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지나치게 일찍 자고 지나치게 일찍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긴 밤을 맞으면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흘러갑니다. 한동안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긴 밤을 보내게 되면서 다시 음악을 듣습니다. 가장 최근에 구한 음반은 릴리안 푹스(Lilian Fuchs)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의 비올라 버전입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황금기에 있었던 최초의 비올라 녹음이라죠. 활질의 밀도가 대단히 높고 루바토가 자율적이라 요즘 스타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런게 오히려 더 좋을 때가 있지요. 곡 자체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보다는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면서 연주자가 경탄하는 순간에, 어떤 흐름의 절정에, 느려진 템포에 같이 숨을 쉬는 그 기분. 릴리안 푹스의 연주는 열정적이고 밀도가 높지만, 동시에 여유가 있고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여타 연주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즐거움-감동이 있네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가장 큰 묘미는 연주의 다양성이 아닐까 합니다. 백 명의 연주자가 같은 곡을 연주하면 백 가지의 다른 결과물이 나오죠.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반 픽션 평전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 보면 결국 가장 순수한 연주는 '연주하지 않음, 악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함'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악보 속의 음들이야말로 도그마가 되고 절대적인 심상을 갖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완벽해지기.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완벽함에 어쩔 수 없이 덧칠을, 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그 악보를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누가, 언제, 어디서'에 따라 매번 달라지겠지만, 단 한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영원히, 셀 수 없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역사 위에 남은 크고작은 묘비들 위에서 또다시 연주는 계속되리라는 것. 

그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행위'를 생각할 때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제게는요. 

 

그리고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진중권 특유의 그림 선정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미학 오딧세이 등의 다른 저서를 읽으신 분들은 익숙하실 단골 손님(?) 마그리트나 에셔도 빠짐없이 출석했네요.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진중권 자신이 좋아한 그림들의 이야기죠. 그가 좋아하는 그림은 이 세계를 평화롭게 옮긴 '한 폭의 그림같은' 작품들이 아닙니다. 

어느 지점에서 더이상 해석이 불가능하거나(조르조네의 <폭풍우>), 다층적인 해석 속에서 부조리함만이 슬그머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들거나(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 진보에 대한 인류의 믿음에 씁쓸한 미소를 짓거나(보슈의 <우석의 제거>)... 그림 속에서 주체가 뒤틀리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현실같지 않은 것들이 현실 속에 무덤덤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굼프, <자화상>. 거울은 실제의 모사이고 그림은 거울의 모사인데, 가장 살아있는 듯한 것은 그림이다.

미학자를 사로잡는 그림들. 세계의 빈 틈을 보여주는 그림들. 언어보다 훨씬 먼저, 어떤 직관으로 포착한 세계와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진중권이 고른 그림들은 현실 세계라는 매트릭스를 굳건히 신용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불편한 예언들입니다. 네, 선명한 메시지 -선언이라거나- 가 아니라 예언입니다. 예언자 자신도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분명함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징후들입니다. 불분명하고 분열하고 흐려지는 세계의 징후죠.   

"죽음을 아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것들만큼 매혹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있음으로써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징후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입니다. 언어로는 대상을 지시해야 하는데, 증거라고는 흔적이나 예감 뿐이니까요. 징후를 징후로 표현하기. 말하는(증언하는) 대신에 그리기-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기. 완전함을 볼 수도, 설사 본다 하더라도 완전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인간'이 파악한 징후(세계)와 그 징후의 모사(작품)를 함께 파악하기. 알레고리와 아이러니와 수많은 아이콘들...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고, 진중권은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였습니다. 나머지는 그의 바램대로 독자들의 몫입니다. 수수께끼같고 보편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그림들은 거꾸로 감상자들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정답이 의미를 잃은 곳에서는 오로지 적극적인 태도만이 환영받습니다.

교양 수준의 미학을 일정 이상 섭렵하신 분이시면 낯설기보다는 익숙한 얘기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미학 오딧세이만 하더라도 그런 얘기죠.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특히, 진중권의 책들 중에서는) 다루는 내용에 비해 쉽게 읽힌다는 겁니다. 큰 장점입니다. 매트릭스 밖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는 유사 빨간 약을 무차별 살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소위 교양 미술서 중에서 인식론적인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책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벌써 달리기 시작한 이 책의 리뷰들에 '좀 더 써 주세요, 속편을 내 주세요'가 있다는 건 책을 파는 입장에서도 기쁜 일입니다.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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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역시 감상자들에게 '다소 자의적이어도 좋으니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합니다. 지식은 감상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조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죠. 능동적으로 그림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쌓아놓은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죠. 그렇다면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필요 불가결한 지식만을 담아 전달하면 어떨까? 정말 그게 가능할까? 

<지식의 미술관>은 욕심이 많은 책입니다.

앞선 <교수대 위의 까치>가 '해석의 다양성'을 직접 느끼도록 했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작품의 내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미술품을 읽는 몇 가지의 코드/독법, 서양 미술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들과 그 기원, 미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문제, 예술가의 자의식과 작품의 관계... 이러한 작품 내외적 요소는 모두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필요한 요소들이죠. <교수대 위의 까치>가 드넓은 강가에서 대어 한 마리를 낚은 다음 말없이 낚싯대를 독자들에게 넘겼다고 한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낚시 포인트 분석에서 미끼와 낚을 고기들에 대한 고찰까지를 다룬 '친절한' 종합 낚시 가이드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죠.  


조르주 루스의 벽화-사진. 빨간 줄은 사진에 그은 게 아닌 실제 페인팅입니다. 왜상에 대한 좋은 예로 실려 있습니다.

'가이드북'이라고 하면 그저 쉬운 책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분야의 모든 부분부분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는 야망 쯤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는 성공적이기만 하다면 미술사와 특정 미술 사조에 편향된 상식 쌓기보다 훨씬 유연하고 주체적인 감상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전달입니다. 교양 미술의 통섭이라고 할까요. 책의 구성이 토픽을 이어 붙인 형식의 가벼운 구조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좋은 성과입니다.

더욱이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깔끔하게 각각의 파트로 정리되어 보기에도 좋고, 각종 에피소드들을 많이 담고 있어 초심자가 읽기에도 재미나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지식의 미술관>은 확실히 욕심이 많은 책이고, 저자 특유의 친절함과 부드러움을 무기로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목표에 다다른 듯합니다(완전히 목표에 다다랐다면 전설이 되었겠죠). 위대한 걸작들의 이면에서 작은 빛을 발하는, 똑똑하고 부드러운 책입니다. 차기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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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이라... 좋은 사랑 같은 거겠죠. 답을 내기 힘들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답이 나올 위험이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론만 보자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좋은 사진은 어떤 순간 자신을 끌어들인 장면을 그대로 찍는 것일 뿐이니까요. 쉬운 얘긴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더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어렵다는 데 공감하신다면 말이죠. 

사진은 그 구조상 어쩌면 가장 순수한 시각 예술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프레임 안에 담으니까요. 작가가 보이는 것들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유혹이 많습니다. 카메라-메카닉에 대한 탐닉부터(카메라의 메커니즘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은 여기서는 사진 애호가와는 분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 보기 좋은 것'에 대한 욕심까지, 사진을 만드는 작업 전반에 걸쳐 숱한 욕심에 휩싸이게 되죠. 더욱 보기 좋은 걸 추구한다면 좋은 게 아닌가? 물론 때로 그렇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의 형식을 빌은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추어이든 프로이든간에 말입니다. 사진은 그 태생적인 순수함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공허해지거나 '하급 미술'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좋은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기존에 많이 출간된 사진 잘 찍는 법과는 다른 이야기를 펼칩니다. 구도나 색감 등에 대한 기초적인 강의를 펼치면서도 '여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이라는 단서가 꼭 따라붙습니다. 앞서 <지식의 미술관>에서 했던 얘기와 비슷하지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하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까지 그 지식들이 머리를 채우고 있다면, 우리가 카메라에 담게 되는 것은 이 세계가 아니라 어설픈 지식의 잔해 뿐이니까요. 

아마추어들/일반 독자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시각 예술이 사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기를 넘어 직접 자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경우 '지식들을 버리기'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입견을 하나씩 버리는 것은 의외로 매우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좋은 사진'을 위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태도이니까요. 사랑다운 사랑이 좋은 사랑이라면, 사진다운 사진이 좋은 사진이겠죠. 사진의 기계적이고도 순수한 메커니즘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은 '그저 세계를 바라보기'입니다. 아마 완벽한 사진은 완벽한 음악처럼 '프레임에 담기지 않은 그 순간 자체'이겠지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최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나다운 때를 묻힌 사진'을 찍는 것이겠습니다.  

지식도 알려주고 동시에 그 모든 걸 나중에는 잊으라고 말하는 책. 쓰라린 첫사랑같은 이야기. <좋은 사진>은 사진 애호가 여러분께 많은 생각을 안겨드릴 겁니다. 

 


2009.8 / 서울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제 역사책 얘기 써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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