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사기꾼 - 뛰어난 상상력과 속임수로 거짓 신화를 창조한 사람들
하인리히 찬클 지음, 김현정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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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본절판


인간에 의해 창조된 영역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학문 그 자체는 객관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지독히도 주관적이다. 어떤 학자에게 어떠한 지원을 해주느냐의 결정이 그러하고, 그로 인해 혜택을 입는 층이 선정되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때론 학문 그 자체마저도 객관과는 거리가 멀기 마련이다. 장애인이나 여성, 특정 인종의 지능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연구가 '과학적'이라 칭송되다 못해, 때론 사회적 약자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제약이 과학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적'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한 학자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성스럽다 못해 결코 침범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특정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앞선 자신의 지위를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연구에 있어서의 논리적 오류에 대한 지적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이를 검증할 능력을 지닌 이는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 윤리적인 비판도 마찬가지로 연구가 가능케 할 위대한 업적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격하된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하겠다. 동시에 그것은 학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일 수도 있다. 자신의 독보적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자금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 책이 기록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 인류를 상대로 놀라운 게임을 펼쳤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논문, 학위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연구비를 획득하고, 때론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할 수 있는 기회도 획득한 그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학문이 지닌 자가 검증능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생각해 보게 해준다. 물론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학자 역시 실수는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이들은 애초부터 과학과는 담을 쌓은 듯했다. 성과를 전혀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하고, 남의 논문을 고스란히 베껴서는 자신의 것 마냥 발표하는 그들을 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부도덕한 그들의 행위가 주는 영향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약물로 인해 누군가는 생명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재 혹은 둔재로 둔갑하여 일반인으로서의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또한 과학이 권력과 연계된다면 더더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생학이라는 학문적 바탕이 없었더라면 인종차별적인 나치즘이 그토록 오랜 기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모든 것을 과거를 통해 해결하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보편화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오늘날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학자로서 그가 지닌 영향력에 이견을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입지 역시 탄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사회생활이 제약되어 있던 1920년대, 직접 사모아 섬에 머물며 자료를 수집했던 그녀의 학문적 열정을 높게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현지 언어를 이해치 못하는 그녀의 연구에 많은 상상력이 개입했음을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헤르만, 브라흐 커플의 스캔들이었으니, 위기의 상황에서 두 인물이 보여주는 행보는 말 그대로 인간의 추악함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지식을 이용한 사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특히 새로이 개발되는 신기술 분야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허술한 윤리 체계와 검증 능력의 부재는 학자로 하여금 마음만 먹으면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할 테니 말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오류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능력을 소유한, 몇 안 되는 생물체라는 사실이다. 숱한 진통을 통해 진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곤 했던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사기꾼이 더 필요할까? 사기꾼을 뛰어난 학자로 둔갑시키는 것도 사회의 힘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사기꾼 양산을 위한 공모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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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불만있는 자여, 외로운 자여, 방황하는 자여, 여길보라.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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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0월 15일. 난 책을 구입하고 나면 책 맨 뒷장에 도장을 찍고 밑에 구입한 날짜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2003년 10월 15일은 내가 이 책을 구입한 날짜이고, 부대에 있던 시절이라 읽기는 읽었지만 전혀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쩜 그렇게도 처음 읽는 것처럼 완전히 다 까먹어 버릴 수 있을까. 겨우 끝에가서야 주인공 홀든이 동생과 나누는 대화만이 기억 어딘가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아 읽었었구나, 하고 스스로 인정해본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19년에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설마 지금도 살아있나, 이 작가의 단 한권의 책이 막나온 따끈따끈한 신간 베스트셀러처럼 널리 읽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흔히 말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 책, 샐린저는 이 책 말고도 다른 몇권의 책을 더 썼지만 다른 책들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가와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만 듣고는, 호밀밭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가보다 라고 쉽게 생각한다. 처음 읽는 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원하는 주인공 홀든은 지독한 반항아다. 그러나 쉽게 떠올리는 반항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는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이 세상은 별 볼일 없는 것들로 가득찼다고 생각하는 불평불만자다. 그러나 대놓고 개기거나 시비를 걸거나 못된 짓을 하며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단지 그냥 모든 것에 불평불만을 느끼고 못마땅할 뿐이다. 입만 열면 내내 툴툴 거리며 욕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 낙제. 머리가 안좋아서가 아니다. 공부할 의지가 없다.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이딴 것들을 해서 뭘 하자는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가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는 일들에 대한 독백으로 가득차 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맞춰서 살기는 싫다. 못마땅한 걸 어쩌랴.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세상의 질서에 그럭저럭 잘 맞춰가며 생활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거지?

  그는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인사 조차도 하기 싫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p120-121) 반갑지도 않은데 왜 만나서 반갑다고 하는거지, 아주 사소한 일상의 언어들과 행동들에도 딴지를 거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홀든처럼 심하게는 아니지만 나 역시 내 안에 홀든의 반항심이 잠재하고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나름 사회의 반항자이고, 아웃사이더가이고, 이단아라고 생각한다.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어가며 타협하게 되는 인간 중의 하나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 그때는 각 중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시험을 봐서 성적순으로 반배정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난 그 시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자연 공부도 하지 않았다. 시험도 대충 봤다. 그리곤 반에 5등인가로 들어갔던걸로 기억. 하지만 첫시험에서 반 2등을 했고, 내내 2등만 하다가 중학교땐 전교 1등까지 올라가며 한번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연합고사라는걸 보는데 이 시험 역시 성적순으로 학교 배정을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별 필요성을 못느꼈다. 당시 친구들은 수능시험처럼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난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내 책만 봤다. 삼국지를 탐독했던 기억이. 결국 고등학교에 반에서 13등인가 9등인가로 들어갔다가 첫시험에서 전교 4등, 2학년엔 전교1등으로 올라갔다. 공부를 잘했다는 걸 자랑하는게 아니라 내가 반항아였다는 예를 말해주는 것이다.

  내 딴에는 '필요의 논리'라는 것이 있다. 필요치 않으면 안한다는 입장. 그리하여 난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꽤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어 문맹이 되어있으며 여전히 난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영어를 좋아했다면 계속 공부를 했겠지만 - 이때 사용되는 논리는 '좋아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성의 논리'다 - 좋아하지도 않았고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했던 것이므로 졸업과 동시에 종쳤다. 그리고 이후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했다. 드럼치고, 공연하고,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하며 대학 2학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다. 앞으로 어찌 바뀔지는 모르지만 난 지금의 내 취향에서 바뀔  필요를 못느낀다.

  군대의 억압적 권위주의와 권력, 위계질서 따위가 싫어 한참을 고민했고, 공군에 입대해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진주로 갔으나 그곳 훈련장에서 5일 후 나와 서울로 향했다. 일부러 인성검사에서 싸이코 짓을 하고 나왔다. 장교들 앞에서 면접 보며 환청이 들린다는 등 이상한 소리도 지껄여댔다. 얼마나 재밌던지. 나름 내 딴에는 군대를 조롱한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후 일년 뒤 육군에 갔으나 그 사이에는 반전평화주의에 입각한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등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위 친구들과 선배 후배,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 군대를 옹호하는 선배와 논쟁을 벌이다 홧병으로 왼쪽 얼굴이 마비되는 증세도 겪었다. 안면마비. 한달동안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한 끝에 제대로 돌아왔지만 얼마나 놀랬던지. 그런 오랜 시간의 사회과 국가에 대한 불평불만들, 나름대로의 알아주지 않는 독자적인 선언와 행위, 그것은 정말 말그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나를 키워내는 과정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홀든에게서 난 과거의 나를 느꼈고, 사회와 조금 타협한 지금의 내 안에 잠재하고 있어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반항아를 본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는 것은 홀든은 누구에게나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시작하고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고민들, 그리고 툴툴 거리며 불만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너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고, 내 친구의 모습이고, 우리 부모님의 모습, 내 자녀의 모습이다. 홀든은 어디에나 있다. 홀든은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매우 솔직하다. 솔직하지 못한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보다 반항심을 표출하는 홀든은 더 정상적이다. 홀든의 불평불만은 우리가 방과 후 엄마에게 털어놓는 불평불만이고, 우리가 친구를 만나 못마땅한 친구를 뒷다마까는 불평불만이다. 그는 전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작가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통해 자신을 반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유한 유태계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홀든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와 컬럼비아대에서도 공부를 했지만, 은둔형의 작가로도 알려져있다.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다 마쳤지만 샐린저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홀든을 항상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닐까. 감명깊게 봤던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에는 한 늙은 작가가 조그만 아파트에 살며 바깥 외출을 삼간 채 심부름꾼이 사다주는 식료품을 냉장고에 넣어둔 채 꺼내다 먹으며 삶을 연명한다. 집 밖을 나가길 꺼리는 그 노인네는 수첩에 항상 뭔가를 메모하고 다니는 흑인 학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글쓰기 훈련을 시키게 되며 세상과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갑자기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은둔형의 노인이 '샐린저'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샐린저는 내면 세계에 심취해있던 사람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밖에 나와 빛을 보는 것을,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는 두번 결혼을 했고 두번 이혼을 했으며 80년대 말에 세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언론에 공개되기를 극도로 꺼렸다. 그 자신이 홀든이었던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247-248)

 모든 것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거부하는 홀든의 현재 상황을 잘 찝어낸 말이다. 또한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치관이 확립된 뒤에도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단념해버린다는 말. 지금 이런 사회환경에선 내가 뜻하는 바를 펼칠 수 없어, 난 시대를 잘못 태어났어, 라고 불평하는 이들은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단념해버린다. 그리곤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 자신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과의 소통조차 거부한 이들이다. 

  학교교육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불평, 학교에선 아무것도 배울게 없어, 도대체 학교를 왜 가는지 모르겠어, 라고 불평하는 학생들 많다. 학교에서 내가 해야할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도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도 쓸모가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하면 더 좋겠는걸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햐 하는지를 생각해볼 순 있다. 앤톨리니 선생은 학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퇴당한 홀든에게 이런 말들 한다.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히도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냥 재능 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p250)

"그 밖에도 학교 교육이란 건 많은 도움을 주지. 학교 교육이란건, 어느 정도까지 받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지. 자기의 사고에 맞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돼. 나중에는 자기 사고의 일정한 크기에 어떤 종류의 사상을 이용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될거야. 게다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상들을 하나하나 시험해 보는 데 드는 시간도 절약해 주고 말이지. 결국 학교 교육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크기를 알게 해주고, 거기에 맞게 이용하게 해주는 거야."(p251)

  이러저런 고민으로 방황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여, 내 안의 홀든을 위해 이 책을 읽을지어다. 홀로 고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홀든과 대화를 시도하자. 자꾸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지 말고 숨지말고 홀든과 대화하자. 그리고 훌훌 털어버리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실망하지 말자. 나의 꿈을 펼칠 수 없다고 미리부터 좌절하지 말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먼저 홀든을 만나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방황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을 스물 여덟 먹은 해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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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검둥개 > 용서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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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공지영의 신작소설을 읽었다고 했더니 이 작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그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말했으니 망정이지 곧이곧대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질질 짜며 읽었다고 했으면 무지하게 민망할 뻔 했다. 읽기는 무척 빨리 읽었는데 읽고 나서는 감정이 복잡했다. 뭔가 신파에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가 그렇게 쉽게 무장해제가 되었는지도 영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렇게 휘둘려서 읽은 책을 어떻게 평가를 하나 싶었다.

인기작가라서 그런지 이 작가의 작품들에는 몇가지 편견들이 따르는 듯 하다. 나 자신도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과거 작품들에 대해 지나치게 감동/감상과 신파에 치중한다는 불만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눈이 팅팅 붓도록 울면서 읽은 이 책을 (그리고 그랬던 나 자신까지를) 나는 수상스런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다 냉정한 머리로 (그러나 역시 두 번 눈물을 찔끔하긴 했다) 재독을 마치고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다.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 이 책의 미덕은 여러가지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가난과 범죄 & 아동학대와 범죄와의 상관관계, 성폭력/강간과 그에 대한 가족 혹은 사회 단위에서의 무관심 및 폭력, 사형제도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많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하지만, 결코 그에 이론적 사변을 들이대지 않는다. 이 책의 주변적 등장인물들은 대개 전형적이지만, 그럼으로써 흔하게 널린 문제들을 소설 중간중간에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소설 속의 여자들 특히, 가족소유 대학재단 덕에 교수직을 꿰어찬 문유정과 전직 영화배우 출신으로 교수 아내가 된 문유정의 셋째 올캐 서리나/서영자는 일반적으로 그런 배경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품을만한 예상을 벗어나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주인공인 사형수 정윤수의 과거는 거의 주말드라마스러울 정도지만 작가의 치밀한 묘사력에 힘입어 현실성을 획득한다. 공지영의 문장들은 아름다우며 또 빨리 읽힌다.

이 책은 상처, 증오와 불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굳이 꼽으라면 나는 가난한 노파가 자기 딸을 살인한 자를 용서하겠다고 구치소로 찾아와 정윤수와 대면하는 장면과, 문유정이 정윤수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을 강간했던 사촌오빠를 그리고 강간당한 딸에게 등을 돌렸던 제 어머니를 용서해보려고 죽을 힘을 쓰는 장면을 들겠다.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상처라는 것이 있다. 그런 상처는 무릇 네게 돌 던진 자를 용서하라, 따위의 어설픈 경구로 쉽게 아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런 종류의 상처라는 게 무엇인지를 소설에서 잘 그려낸다. 어설프고 쉬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문유정의 어머니는 끝내 딸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병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 두 아들을 두 번씩이나 버린 정윤수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무의탁노인 신세로 발견된다.

"착한 거, 그거 바보 같은 거 아니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거 무른 거 아니야. 남 때문에 우는 거, 자기가 잘못한 거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거, 그게 설사 감상이든 뭐든 그거 예쁘고 좋은 거야.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야......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 하는 법이야.  ....(중략)...  아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는 거는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것보다 더 나빠. 중요한 건 깨닫는 거야. 아는 것과 깨닫는 거에 차이가 있다면 깨닫기 위해서는 아픔이 필요하다는 거야."

이것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구절, 나로 하여금 이 작가 특유의 감상성에 보다 너그러운 시선을 보내게 만들었던 구절이다. 종종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 작가 작품들의 감상성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발전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흠을 하나  들자면, 소설 전반부에 문유정이 정윤수에게 감정이입되는 부분의 템포가 지나치게 빨라 독자에게는 되려 감정이입이 덜 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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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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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유효성’을 믿는가? 무라카미 류는 <러브 & 팝>의 후기에서 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문학의 유효성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라고.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또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테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닥거려주는 것이 또한 문학의 힘일 테고 그것이 문학의 유효성일 테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여전히 그것이 유효할까? 한 권의 책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패러디 동영상이 더 큰 위력을 보여주는 지금, 문학작품보다 실용서가 월등히 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그 문학의 유효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기대는커녕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은 모든 작가들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화두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공지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들을 연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던 작가일수록 더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저자의 글에서 이 화두를 직접 확인해보기란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작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작년 <별들의 들판>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말을 전하려고 했던 그것도 문학의 유효성을 말하려는 작가의 몸짓이 아니었겠는가. 그 몸짓에 이어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 공지영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한 걸음 더 앞에서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서로’를 비추면서 또한 ‘보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 같은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비추는 첫 번째 거울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화려함 속에서 빈곤을 허덕여야 했던, 가수가 되어 화려한 무대에 올랐지만 사는 동안 죽고 싶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미대 교수 ‘유정’이다.


두 번째 거울은 세 명의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은 ‘윤수’다. 유정과 윤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정의 고모이자 윤수를 달래주려는 모니카 수녀 덕분에 다른 차원의 이들을 서로의 눈을 보게 되는데 그 ‘마주침’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독자들의 ‘마주침’과도 같다.


‘몰랐다’고 외면했던 어두운 곳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나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서글픔과도 같은 그것은 윤정이 윤수를 보며 눈시울이 불거지듯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것은 신파조의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죄인의 억울한 인생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강요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감동’과 부조리한 세상의 어긋난 정의 때문에 만들어진 ‘아픔’이 신의 장난처럼 비극적으로 서로를 찾아갈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강간에 당한 피해자가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사실이나 자본 때문에 밤새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있는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형제도’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또한 오해 속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있다는 혐의 때문일까? 작품 속에서 사형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알베르 까뮈나 빅토르 위고의 그것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그 탓일 테다.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고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던 그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여기게 된다. 그 과정은 세속적인 해석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더불어 또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행위인 ‘용서’가 등장해 사형수인 윤수는 천국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처럼 보이고 윤정은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다.


윤수가 윤정을 보며 느끼듯, 윤정이 윤수를 보며 느끼듯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그 거울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 밖의 사람들에게도 보여 진다. 무슨 뜻일까?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우리네 사람들이 우리와 닮은 그들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인가.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다는 것이겠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인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불편한 책이다. 이 점은 이전에 발표됐던 작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별들의 들판>도 읽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더하다.


허나 신영복 교수가 ‘서경’을 해석하며 말했듯이 불편한 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문학이 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곳을 보게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촉구했을 뿐이다.


저자는 작품을 책상 앞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회 구석구석을 보려고 했던 그 노력, 설사 그곳이 더러운 거품들이 들 끊는 하수구일지라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펜 끝에서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말을 토해내는 인물들의 절박함을 자신의 것인 양 느낄 수 있는 것도 작품이 지닌 가치 중 하나다.


장편소설로는 7년 만에 발표한 공지영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전에 발표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건드렸다면 이 작품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작가의 작품 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만큼 격동적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적은 없었다. 광고 같은 말이지만 이 작품을 두고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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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가 7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란다. 인터넷 서점 메인 화면에 떡하니 뜨는데 익숙한 이름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카트에 담아버렸다. 그녀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던 것일까? 제목이 끌렸던 것도,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글도 안 읽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렇게... 만나야만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하던데, 어쩌면 책도 그와 같은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보다. 읽어야만 하는 책은 언젠가 읽게 마련이라고 할까나.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을 경험치 못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태도는 각자 다를 것이다.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자 안간힘 쓰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혹자는 스스로 ‘끝’을 결정지으려 든다. 자살, 스스로 생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은 종교에서는 이를 ‘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와 같은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불문하고 말이다. 아니,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태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기에 우리는 아직 너무 어리니 말이다.


사형. 초등학생 때도 이 주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이는 충분히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그만큼 특정 결론을 선택하기 힘듦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삶은 고귀하고 다른 누구의 삶은 저속한 것이 가능한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 그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 등등. 수많은 사례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각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지배적인 사고는 존재할 것이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혹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 그들의 삶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이고, 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을 긁어모은 것에 불과한 듯 하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그곳을 드나들며 작가는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100% 착하거나 100% 악하진 않다는 사실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범죄인으로 지목된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그린 ‘윤수’라는 인물은 그러했다.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강간한 파렴치범, 사회는 그의 가슴에 빨간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경직된 눈빛의 내가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학까지 마친, 어떻게 보면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겐 감당하기 힘든 상처가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그래도 나만은 감싸줄 것이다 믿었던 어머니마저도 창피하게 여기며 외면하게 만든... 이미 세 차례나, 타인 아닌 나를 살인하기 위해 애썼던 인물. 나는 타인을 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가 허락한(?),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윤수의 얼굴을 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지난 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인물을 마주 대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치고자하는 강한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상처 입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윤수였기에,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동생마저도 앗아간 지독한 가난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 그는 외로웠다. 냉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사형은, 타인이 자신의 삶을 멈추게 해준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가 자신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죽음은 축복이었다. 밑바닥만을 기어다니던 자신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유명인이 되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윤수 못지않게 내 안에도 상처가 많았다. 신뢰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 듯 했다. 힘겨워 비틀거릴 때마다 오히려 그런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게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다. 그것도 아주 짜릿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과 상대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기 자신을... 그것은 삶을 포기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을 손가락질 한다 할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꼴통’이라 정의한다 할지라도...


감정 몰입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 아니,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존재하는 상처들을 헤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겨우 딱지가 생겼는데 그 딱지를 잡아뜯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맺힌 선홍빛 핏물을 대하는 듯, 그렇게 한 움큼 눈물을 쏟아냈다.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고 싶을 땐 울어야만 하는 거라며...


언젠간 나도 죽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진 나 역시도 하루하루 불안히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일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가장 맑은 영혼을 발견하는 것이 나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 결코 끌어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궁극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버려왔던 내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것... 이 숙제들을 완수할 수 있을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는진 잘 모르겠다.


크게 한 번 울고 또 한 번 웃자. 지저분히 쌓인 복잡한 감정들을 잠시 접어두고, 그렇게 나를 치유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행복이 뭔지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는 말을 뱉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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