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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풍경 - 이인 그림산문집
이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다. X레이가 심장을 찍어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사진기는 사람의 마음을 찍어 그대로 보여 주었다. 감투나 박사학위 같은 명예가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수 넓은 비싼 집이나, 고급 승용차가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돈다발이 찍혀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가 찍혀 나오는 여자들이, 여자가 찍혀 나오는 남자들도 있었으며, 바다가 찍혀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기분 좋은 느낌과 함께 아이들에게서는 대부분 로봇, 꽃, 아이스크림 등이 찍혀 나왔다.
<내 가슴 속 램프>(정채봉)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이십여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신랄함이 오랜만에 생각났다.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들도 분명 있는데, 내 마음을 찍으면 무엇이, 어떤 것들이, 어떤 색이 나올까?
무엇이 가장 선명하게 찍혀 나올까? 가장 많은 말을 하게 하는 이유, 돈? 틈틈이 보았던 활자들? 가위가 나올까? 모질게 잘라내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리움을 잘라내라고? 주전자? 아니면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아슴아슴한 얼굴?
..아버지는 중년 이후 글씨 쓰는 것을 업으로 살다 10여 년 전 생을 다하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그 어느 때부터인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글씨와 각(刻)을 하셨다. 늦게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셨고 나또한 어느 자식처럼 아버지를 따랐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글씨와 각'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고도성장을 해가던 1970~1980년대의 먹물 묻은 아버지의 손은 허물어져 가는 자존심일 뿐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버지가 쓰던 붓으로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짓거리를 한다. 즐겁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그에게 가까이 가 있다. 내 아이들 역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모습에서 느꼈던 그것을. 그래서 두렵다.
-'글씨도 아닌 그림도 아닌'
<색색풍경>은 이인의 그림산문집으로 원형의 색감과 불교적인 사유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글에서 밝히는 것처럼 붓을 쥔 아버지는 선망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아버지를 흉내 내고 있었다. 화가란 왠지 가장으로서 모습보다 자신의 세계를 더 내세우는 이기가 날카로울 것만 같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고뇌랄지, 생활인으로서 성찰의 글들이 산문집 곳곳에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원색과 덧칠해짐이, 자꾸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끈다. 자꾸 만날수록 정이 새록새록 드는 사람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산문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원색이나 묵향을 물씬 품은 굵직한 글씨는 사려 깊고 솔직한 사람만 같다. 반복되어지는 덧칠은 사람과 사람간의 부대끼는 것을 피하지 않는, 마음을 툭 터놓은 솔직한 만남 같다고 할까?
조각조각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서 다가와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에 각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 하나씩 넣어보았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에 나를 점찍고 내 마음에도 다시 점을 찍고 선을 그려 넣었다. 나란히 함께 가는 선을 그려 넣었다. 아름다운 동행이다.
화가가 알고 싶었고, <그림산문집-색색풍경>을 몇 번 넘겨보았지만 도무지 눈에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인정받은 빼어난 글 솜씨로 깊은 성찰과 사유에서 얻어진 이야기들을 그림 모퉁이나 그림의 옆에 적어두었건만 나에게 와서는 그림과 접목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그런데 어느 날 외면하고 싶던 조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외면하고 낯선 것들, 그것은 나의 일상 한순간들이었고,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던 나 자신이었으며 내 삶이었다.
화가는 말한다. '그림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림을 보는 것은 '화가의 의도를 빌려 나 자신을 보는 것이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각각 낯설게 존재하는 것들이 한 공간에 따로 걸리고, 혹은 놓여지고, 혹은 쌓이면서 결국 아름다운 공간아 되듯 무수한 조각들이 모여서 내 삶의 조각보를 이룰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강한 색 조각들이다. 지금 내 삶은 어떤 색의 어떤 조각들일까?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한 조각, 내 마음을 찍어보면 어떤 것들이 나올 것이며 어떤 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