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 보이는 가장 빠른 방법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카페의 통유리에 왼쪽 어깨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오래 쳐다보느라 발길이 섰다. 남자는 색 바랜 청바지에 얼핏 보면 장화처럼 보이는 낡은 워커를 꿰어 신고 다리를 꼬고 있었다. 손목 부위가 촌스럽게 처리된 빨간 점퍼가 걷는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챘다. 오래 보아도 어디 한 군데 멋스러운 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 들었으므로 전체로서 아름다웠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중했으므로 아름다움이 더욱 선명했다. 나는 설핏 새어나는 커피 향을 뒤집어쓰고 바위처럼 서서 그저 그의 손끝이 누르고 있는 자리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누가 쓴 어떤 책이 그를 함몰시킨 건지 알기 전에는 발걸음이 도저히 떼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기다렸고, 고른 속도로 몇 페이지가 넘어갔으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책등이나 표지는 만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우연히 고개를 돌린 남자의 시선과 내 시선이 얽혔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을 것이다. 남자는 웃었다. 검은 수염과 흰 수염이 적당히 섞여 그 웃음의 주변을 두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이름 모를 그 책 역시 모르는 대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좋은 책이 읽는 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좋은 독자가 읽는 책을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단어를 섭취하고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자아도 확인한다.

알베르토 망구엘은유가 된 독자

 

한 사회의 서적과 관련된 전반적인 양상은 거꾸로 그 사회의 자유의 정도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지표다한 사회의 서점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 그 사회의 정치 체제나 현황에 관해 연구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전면적인 이해의 방법일 수 있다어차피 관제의 능력은 직접적인 정치 폭력의 운용을 감추지 못한다자유의 수많은 장애물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지만 이러한 궤계들은 결국 책을 속이지 못하고진정으로 품격을 갖춘 독자들을 속여 넘기지도 못한다.

탕누어마르케스의 서재에서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것을 찾지만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세상과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고병권철학자와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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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3-3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선을 단번에 잡아 채는 손목 부위가 촌스럽게 처리된 빨간 점퍼를 상상합니다. ㅎㅎㅎㅎ

syo 2018-03-30 07:2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시뻘겅색에 어깨부터 팔을 따라 하얀색 선이 내려오는 근자에 보기드문 점퍼였어요.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면서 지나갔어......

단발머리 2018-03-30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아름다웠을 빨간 점퍼의 그 남자분을 상상하게 되네요.
책을 읽고 있다면 누구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건가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도대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가요.... ㅠㅠ
이 와중에도, syo님 굿모닝^^

syo 2018-03-30 08:2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이미 차고 넘치시는 것 같은데요.
빨간 점퍼의 아죠씨는 읽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름다운 줄 알았으나, 단발머리님 쓰시는 글을 읽고 있으면 제가 눈으로 한 번 본적도 없는 단발머리님의 읽는 모습이 아름다울 줄 충분히 짐작이 가잖아요. you win. ㅎㅎㅎㅎㅎ

핫한 불금입니다. 단발님도 핫모닝^-^

다락방 2018-03-30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어딘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면,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렇게 쇼님을 아름답다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겠지요.
이를테면 저 같은 사람이 말입니다.
:)

syo 2018-03-30 08:34   좋아요 1 | URL
그러나 syo는 책 읽으면서 막 코도 파고, 이도 쑤시는 스타일이라 당최 아름다울 겨를이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손 같은 손가락으로......

다락방님이 카페에서 책을 읽고 계신데 누군가 다락방님을 바라보고 있고, 그걸 눈치 채신 다락방님 속으로, ‘그래 인마, 아름답지? 니가 아주 시선을 떼지를 못하겠지? 봐라, 양껏 봐라, 닳는 것도 아닌데.‘ 이러시면서 눈치 못 챈 척 계속 읽으시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괜히 머리 막 귀 뒤로 넘기면서......

오해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03-30 08:35   좋아요 0 | URL
멍하니 아름다운 syo님 바라볼 때, 저도 불러주시면....
옆자리에 앉아 가만히~~~~~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18-03-30 08:36   좋아요 0 | URL
바라보려다가.... 막...... 뭐를 하신다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3-30 08:39   좋아요 0 | URL
물론 다 농담입니다. 웃기려고 그런거죠,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설마 syo가 진짜 그럴려구요.
손가락은 바꿔준다구요, 저도 사람인데.

........아마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3-30 09:37   좋아요 0 | URL
거짓말... 손가락 안바꾸면서.........

syo 2018-03-30 09:55   좋아요 0 | URL
귀신같다..... 진짜 보고 계시나...????

단발머리 2018-03-30 10:21   좋아요 0 | URL
아니, 다락방님 방에 가서 치즈 케이크에 한껏 빠졌다 돌아왔더니,
아니.... 여긴 아직도 손가락 바꾼다, 안 바꾼다 이러고 있는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았어요, 안 바꾼다!에 1표예요!!

syo 2018-03-30 10:27   좋아요 0 | URL
왜들 이러십니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누구나 어릴 적에는 코판 손 입에 가져가 보고 그러는 거잖아요.

전 다만 아직 어릴 뿐이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8-03-30 11:37   좋아요 0 | URL
위의 댓글이 마지막이 되면 어떻게 해요~~
안 돼요, 그러면....
syo님은 어릴 적에 책 읽다가 코 판 손으로 어기엉차 이렇게 하는 사람이 되는거고.
나랑 다락방님은 아니예요.
게다가 아직 어려서... 아직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3-30 11: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8-03-30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3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ueyonder 2018-03-3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뭇한 광경입니다. ㅎㅎ
글쓰는 솜씨가 정말 일취월장이시네요!

syo 2018-03-30 14:25   좋아요 0 | URL
뜻밖의 칭찬 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

그 아저씨가 읽던 책이 뭐였는지 확인 못하고 돌아선 게 계속 아쉽습니다.

stella.K 2018-03-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제가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벤치에
어느 호리호리한 외국인이 그것도 흑인 남자였습니다.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게 참 아름답더군요. 한참 오래된 일인데
그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사람을 사로잡으려면 그 방법도 썩 좋은 방법이죠.ㅋ

근데 우리나라 사람이 우연히 눈길이 마주쳐 서로 미소를 교환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분명히 한쿡 사람 맞나요?ㅋ

syo 2018-03-30 14:28   좋아요 1 | URL
40대에서 50대까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인 외모의 아저씨였습니다.

이미 웃는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다가 고개만 제 쪽으로 돌렸던 것 같기도 하고, 상황이 정확히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대단히 멍청한 상태로 그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그러고보니 제가 엄청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참지 못하고 웃었을 확률도 있겠는데요ㅋㅋㅋㅋㅋ


clavis 2018-04-02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도 이쯤에서 사라져주셔야겠어요 이미 너무 잘 쓰시면서 누구가 누구를 제거하신다구~~ㅎㅎ

탕탕♡♡

syo 2018-04-02 23:17   좋아요 0 | URL
휙휙, 으하하하.

clavis님께서 고맙게도 그 총을 진심으로 쏘셨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진실은 아니어서 손쉽게 총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syo가 애를 써봐야 프메님의 글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