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ooni > 감수성의 쿠데타.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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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쯤에 한 시사주간지을 두루룩 넘겨보다가 누가 김승옥을 모르랴 하는 문장에서 난 모르는데, 하면서 멈췄다.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몇 개의 단편으로 한국문학사에 우뚝 섰고…. 그렇다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저런 류의 말투가 싫다. ‘여자라면 누구나’, ‘남자라면 당연히’, ‘인간이라면 마땅히’, ‘한국 사람은 항상―’. 일반화하고 다수화해서, 반대자와 소수자를 묵살해 버리면서, 입만 닥치고 있으면 너도 끼워줄게 하는 말투. 언제나 난 좀 빼 줘. 하고 싶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김승옥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서 자주 출몰했다. <르네상스인 김승옥>이라는 최신 비평집 출간소식이라든지, 누군가 김승옥의~ 하면서 인용해 놓은 것을 본다든지, 하면서, 김승옥은 대중적이며, 널리 알려졌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60년대를 대표하는데~ 와 반복되는 감수성의 혁명. 나는 타고나길 소심자라 빼 줘 하면서도, 은근히 끼고도 싶어한다. 무식이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도 아니지 싶어지기도 하고. 해서 일단 여섯명쯤,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딱 한 명이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내가 물어본 친구가 자기 친구, 국어과목 임용고시 준비하는 친구에게 문자로 물어본 거였다. 같은 답이 또 돌아왔다. 60년대 감수성의 혁명.


결국, 무진기행을 샀다.


김승옥 소설 전집의 제 1권인 이 책은 열다섯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연습(生命演習),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이 책에 있는 단편들은, 60년대에서 70년대에 씌여졌다. 4.19(사태, 의거, 항쟁, 혁명)가 5.16(혁명, 쿠데타)으로 이어지던 시기. 그 무렵의 시대색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5.16은 4.19의 불필요한, 기형적 반복으로, 보수반동의 퇴보였다. 하지만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적 성장(무시무시한 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은 그러한 퇴보를 통해서 나아간 것이다. 퇴보하는 전진, 전진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 이런 제자리걸음이 반복되고, 고착되서 습관화되고, 마침내 사회의 구조로서 굳어진 듯한 분위기 말이다.  


4.19와 5.16. 날짜로 소환되는 이 두개의 사건은 해마다 반복되는 동지와 하지처럼, 연도를 상실하고, 영원처럼 순환하는 그 무엇으로 현실에 끼어들어있다. 끊임없이, 5.16은 4.19를 무력화시킨다. 4.19는 5.16을 위협한다. 4.19는 5.16을, 5.16은 4.19를 참된 혁명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항쟁과 쿠데타의 무정부 시대에 혁명은 총체적으로 실종됐다.


많은 사람들이 짧고 격렬한 4.19적인 감성들을 허탈한 쓴웃음 한번으로 상실하고, 5.16의 질서 속으로 편입해 들어간 이야기들을 해준다. 인생은 원래 그렇고, 세상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며, 인간은 다 똑같다 라는 거다. 


이 소설들도, 다분히 그런 느낌이었다. 4.19에 대한 완전 승리를 주장하는 5.16.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乾>. 빨갱이의 시체를 갖고 싶어 하는(이건 정말 핵심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표현이었다. 남한의 현대사를 관통한 이 욕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꼬마가 좋아하는 동네 누나를 윤간하려는 형과 형의 친구들의 음모에 동조한다.


소설이 골몰하는, 문장과 단어들이 달려가는 지점은 소녀를 욕망하는 형들의 음모에 가담하는 소년의 심사다. 강간당하는 소녀의 입장에 대해선 단 한단어도 할애되지 않는다. 소년은 가해자, 음모자, 학대자의 입장에 나약한 망설임을 안은 채, 적극적으로 편승한다. 이 소설의 선명한 일관성을 주도하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의 삭제에 있다. 욕망의 피해자에 대한 상대적 기술은 전무하고, 욕망을 좌절시킬 어떠한 소설적 장치도 없다. 인물의 내면에서든, 외부적 압력으로든.


그뿐만 아니라, 경험된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다른 강간당하는 피해자가 등장하는 <염소는 힘이 세다>란 소설. 여기에도 한 무기력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불법 염소 고기 집의 그 아이는 손님으로 온 버스회사 직원에게 강간당하는 누나를 보고도 아무 것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그 광경에 완전히 압도된다. 소년이 목청높여 더럽다고 비난하는 건 누나가 폭행당한 댓가로 버스안내양 자리를 구한 다음, 누나에게이고,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고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은 피해자인 누나 쪽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마치 한쌍처럼 느껴졌다.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군사력으로 국민을 억누른 독재자다 하는 말이 그는 경제를 발전시킨 근대화의 영웅이고, 국민들은 그 덕에 먹고 살았으며, 하는 반박의 말과 한쌍인 것처럼.


누나의 그런 태도는 <차나 한잔>에서 등장하는 해고당한 만화가가 차라리 정부에서 자신의 만화를 탄압해서, 필화사건으로 번져주기를 바란다고 기술한 심리나 <야행>에서 무턱대고 자신의 손을 이끌고 강간해 줄 남자를 기다리는 유부녀의 심리와 비슷하다. <야행>에서의 그녀는 공식적으로 누구의 아내조차 아닌 독립된 직장인이지만, 실은 남편이 있고, 그 밑에는 낯선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어하는 심리마저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차나 한잔>에서의 해고당하는 만화가는 자신의 만화가 개재되지 못한 게 정부의 탄압이냐고 묻는 동네 사람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속으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으나 좀처럼 그런일은 없다 라고까지 한다. 만화가가 찾아낸 해고의 사유는 만화가 웃기지 않아서였다. 잘못된 것, 부족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을 노력과 연관시켜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와 나>에서는 역전되어 있다. 입석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번잡하고 불편한 기차에서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러 먼 역으로 돌아가서까지 좌석을 차지한 나와 그런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며 양심에 대해서 훈계하는 그가 나온다. 결국 같은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어, 나는 가르친 대로 행하라는 그의 구호에 잠시 휩쓸릴 뻔도 하지만, 결국은 그가 미래를 발명한다는 말에 격렬한 저항감을 느끼며, 그를 적이라고 규정짓는다.


<그와 나>에서의 나는 연대를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개인. 입장과 상황이 다른 개인이다. 그러한 개인은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해서 맞서게 된다. 연대감이 균열되는 풍경에 대해서는 <들놀이>에서도 반복된다. 독재적인 사장이 초대한 들놀이에 초대받지 못한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를 동정한 이군의 들놀이를 함께 빠지기로 한다. 하지만 초대장이 없어서 못가는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고도 의리 때문에 가지 못하는 이군 사이의 간격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생생한 찜찜함과 거북함으로 벌어진다.


왜소한, 작아진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보다 분명한 것은 <역사>.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지만,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고, 그나마 열심히 해봐야 돈을 더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남과 똑같이 일할 뿐이다.


<확인해 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은 낙선한 소설가의 실패담이다. 미리 등단 소감까지 준비한 그의 실패에 대한 소감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거지의 정열을 운운할 때는 가슴이 찡할 정도다. 하지만 소설 중에는 그 소설가가 쓴 소설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장했던 무엇과 시대가 틀어졌는지도 나오지 않아서, 소설가는 자신이나 사회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사색하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고, 그의 좌절의 깊이가 그대로 욕망의 강도이다. 등단과 성공, 부와 명성, 여자를 향한.


이 욕망이 성공했을 때의 광경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에서 보여진다. 일상적인 낮은 것들, 비참과 가난과 구질구질함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소설 쓰는 벌레가 된 작가는 호화로운 호텔로 아내를 불러들일 수 있는데,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에서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서울로 향할 때 느끼는 1964년식 수치심, 부끄러움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가 기록된 1979년에는 이미 흔적도 없다.



<싸게 사들이기>는 텔레비전 월부값을 아내가 매춘으로 번 돈으로 충당하는 서점 주인과 그 서점주인을 속여먹는 학생인 내가 애인에게 가기 전에 창녀에게 들리는 남자(학생인 나의 친구)에 관한 에둘러가는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서로 속이는, 정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관계들로 점철된 이 복마전에서는, 속는 자도 불쌍하지 않고, 속이는 자도 악당이 아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물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안과 가난뱅이라 그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내가 아내의 시체를 판 책장사의 자살을 함께 경험하는 이야기다. 함께 라고는 해도, 나와 안의 태도는 극한의 궁지에 몰린 책장사를 귀찮아하는 듯 데면데면하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아무런 책임 추궁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달아나 버린다. 어쨌든 그것은 남의 일이니까. 이 부분은 소설 속 앞 부분에 나와 안이 나누는, 서로가 경쟁하듯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과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느 술집에 같은 이름의 창녀가 몇 명이더라 하는 사소한 것까지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착하는 그들(부자와 가난뱅이, 합해서 세상을 구성하는 두 종류의 인간)은, 남의 일에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냉혹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서는 첫 번째에 나온 소설 <생명연습>에서도 언급이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대여섯번의 섹스를 하고, 싫증을 느껴 가차없이 차버린 뒤 유학길에 올랐다는 비정한 연애담의 형태로 말이다.



5.16은 확실히 성공했던 모양이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체제는 스스로 원하는 인간들을 양산해 낸다.) 이것은 5.16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강대한 존재에게 복종하고, 굴복하길 원하는 왜소한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실패를 거듭하며, 각자인 채로는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불신하는 진흙탕같은 복마전에서 투쟁하는 개인들. 이 무정부적인 인간군상들에겐 확실히 독재자가 필요한 듯 보인다. 또 훌륭하게 그러한 욕구를 기록이라는 형태로 긍정하고,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내게 이 소설들은 감수성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감수성의 쿠데타로 보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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