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에 누운 그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깊고 푸르러서, 일년 중에 구름이 가장 눈부신 날들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내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오래된 청바지를 쓰다듬으면 조용한 소리가 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백 퍼센트의 사랑 같은 것도 해 봤으면 좋겠어." 내 눈앞을 나비가 날아가고 나서 다시 말했다. "가져다줄래? 그런 거. 백 퍼센트." 나는 그녀의 감지 않은 머리카락들을, 어제의 샴푸 냄새와 달큰한 여자 냄새가 섞인, 아마 95퍼센트 이상일 그것들을 만지며 말했다. "아 그건, 마치 백 퍼센트의 서양 미술사 같은 거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잠들었다. 나비가 어깨 위에 앉았다. 가을답지 않게 따뜻한 오후 두 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키 트리뷰트: 트랜지스터 데이트 클럽>의 단편 '어느 가을,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중에서
슬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세상에 백 퍼센트의 미술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제임스 엘킨스의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는 '완벽한 미술사란 건 가능하긴 한걸까?' 라고 묻습니다. 제목부터가 저 유명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에 대한 패러디죠.
<서양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입니다. 서양 미술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미술/예술의 역사라고 봐도 되겠죠. 그런데 제3세계와 소비에트 미술에 대한 언급이 극히 축소되어 있는 이 책을 자신있게 예술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양 미술사>라고 번역한 국내 출판사의 센스와 겸양에 건배를.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원제는 Stories of Art. 정통파 미술사에서부터 '고전주의와 반고전주의의 영원한 반복' 이라는 과격한 해석까지, 인도산 미술사와 대하소설급 소비에트주의 미술사같은 듣보잡(!)들까지, 게다가 대학 교양 수업에서 과제로 출제된 '나만의 미술사 지도 그리기'까지 총출동하는 진기명기 미술사론. 그 끝없는 다양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게는 나만의 미술사가 있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미술사는 타인의 취향의 숫자에 비례한다... 아니라구요? 어떤 법칙, 패턴, 혹은 불변의 사실 (알타미라의 벽화가 미술의 시초 아닌가?)이 존재하지 않냐구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후반부는 그 패턴을 탐색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 보시길.
그러니깐, 미술사야말로 각종 조합과 재조합의 수많은 화학반응을 관찰해야 하는 끝없는 현재 진행형 작업이라는 얘깁니다. 절대로 결정판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때문에 신선하거나 인상깊은 도전은 E.H.곰브리치의 거대한 책이 있더라도 언제나 언급해 주어야죠. 서론이 이렇게나 길다니, 네, 또 한 권의 기억할만한 미술사가 나와서요.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세 가지 지침을 정하고자 한다. 첫째, 도판을 보여줄 방법이 전혀 없을 때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작품 때문에 당황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고..(중략).. 그림으로 보여줄 수 없는 중요한 형태나 현상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히 다른 작품을 차용했다.
둘째,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다. 독자가 읽기에 편하도록 순서를 정하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늘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독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후략)
셋째 원칙은 이 책의 제목 '세상을 비추는 거울'에서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미술사가 어떤 독립적인 미적 영역을 향해 열린 창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역사를 우리에게 되비춰주는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어떻게든지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의 기록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저자 서문 중에서
그 그림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보여주지도 않고 설명만 빼곡이 들어차 있는 '전문' 미술사에 혀를 내두른 적이 있는 당신을 위한 책, 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까지 자신감의 한 축으로 삼는 이 야심찬 통합 미술사는 확실히 감칠맛이 나요. 고급 독자층이 아니라 중급 정도의 책/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책이란 게 뚜렷합니다. 문체는 교재 느낌보다는 강의하는 느낌을, 즉 '읽으면서 바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난이도와 흥취'를 추구하고 있어요. 비슷한 책들에 비하면 전문용어의 사용 빈도가 극히 낮은데, 신기하게도 언급하는 내용은 충실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잘 쓰여졌다는 얘기고, 미술 수필 같은 느낌이 나서 읽기도 좀 더 재밌어요. 일례로...
'인상파(Impressionism, 인상주의)'는..(중략)..캔버스에 그리기 전에 더 나은 색조를 얻기 위해 이전 화가들이 활용했던 유채 스케치가 이젠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망막에 비친 일시적인 자극의 패턴에 반응하고자 했다. 오브제가 없으니 선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드로잉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든 것은 색채로만 존재했고, 유동적인 물감으로만 형체를 갖추었다. 이 같은 새로운 접근법은 눈이 카메라와 유사한 점은 물론 다른 점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그림은 자연의 시적인 제안에 반응하는 감수성, 즉 마음의 문제였다. 더 나아가 생기 넘치고 환희에 떨리는 손을 가진 몸의 문제이기도 했다.
모네는 그림을 '대기(大氣)'라고 말했다. 그의 손에서 자연은 안개와 연무, 파동을 통해 굴절된 햇빛이었다.
-p.341에서
끌로드 모네, <일출>
인상주의에 대한 두 문단 정도의 정의. 당대 사회와의 관계. 대표 화가들의 삶. 타이트하면서도 짜임새가 좋은 편이네요. 더욱이 서양 이외의 미술사에 대해서도 언급 빈도가 (상대적으로)높고, 각기 다른 문명의 미술들이 만나는 순간에 대한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서양 미술과 접점이 있는 예술들이 대우를 받고 있네요. 비잔틴, 이집트, 에도-일본, 이슬람...
네 맞아요. 이 책도 한계가 있습니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안나와요. 제3세계까지 아우르겠다고 공언한 자신감에 비하면 여전히 '지역 분배'에 대한 공평함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시대별로 진행하는 미술사의 불가피한 단점(전 세계적으로 순간이동을 해대는)은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하는 바, 안정된 통일감 역시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가치있는 책이 아닐지. 저 정도의 단점은 세상 모든 미술사 책에서 다 뽑아낼 수 있거든요. 일종의 문명사이면서 역사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야심찬 미술사 책, 그럼에도 읽기에 어려움이 덜하고 종종 시적인 흥취와도 만날 수 있는 책. 이 정도면 기분 좋게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자들의 여정은, 수많은 세계-서양-미술사는, 그리고 엠디의 추천은 그 종착지-완결점에 도착할 수 없음으로 인해 영원히 계속될 것이에요. 모든 아름다움은 비극이래요. 콜.
MD 마음대로 또다른 미술사 책들 4
<서양미술사>...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될 책인데요. 여기 올린 이유는.. 세일 중이거든요. 마일리지 쿠폰까지 주고 해서 되게 싸요. 일전에 25% 할인이라고 자랑했는데 더 할인하게 돼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근데 지금보다 더 싸지진 않을거예요. 재고도 그렇게 많이 안남았어요.
<이미지로 보는 서양미술사>는 입문용으로 추천요. 텍스트보다는 도판 위주의 구성인데다 분량도 부담이 없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명이 좀 더 상세한 세계 미술 화보라고 할까요. 그림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고, 설명도 눈높이를 낮추어서 청소년들이 읽어도 괜찮습니다. 각종 예술 사조와 기초 용어를 익히기에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겠네요.
<art since 1900>은 진짜, 완전 빵빵하고 멋있는 책이죠.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20세기만 다루는 그 특성상 훨씬 밀도가 높다보니 어떤 성과가 다음 시기의 언젠가에 다시 반영되고 변주되어서 (위에서 말씀드린 연대기적 구성의 태생적인 결함을 감안할 때) 훨씬 유기적이고 탄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각종 ism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사회분석학적 동시 접근 등 제1급의 꺼리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어요. 서양 인문학이 개발한 거의 모든 분석 도구를 만나보실 수 있는 박람회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20세기 전용 업그레이드 버전이며, 말 그대로 20세기라는 잡종 욕망의 만화경을 파고들어가는 다각도의 집중력이 눈부십니다. 강추! 근데 비싸요. 대신에 크고 아름다워요.
<이콘과 아방가르드>는 미술사 책이라고만 하긴 좀 그렇지만요.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세계관 탐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주류 서양 미술사에서 냉대받는 비(非) 로마-카톨릭 계열 미술들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주류 서양 문화와는 또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어요. 이콘의 세계는 이데아의 허접한 모사에 불과한 천박한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인과적 사고체계와 언어)을 포기하고 신비 그 자체를 지상에 받아들이는 성소이며, 그로 인해 '신 이하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신성이 발붙이게 되는 아름다운 모순을 체현하는 세계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art since 1990>이 인문학적 해부학이라면 이 책은(역시 상당한 인문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어떤 감동을 동반하는 장엄한 논픽션같은 느낌이 들어요. 왜 미술이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인지 알려주는 또다른 뛰어난 성과. 역시 강추. 이 책도 좀 비싸지만... 대신 역시 크고 아름다워요.
"E.H.곰브리치의 풀 네임을 말해봐." 그녀는 머리칼을 꼬아올리며 '이요우제프 하이든, 곰브리치'라고 말했다. "있잖아, 사실 그런 건 없는 거잖아. 백 퍼센트의 서양미술사 같은 건." 나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귓볼에 키스했다. 괜찮아, 라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는 잔디를 뜯었다. 나는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의 첫 문장을 마음 속으로 읽었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더운 가을의 오후에,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