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드팀전 > 프로이트와 맑스를 넘어서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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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이데이'-노동절이다.매일 일하는 노동자는 푹 쉬어야 되는데 회사에 나왔다.그닥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공휴일에 일해 본 회사원은 알 것이다.조용한 회사는 일하기 꽤 괜찮다.위에서 지랄 거리는 아저씨들도 없고 ,지랄 거리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로 부담되는 또 다른 아저씨들도 없고...즐거운 메이데이!!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공사'가 '다망'하다 보니.(그렇다면 건축주는 쪽박차는 건가? 에이 썰렁) 서울 출장가는 KTX에서도 보고 피케팅 한다고 죽치고 앉아 있던 스티로폼 위에서도 보고(그 피케팅은 대개 버티기였으므로)....그나마 반쯤 넘기고 나니까 끝이 보여서 탄력 받았다.먼저 이 책은 나같은 일반인에게 약간 두려움을 준다.이거 또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하는..내지는 이 책 다 보고 나서도 기억남는 것은 단 한줄의 문장 정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같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본 이유는 '파시즘'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역사적 파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고 또 일상적 파시즘에서 말하는 '대중동의'라는 부분도 늘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공부는 석박사만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같은 회사원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쥐뿔 자존심에 읽었다...언젠가 이야기 했던 적도 있는 경험인데 .어떤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문득 뭣도 모르고 '푸코'...'부르디외' 뭐 이런 이야길 꺼냈더니 이거 완전 사람보는 눈이 달라졌다.그런 용어들은 자기들의 전문영역인데 하찮은 일반인이 그런 단어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쓰니까 놀랐겠지.그런데 그깟 단어 몇 개에 사람보는 눈이 달라지다니...광고에서 그렌져 타고 다니는 오래전 애인을 보고 '당신 잘사셨네요' 라고 카피 날리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유치했다.많이 배우신 박사님들도 유치하다.(휴..알라딘의 박사님들 계실테니 저의 편견을 용서해주삼.) 어쨋거나 평민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가끔은 졸면서 가끔은 넘어가면서 라이히의 책을 다 읽었다.라이히의  개념과 용어가 낯선 부분은 있었다.성경제학이니 오르곤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무슨 개념인 듯 하다라고 그려지긴 하지만 내 판단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평민의 자긍심(무식에 힙입은)으로 이런것들은 대충 또 무시할 수도 있다.그렇게 '그냥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다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거참 내가 쓰고도 너무 말어렵게 한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평민의 도망갈 구멍 만드는 어법이라니)

라이히의 이 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밝힌다.아마 일상적 파시즘 논의에서 라이히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이 문장에 담겨있을 것이다.라이히는 본인이 직접 서문에서 프로이트와 맑스의 변증법적 변화를 도모한다라고 밝힌다.특히 맑스의 경우 대중심리학의 지식이 없었으므로-이것은 일반 사회학 전체에 통용된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만을 제시할 분 그들이 성격차원에서 계급구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라이히는 우선 파시즘의 이해를 위해 이러한 통속적인 맑스주의 개념을 종식시킬 것을 권한다.즉 경제 결정론과 계급론적으로 파시즘에 접근하면 파시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억압받다보면 이거 한번 뒤집어 없자 하고 불끈 일어나야 돼는데...파시즘의 도래를 보니까 그게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이거 불끈하고 일어서기는 커녕 '하이 히틀러'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데 이 상황을 맑스의 계급투쟁론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80년대 우리상황과 대치시켜도 비슷해진다.변혁세력 중 일부는 '민중'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졌다.즉 '민중'은 위대하고 '민중'은 무오류적이라는 식의 발상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발생한다.이때 그 일부 막연한 민중주의자들은 쉽게 도망갔다."그게 다..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인해 민중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끝." ...라이히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너무 쉽게 대중의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간과했다고 말한다.그 틈새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대중의 속성을 활용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물론 이것이 변혁세력이 말하는 민중과는 다른 개념일지라도-객관적인 응시를 주장한다.대중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비합리적이며 책임감이없다.또한 신비주의에 자신을 의탁시켜며 권위주의에 호응한다.물론 라이히가 대중을 이렇게만 파악하면 더이상 인류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게다.그는 대중이 원래 자유를 본원적으로 생각하며 또한 억압을 걷어내고 긍정적 변혁 주체가 될 수 있음도 밝히고 있다.라이히의 대중에 대한 시각은 그러므로 부정적이라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객관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파시즘의 발호에 가장 중심에는 당시 독일 소시민계층이있었다.파시스트세력 역시 노동자계층보다 소시민계층에 우선적인 정치작업을 펼친다.계몽된 이성의 승리 표상이던 이 시민계층이 도대체 왜 얼토당토않은 파시스트의 중심축이 되었는가? 또한 소시민층에 이어 역사발전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왜 한줌 파시스트 정치꾼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에 손을 들어준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악마가 숨어있었는지 탐구한다.이 부분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접근법의 핵심이다.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돼어 있다.상세하게 설명할 능력도 없고 이해도도 떨어지기에 그저 평민수준의 이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파시즘의 대중심리의 가장 핵심에는 가족이데올로기,그리고 유아기때부터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억압,기독교 원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적 가치 등이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권위주의적 가족의 도움을 받게된다.이것은 개개인의 성격구조 형성에 지대하다.이를 통해 가족-국가-문명이 형성된다.라이히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도구가 된다.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로를 발전시키고 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동시에 이후 모든 권위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도록 아버지와 강한 동일시를 발전시킨다.

가족 내의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확대하면 결국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문제에 있어써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중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내적인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고 책임감의 부채로 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성적 억압 역시 가족내에서 이루어진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장제와 이에 바탕이 되는 가부장 권위주의는 가모장제가 사적 축적을 통해 붕괴되면서 발생한것이다.정착을 통한 사적 축적은 일부다처의 형식을 띠게 되고 그전에 있던모계 사회의 성적 자유는 억압된다.성적 자유는 권위에 의해 박탈되고 상품화되어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요즘도 쉽게 볼수 있는 캠페인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가족보호=성적 순수성=안전한 사회로 이어진다.이러한 도식은 이런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보호=성적 억압=도덕주의의 강화. 파시즘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대고 있기때문에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이것은 파시스트들의 볼세비즘의 성적 해방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통해서 현실 속에 강화된다.

성의 억압을 위해 파시스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연령층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성의 억압을 위해 또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주의이다.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존립하는 종교이다.(기독교인들은 싫어하시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책감 없는 긴장완화를 추구한다.가부장적 종교는 이의 완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를 이용하여-파시스트들 역시 유사하게-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조종하게된다.성의 억압은 종교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무력감으로 탈출하고 또 반대로 인종주의,순혈주의,민족의 우수성등의 조작에 의해 사디즘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 책에서 라이히가 다루고 있는 파시시트 정체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파시즘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파시즘이다.책의 후반부는 소비에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라이히는 소비이트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한다.소비에트가 파시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레닌이 주장한 국가없는 사회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삼는다.라이히는 일종의 코뮨을 주장한다.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 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노동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일종의 일하는 사람들간의 공동체 같은 형태,직능간 합리적 교류와 상호발전이 가능한 코뮨이다.라이히는 노동자의 개념을 맑스 시대보다 확장한다.요즘 말로 하면 화이트칼라들도 포함하는 노동자층의 자치가 노동민주주의의 형태가 된다.

라이히는 대중들의 성적인 경직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만 실제적 민주주의는 힘들다고 말한다.이 성적 억압의 문제는 당 시대에 부여된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을 걸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온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라이히는 현 시대 사람들은 이미 성적 억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성에 대한 긍정과 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만이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과 결별하고 사회 자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가 말한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파시즘의 이해에 중요한 요소이다.또한 독일의 전형적 파시즘이 없어지고 난 이후에도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대한 대중 동의를 이해하는데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준다. 유럽은 파시즘을 아픈 역사를 통해 파시즘을 역사의 반동으로 파악하는 광범위 대중들의 역사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제국 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할뿐 우리사회에서 유사 파시즘의 발호와 이데올로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지금도 군사정권이 가진 유사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이 존재한다.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사파시즘적 속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것들을 이해하는데 라이히의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몇 몇 궁금한 점들도 남아있다.아는게 별로 없어서 학문적 질문이 되긴 어렵지만..라이히의 논지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성억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즉 유아기적 성의 억압이 무의식속에서 인간의 이후 모든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라이히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의 성학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과연 성의 억압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밣혀내고 유아기의 성을 찾아낸 것은 중요한 발견이지만 유아기 성의 억압 문제를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오른팔인 칼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 것도 프로이트의 성결정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다.비록 칼융이 신비주의에 빠져 나치에 이용된 감은 없지 않지만.또한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론에 대해 괴테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둥 의식 과잉의 백치의 상상리라는 둥 프로이트를 꼬집고 있다.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1차적 비판인 과잉성결정론을 라이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성 싶다.또한 학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이 가진 가장 난맥상인 검증가능성에 대해성도 라이히에 적용된다.무의식의 성억압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책에서 조금 유치하고 일차원적이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파시즘의 지도자 및 그 추종자들이 성년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 등 다른나라에 비해 독일,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성적 억압이 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성적 억압이라는 것은 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의 발호가 없거나 미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만 국가 전체적으로 발호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억압받아서?  성적으로 억압된 대중들의 전향적인 파시즘 지지에 대해서도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본적으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 내에서 대중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생활태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하지만 라이히가 성의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것에 비해 문화산업이라는 쪽에 혐의를 두었다.문화산업을 통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물론 대중문화의 혁명성과 대중들의 자발성에 대해 부정적인 아도르노의 입장을 고려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억압'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라는 것도 난망하다.'노동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라이히가 실험실에서 흰 가운입고 있는 의사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도대체 '노동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치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막연하고 또 이상적이다.라이히의 말에 따르면 기존 정치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신개념이 낯설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의 자치 개념은 1차적으로 성적 억압이 없는 -아니 최소한 어느정도는 사라진-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또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치개념이다.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기독교의 천국 개념처럼 보인다.라이히의 실험실에서는 이러한 코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소규모의 대안적 코뮨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인류 역사가 구현해 놓은-설령 빌어먹을 것이라도-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의 촘촘한 구조를 너무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위대하게 거론된 것은 그의 논지가 무오류이기때문은 아니다.그가 밝혀낸 것인 이후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사회 분석에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1940년대 파시즘이 한창 발호중일 때 이런 위대한 책을 써낸 것은 참으로 놀랍다.또한 그가 가진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후속 연구를 이끌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모를 때는 넘어가고 지겨울만 하면 쉬어가는 평민의 '까잇거' 근성만 있으면 <파시즘의 대중심리>을 책장 한 켠에 꽂아두고 두고 두고 펼쳐볼 수 있다.이런 책들을 학자들의 전유물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평민의 역할이고 '까잇거'정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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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2 0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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