릴라 10여 마리를 모두 몰살한 후 잡은 것이 코코였고, 마음의 상처로 삶을 포기하여 다 죽어가는 코코를 대신하기 위해 잡은 새끼 고릴라가 퍼커였던 것. 퍼커의 부모와 집단도 코코의 경우처럼 인간에게 몰살당했다.
퍼커 또한 가족을 잃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포시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코코처럼 죽음을 선택한 상태였다. 몇 주 간격으로 포시의 캠프에 온, 같은 아픔을 가진 어린 두 고릴라(포시에 따르면 3~4살)는 죽음 직전 서로에게 의지하여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지만, 야생으로 돌려보내려는 포시의 주장과 달리 동물원에 보내진 이 둘은 결국 죽고 만다.
"코코는 몇 분간 내 무릎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창문 아래에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가 비소케 산의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꽤 힘들게 의자 위로 올라가 창문 건너편의 산비탈을 응시했다. 코코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고릴라가 그렇게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코코는 수풀로 만들어 준 잠자리로 돌아갔다." - 책속에서
코코와 파커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숲속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잠결에 흐느끼는 등의 이야기를 읽으며 유괴당한 아이들의 불안과 아픔을 보았다면 지나칠까? 인간들의 비뚤어진 욕심 때문에 가족과 집단이 몰살당해 시시때때로 훌쩍이고 가족들과의 소중한 시간들을 회상하는 어린 고릴라 코코와 파커의 이야기는 참으로 마음 아팠다.
인류학자 다이앤 포시가 죽음과 바꾼 고릴라의 안전
<안개속의 고릴라>는 침팬지를 연구한 '제인 구달', 오랑우탄의 어머니 '비루테 갈디카스'와 함께 '유인원 3대 여성 연구가'로 잘 알려진 '다이앤 포시'가 1966년부터 15년간 아프리카 열대 우림에서 고릴라들과 생활하며 관찰·연구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이 1983년에 출판되자 세계의 이목은 다이앤 포시와 고릴라들에게 쏟아졌다.
제인 구달과 비루테 갈디카스, 다이앤 포시는 거의 같은 시기에 영장류인 침팬지와 오랑우탄, 고릴라들과 함께 살면서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것들을 세계인들에게 알려 이들의 보호를 호소했다. 다이앤 포시의 이 책은 당시 밀렵으로 개체수가 250마리밖에 안 남은 고릴라 보호에 세계인들이 관심을 두게 하였다.
반 밀렵단체를 조직하여 밀렵꾼들이 설치한 덫 등을 제거하거나 그들의 밀렵을 방해하던 그녀가 고릴라 보호를 위한 전사가 된 것은, 그녀가 특별한 친밀감을 가졌던 수컷 고릴라 디지트가 밀렵꾼들에게 희생되면서부터다. 그녀는 디지트 기금을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고릴라 보호에 더욱 적극적으로 앞장서게 된다.
하지만 <안개속의 고릴라>를 출판한 3년 후에 얼굴이 난자당한 채 살해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죽음, 누가 왜 죽였을까?
다이앤 포시가 숲에 머물기 전에 수많은 고릴라들은 영양 등 다른 동물들과 함께 밀렵되었다. 코코나 파커처럼 우리 속에 가두고 돈을 벌거나 구경하기 위하여, 손가락이나 팔 등을 잘라 기념품으로 팔기 위하여, 고릴라를 잡아 끓여 먹으면 고릴라처럼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일종의 미신 등으로 인해 영장류인 고릴라들은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방해와 간섭으로 밀렵이 힘들어지면서 밀렵꾼들은 여러 차례 살해를 계획한다. 흑마술인 '수무'라는 것으로 불안감을 조성하여 그녀와 함께 덫을 제거하러 다니는 원주민들이 두려움으로 더 이상 자신들의 뒤를 쫒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일꾼으로 가장하여 캠프에서 일하겠다고 찾아와 포시의 머리빗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모아 저주 인형을 만들어 화형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포시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지키고자 했던 고릴라들의 안전과 보호는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다이앤 포시가 죽은 지 3년, 그녀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진 1988년 르완다 발행 1000 세파 프랑에 그녀가 15년간 함께 생활하였던 산악 고릴라를 도안으로 넣어 세계인들에게 보호를 호소하고 있다.
안개 속으로 영영 사라질 뻔했던 인간의 친척인 고릴라들은 다행스럽게 지금 우리와 함께 지구 한편에서 살아가고 있다. 밀렵은 그나마 조금 줄어들었다지만 개발로 이들이 살아갈 땅도 많이 줄어 든 상태다. 안개 속에 있는 고릴라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책은 모두 12부. 베토벤이 이끄는 제5집단을 비롯한 제8집단, 넌키 집단 등, 은색등(우두머리) 고릴라를 중심으로 10~20 마리에 이르는 각 고릴라 그룹의 사랑과 탄생, 일상과 죽음이 세세하게 소개된다. 문장 일부만 바꾸면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여길 만큼 인간과 유사한 고릴라들의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번번이 혼나고, 동생에게 양보하면서 속상해하는 누나의 이야기는 왠지 낯익다. 새끼를 잃고 달관한 듯 위장된 수다를 떠는 암컷 고릴라도 우리들의 모습을 닮았다. 목적을 위해 투정부리는 꼬마 고릴라에게선 고집쟁이를 보았다.
<안개속의 고릴라>를 읽기 전까지 사실 고릴라는 단지 한 종류의 동물에 불과하였다. 영장류라고 하나 동물원에서 원숭이나 침팬지와 함께 볼 수 있는 동물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만 생각해 온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다이앤 포시를 통하여 만난 고릴라들의 감정은 우리들과 많은 부분이 같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훨씬 오래전, 지금처럼 진화하지 못한 먼 옛날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음을 덧붙이고 싶다. 살해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멸종 위기에 처한 고릴라 보호에 앞장섰던 다이앤 포시의 마지막 일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과거 속에서 살기 보다는 미래를 지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