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그래, 알은 깼어?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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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을 쓰면서 불현듯 스친 생각이지만,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적어 보낸 이 구절을 거의 예외 없이 기억하고 있다. 데미안의 전문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귀동냥을 통하여 알을 까고 나오는 새의 이야기가 데미안의 이야기임을 익히 알고 있다. 데미안의 이 한마디는 고뇌에 찬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정도까지 심각하게 이르지 않더라도, 맥베스가 제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유명한 대사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는 기록된 시간 마지막 음절까지 조금씩 기어든다” 보다는 더 뚜렷하게 독자들의 머리에 새겨있다. 맥베스의 허망한 이 한마디를 들으며 마침내 죽음으로 향하는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가슴을 쓸어내렸건만 데미안의 알 깨는 이야기가 더 또렷함은 왜 일까.


10대 초반에서 20대에 이르는 동안 에밀 싱클레어가 겪는 체험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 저마다가 섣불리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을 법한 제2성장기의 아픔과 흡사해 보인다. 그래서 대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데미안을 만나는 필수 코스를 선택하는 것인가. 데미안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난 나로서는 이 말에 십분공감한다. 성장의 진통은 생각보다 아픔이 컸다. 당시 나는 상당히 심각한 가출을 결심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삶의 지루함과 모멸감에 싫증을 느껴 학교 수업에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방을 하나 꾸려 가지고 집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 작은 수공업 공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해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의 으슥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한 마리 짐승의 몸으로 으슥한 밤공기를 가르며 이 재미없는 시들한 세상, 실컷 떠돌며 살아야겠다는. 그것이 알에서 깨어나는 길이라 다졌다. 그 후 어찌되었냐 물으신다면 그 발칙한 프로젝트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지금, 자판기 앞에서 깨지 못한 알 속의 평안을 찬양하고 있잖은가.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가 특정한 나이 또래의 관심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가 모험담을 호기롭게 늘어놓는 제 또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속셈으로 실제 있지도 않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것이 약점이 되어 프란츠 클로머의 협박에 끌려 다니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채 자신만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의 보호와 사랑으로도 막아낼 수 없고, 오직 개개인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뭣 좀 알기 시작하는’ 과정이 막막한 아픔 속에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싱클레어가 성장과 변모의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은 많은 경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심리묘사와 강한 흡입력을 지닌 문체로 그려진다. 해서, <데미안>은 대다수 독자들이 사춘기를 전후한 시기에 품었을 만한 죄의식이나 은밀한 욕망을 공공연하게 형상화함으로써 그 죄의식과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위안을 던져준다. 이러한 위안의 ‘보편성’은 삶의 광대무변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그러나 사는 게 뭐 다른 게 있겠나 하는 시니컬한 ‘그들’의 혼란스러움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값진 것임은 틀림없다. <데미안>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이성에 눈떠가는 싱클레어가 육체적 욕구와 정신의 명령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바로 ‘나’이므로. 그러므로 이것은 ‘내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의문을 품은 부분은 어린 싱클레어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종교적 경건함으로 무장한 가정과 경건함이 통하지 않는 외부 세계사이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성격을 건드리게 된다. 그런데 데미안이 등장해서 프란츠의 협박을 차단한 후 싱클레어의 경험이 품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갈등 문제는 점차 슬그머니 사라지고 추상화된 내면세계의 관념 대립이라는 형태로 변모한다는 점. 이것은 이성에 대한 갈망이나 종교적 고뇌를 겪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성격을 띤 외부와의 문제와 잠시 만나는 듯하다가 추상적 관념으로 돌아버린 구도. 이러한 문제는 데미안이나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이라는 추상적 인물설정으로 어느 새 연결된다. 데미안은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부리는 소년으로, 나중에는 텔레파시나 초감각적인 인물로 확대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도 ‘초능력자’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성별과 시간의 흐름, 선과 악을 초월하는. 신비하다 못해 추상적이고 입체파 화가의 그림 한 점을 대하는 듯하다. 무수히 연결된 꼭짓점으로 통하는 선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하나의 형체를 형성하는 면이 탄생되는. 누가 그랬던가. 입체파는 허세라고. 얼마 전 작고한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은 “모든 예술은 다 사기성을 띤다.”라고 인정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결말로 나아간 <데미안>은 소설적 허세다.


감정의 동화를 오버랩하면서 스무 살 이전의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독자에게 ‘이건 우울하고 은유적인 방황에서 헤매는 내 얘기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미안>. 인간적 성장의 지향점에서 사회적 성격으로 연결되다가 신비화 전략으로 추상적으로 매듭을 지은 미완의 이야기. 여전히 알은 깨지 못한다. 원래부터 알은 깨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단단하거나, 알을 깰 만큼 강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제3의 돌발발언을 찾자면 인간은 원래 알 속에 있지 않다. 공중에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씨앗을 맺고 바람처럼 흘러 다니다가 분해 되어 사라지는 존재. 그러니 깨어야 할 알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독일 문학의 거장인 헤르만 헤세를 욕보이는 일이며 억지다. ‘알 속에 갇혀있다’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복지부동의 명제.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알은 그래 깼어? ‘안간힘’만 쓰고 있을 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스무 살 이전에 <데미안>을 읽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명작고전’이라고들 하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는. 그런데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읽어보니 이것이 명작인 이유는 첫째는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명성 둘째,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인 1차 세계대전의 탄생(20세기의 인류사의 지각대변동)을 위한 구습의 파괴였다는 해설 셋째가 선과 악을 비롯한 통념적인 도덕관을 초월하고 있다는 신비적 매력. 이십여 년이지나 다시 만난 <데미안>의 결론은 ‘난 변했어요! 그러니 알 속에서 어울렁 저울렁 산답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인생이란 변하는 것. 책이라고 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알' 누가 깬 사람 있다면 연락 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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