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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챔피언
로알드 달 지음, 정해영 외 옮김 / 강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세계 챔피언>은 로알드 달의 베스트 단편집으로 이야기들마다 소재 자체가 여전히 독특하다. '하하, 이럴 수 있어?' 상상을 뛰어 넘는 소재는 어이없도록 황당무계하고 기묘하지만 유쾌하다. 또 작가가 내세우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몽상가 기질이 농후한 사기꾼들로 이들은 내기에 집착하고 일확천금을 위하여 한결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한건 단단히 거머쥐기 위한 계획의 치밀함이 이렇게 정성스러울 수 있을까? 눈물겹고, 우스꽝스럽다가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방법에 탄복하며 이들이 꿈꾸는 몽상적 사기에 공범이 된다. 해외토픽으로 가끔 보게 되는 은행털이범의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보는 것처럼 유쾌하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끌로드의 개'에 포함된 연작 다섯 편은 '몽상과 사기의 절대고수'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인 끌로드는 '세계 챔피언'에서 땅 부자 빅터 헤이즐이 부자들의 사냥 파티를 위하여 풀어 둔 수많은 꿩을 단 한번에 잡아들일 것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쿵! 쿵!… 백 이십 마리? 맙소사. 어떻게 백 이십 마리의 꿩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잡긴 제대로 잡았나? 재미는 치밀한 계획 과정인데 읽어 보는 것만이 그 맛을 제대로 알게 한다. 그만큼 묘사가 생생하고 치밀하며 뛰어나다.
이 세계 챔피언급 몽상가 사기꾼 끌로드는 경견대회에서는 일확천금을 노린다. 그러나 개를 지성으로 훈련시키는 대신 쌍둥이 개를 훈련(?)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여 결국 원하는 목적을 얻는다? 몽상가 끌로드가 들려주는 개를 빨리 달리도록 하는 방법이나 달리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과 개의 화를 돋는 방법은 쉴 새 없이 웃게 만든다. 이런 방법들이 실제로 쓰이나? 싶을 만큼 로알드 달의 설득력은 대단히 강하다.(피지씨)
몽상과 사기에 관한 한 세계 챔피언인 우리의 끌로드는 이제는 여자 친구에게 청혼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고민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렇다면 직장을 구하는 것이 최선일 텐데 일확천금을 얻기 위하여 개를 키우는데 정성을 쏟는다(호디씨) 그런데 어느 날, 쥐 잡이 사내가 나타나 쥐를 잡기는커녕 쥐를 핑계로 끌로드의 돈을 '쓱~!' 챙기고 사라진다(쥐잡이 사내) 그야말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식인데,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나 펼쳐내는 기발한 방법들은 핑글핑글 웃게 만든다.
다섯 편의 연작 '끌로드의 개'가 꿈꾸는 몽상이라면, 나머지 여섯 편은 다소 환상적인 느낌이다. 나머지 이야기들을 대략 훑어보면.
여성에 대한 혐오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목사가 조신한 로치 양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하는 순간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들고 만다(조지 포지). 비썩 마른 아기에게 로열 젤리를 먹이자 몸무게가 급격히 불면서 벌처럼 변해간다(로열 제리). 소리 잡는 기계를 통하여 장미의 비명소리를 듣는가하면(소리 잡는 기계), 죽은 남편의 뇌가 인공 심장에 의지해 살아나기도 한다('윌리엄과 메리') 그리고 '달리는 폭슬리'는 저자의 성장기를 다룬 이야기다.
이야기 한편 한편은 치밀하게 톱니바퀴처럼 물려 한권의 베스트 단편집을 이룬다. 기발한 몽상과 치밀한 계획은 읽는 내내 공범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마무리 부분은 한결같이 그냥 거품 없이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만다. 이들의 사기와 몽상은 아름다운 현실을 위한 해프닝 일뿐이다. 이들이 꿈꾸는 몽상은 깨지고 사기는 번번이 실패하여 더 재미있다. 이래서 전 세계 독자들을 열광시키는구나 싶을 만큼 맛있게 빠져 들었다.
이 베스트 단편집에서 저자는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한 술수 등을 차근차근 밀도 높게 풀어 독자들을 이야기 듣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연작 '끌로드의 개'의 주인공 끌로드는 작가의 분신이랄 수 있다. 끌로드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내기를 시도하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이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런 끌로드의 깨져버리는 몽상을 이용하여 번번이 성공한다.
이야기의 귀재 로알드 달은 아무나 쉽게 예측 못하는 무서운 상상력, 섬세한 묘사, 타고난 호기심과 설득력으로 소설 내기에서 언제나 독자를 이겨 먹는다. 끌로드가 그렇게 눈물겹도록 치밀하게 계획함에도 번번이 실패하는 것에 비해 작가는 번번이 성공한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 <맛>을 읽은 독자라면 2000년 '세계 책의 날'에서 전 세계 독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독자로 로알드 달을 뽑은 이유를 충분히 알 것이다.
로알드 달은 그야말로 세계 챔피언이다. 그가 독자들을 상대로 꿈꾸는 일확천금은 책을 읽는 독자들마다 그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 베스트 단편집은 사기꾼과 몽상가가 주인공이지만 권선징악도 앞세우지 않고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몽상과 사기에도 세계챔피언이 있다.
단편 하나마다 독특하고 재미있다. 로알드 달의 매력이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감동하는가. 직접 맛보는 수밖에.
"로알드 달은 철두철미한 프로다. 그에게는 허술한 작품이 없다. 모든 작품이 완결되어 있다. 무서운 상상력, 수공으로 짠 비단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묘사, 타고난 호기심과 설득력으로 잘 무장된 소설은 무섭고 섬세하게, 흡반과 같은 마력으로 독자를 잡아끈다. 이십여 년 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손에 쥐었는데도 뜨겁게 쿵쿵대는 작가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