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본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5장에서 10장의 사진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사진들이 날 미소 짓게 하고 뭔가를 상기시켰습니다. (중략) 이전에는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뭔가를 보게 된 것 같아요. 

-빙고! 바로 그거에요. 자, 그럼 다음 주에 이 책(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말함)을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소통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소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언어를 초월한 소통이지요. 

-완전히 언어를 초월합니다. 

언어적인 수단을 사용하면서요. 

-바로 그것입니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p.37-38

  

       

소리소문없는 스테디셀러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를 기억하시는지. 나이든 사진가 겸 교수가 추려놓은 사진의 정수는 삶에 대한 사색입니다. 이 생을,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을 것. 판단하기 전에 움직일 것. 순전히 감탄하고, 그 감탄을 수집하는 데 몰두할 것. 원하는 대로 할 것. 망설이지 말 것. 그러나 서두르지도 말 것. 

신간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단독 저서로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구입해서 거기 있는 영어를 술술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릅니다. 그 책에 실려 있는 인터뷰와 평론가 서문이 책의 2/3니까요. 나머지는 국내 역자가 필립 퍼키스와 펼친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90페이지가 안돼요. 얇습니다. 즉, 책의 객관적인 스펙으로 보자면 결코 '본전 생각 안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은 있는 분들이 읽으셔야 이해가 수월할 책입니다. 말하자면 진입 장벽이랄게 좀 있다고 봐야겠죠.

그런데도 왜 이 책을 추천할까.. 글쎄요. 얼마 전에 제가 구입한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이 단연코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일 게 분명하기 때문, 만은 아닌거 같아요. 이 얇은 책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진 예술 중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기본기라고 할까요. 기본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여기에는 지성적-좌뇌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세계의 경이를 발견하고 그대로 채집하는 고독한 작업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쓸쓸하거나 슬픈 일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 그렇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행복하고도 쓸쓸한 일입니다. 그 어떤 영광의 순간은 그토록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지요. 영원히 말입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수많은 목적론으로 가득한 사진 예술의 세계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심이라고 할만한 개념이나 주제의식이 없어요. 그냥 '누가 이런 사진을 찍었구나'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실존주의적이라고 해도 되겠죠. 영원히 해답은 찾을 수 없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래도 괜찮은 듯한 느낌. 네. 

저도 일년 넘게 카메라를 놨었어요. 이 책을 읽기 얼마 전부터 다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더 열심히 찍고 있어요. 그저 많은 준비와 더 좋은 장비, 수많은 선결조건따위 필요없이 작은 카메라 한 대로 세상을 담고 있는 이 사진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점이 바로 이겁니다. 위대함은 타고난 행운이나 천재성이 없더라도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 모든 위대함들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진 않겠지만, 비록 그림자와 비슷한 색깔의 회색 빛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빛과 비슷한 파동을 찾아 사진 속에 담기. 그저 담기.

그것이 50여 년 동안 단 두 권의 사진집을 낸 이 조심스러운 대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일지 모릅니다.

무언가가 나를 통해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이 음악을 작곡하고 베토벤은 단지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었을 뿐이라는, 신동설 같은 주장이 아닙니다. 내가 베토벤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나의 단계는 사진을 아주 잘 찍었을 때, 내가 그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일을 수행하는 매체라고 느끼는 정도에요.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중략) 내가 할 일은 실수로 그 일을 그르치지 않고 제대로 이뤄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중략)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그럴 때, 난 그저 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 임무는 그 일을 제대로 완수하는 것입니다. 

-p.76 

모쪼록 '알 수 없는 느낌'에 좀 더 익숙해지시기를. 그리고 슬픔이 우울함과 다르다는 그의 이야기를 언젠가 확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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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10-0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기회가 되면 MD님이 찍은 사진 올려주세요. 보고싶네요. :)

외국소설/예술MD 2009-10-05 09:23   좋아요 0 | URL
아아 부끄럽네요..;; 네 언제 기회가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