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을 향한 두 개의 방법론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힘들지 않게 떠오르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에게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코드이자 강인한 인상이다. 전작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도 열하를 건넌 연암이 만난 청과 서양문명의 접선을 현대판으로 재조명했다. 동, 서양의 문명, 시대를 나눈 문명, 인종과 가치관을 나눈 문명. 이번 책에서는 국가적 상황을 나누는 공간과 문학적 공간을 이분법으로 잘라내어 문명을 말한다. 나비와 전사 두 갈래의 길은 동양과 서양, 시간과 시대, 근대와 중세, 정신과 육체, 문명과 자연으로 세분화되고 나중에는 소월과 만해의 여성성 투영으로 합의가 모색되어 푸코와 연암으로 결론이 난다. 둘은 상대성이다가 적대적이다가 비슷하다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분되었지만 독립적인 공간형성을 하기도 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집합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도 띤다. 방금 컵에 따라놓은 부글거리는 콜라처럼 저자의 감각적인 글쓰기 능력은 여전히 도약적이다. 하나의 소재에 줄줄이 달려 나오는 문제와 주장이 다층적 스펙트럼을 연상하도록 독자를 잡아 이끈다. 저자가 보여준 프리즘에 도취되어 읽다보면 정작 의문제기를 위하여 메모를 해 놓은 조각들을 놓쳐 버린다. 그만큼 전작에 비하여 이번 책은 도발적이고 더욱 마취성분이 강하다. 책을 덮고 나서야 책을 읽으며 기록해 놓은 공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녀의 광기’라는 말이 써 있다.


그녀가 갖는 근대와 문명에 대한 광기는 푸코와 연암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대한매일신보>는 계몽주의의 선두에서 지휘하고 무덤 속 영혼까지 놀라게 하는 철도가 달린다. 철도로 비유되는 근대 문명의 속도와 그 속도에 함몰되는 근대인의 자화상이 휙휙 지나간다. 계몽주의는 시,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세계를 한 장의 도면으로 일원화하는데 성공했다. 중간과정이 생략된 시대. 여기서 다시 연암 예찬론자인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별한 열하일기’의 가치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 공간”-(53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암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이 공간이었음을 상찬한다. 저자의 사이 공간의 중요성에 관한 역설은 제국주의로 곧장 나아간다.


“‘사이성’이 사라진다는 건 대상과 대상 간에 확연한 위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인과 노예의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관계 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는 물론 주인조차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우주를 소유할 수는 있되, 결코 그것과 함께. 혹은 그 속에서 공명의 춤을 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시공간이다.”-(58쪽)


출발과 목적을 중요시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사이 공간 궤멸하기’가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요즈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지은 <미국 패권의 몰락>을 읽고 있는데 이런 구절이 보인다. “속도가 더 빨라질수록 길이 점점 더 갈짓자를 그리듯이 변동들은 점점 더 기복이 심해지거나 ‘혼돈스러워질’것이고, 그 궤적이 나아가는 방향은 훨씬 더 불확실해질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국가구조가 정당성을 점점 더 상실해감에 따라 집단과 개인의 안전이 어쩌면 아찔할 정도로 위협받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세계체제내에서 일상적 폭력의 양을 증대시킬 것이다.” 철도가 보여주는 직선의 매혹은 폭력적인 직선의 힘으로 전이되고 이것은 근대적 시공간 탄생의 주체가 되었다. 근대이후 문화는 일정 양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강한 힘의 문화’가 단연코 주체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의 세계 제패와 패권의 야욕은 ‘속도’와 ‘도전’으로 대변된다. 이것은 케네디의 ‘프론티어’ 정신이다. 책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는 우주개척정신은 우주정복야심으로 치환된다. 미국이 정말 달나라에 성조기를 꽂은 것이냐 아니면 세트장 제51구역에 꽂은 것이냐는 말이 많지만 미국의 우주로 치닫는 정복욕은 철도의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철도는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다. 그 과정에서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식민과 노예의 수단으로 철저히 활용되고 거세된다.


시공간을 철도라는 산업혁명의 탄생물로 잡아 출발한 책은 계몽주의자들의 ‘도덕적 선’과 기독교의 인연을 연결한다. 야훼를 ‘지독한 사랑/처절한 복수’로 몰고 가는 저자의 주장은 <계몽주의=기독교=도덕적 우화주의=인간 중심주의=근대주의>라는 등식으로 성장한다. 이 말은 윤치호의 입을 빌려 재차 강조된다. “문명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문명의 상태인 채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118쪽)맙소사! 문명의 힘은 놀라워서 한 나라의 독립위에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비문명은 하위이고, 죄악이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문명예찬론을 주창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작업’의 결과다. 이 작업은 철도의 속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인간은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 돌아온 터미네이터는 연암의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만 취급한다. 그러다가 인간은 기계를 작동하는데 방해물이 된다. 영혼은 순결하나 육체는 불순하다는 논리다. 그나마 영혼이 순결한 것은 신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계몽주의자, 근대의 학설이다. 육체는 죄악의 덩어리다. 그러므로 불순하기 짝이 없는 육체에 종(種)을 초월한 다양한 공존이나 담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방통행, 이것이 근대의 욕망이고 소통의 방법이다.


새롭게 알게 된 <동의보감>의 허준을 향한 흠모는 흥미롭다. 저자의 허준 흠모는 기(氣)를 인체탐구의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인체는 우주와 ‘통’한다는 주장도 좋다. 이것은 기억을 되살려보면 연암의 나비처럼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와 문명의 담장 허물기와 통한다. “동의보감은 섹스를 오직 양생적 차원에서 다룰 뿐 결코 도덕이나 선악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는다”-(421쪽)는 이론은 <허준=연암=푸코>를 설정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살포시 끼어드는 ‘장금이’의 이론은 간이 덜 된 젓갈처럼 밍밍한 감이 없지 않지만 독자의 눈요기로는 그만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근대를 신랄하게 몰아세우고 그 전면에 연암과 푸코를 내 세운 저자의 논리는 분명 찬반을 부르는 성격이 짙다. 나 역시 다양한 소재활용으로 근대와 문명을 설파한 저자의 논리에 반대의 의견을 분명 지니고 있는 부분도 있다. 독자는 얼마나 얄미운 존재인가. 오자가 한 개라도 발견되거나 나와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면 더욱 신난다. 게다가 두 개로 쪼개어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경계 지은 이런 류의 색깔 짙은 책은 심심한 혓바닥을 얌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적을 많이 만든다는 것은 환영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 중에서는 분명 나에게 이로운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저자의 질문 설정)=>본론=>출구(저자의 변(辯))로 독특한 구성을 이룬 책이다. 근대와 중세의 출발로 문학과 성, 정치와 문화. 근대의학과 임상의학, 한의학의 관점까지 안테나가 뻗어 있다. 그러나 뛰어난 언변의 방정식은 단순하다. 문명<자연, 근대<중세, 근대의학<한의학, 계몽주의는 인간중심주의를 낳았음에도 결국 인간을 버렸고, 그러므로 ‘(근대)계몽주의는 잘못 되었다!’가 이 책의 주제다. 다양한 소재를 한번에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은 뚜렷하지만 산만하다. 산만한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천천히! 비판도 분명 시시각각 달라질 것이다. 근대적 이성은 '언어의 제국'위에 구축되었다니 이 책에 주는 현재의 비판과 분석을 일단은 발뺌하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