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를 마치다.
오민석,『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를 마치다.
실비아 페데리치,『캘리번과 마녀』를 읽기 시작하다.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에 밑줄 긋느라 한 세월을 보내다.
박찬부,『라캉: 재현과 그 불만』의 서문만 읽고 좋다.
허경,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읽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똥개는 왜 똥을 못 끊고, syo는 왜 철학책을 못 끊는가에 관하여
syo는 어릴적부터 어쩐지 특별한 놈이라는, 특별한 놈을 넘어서 특이한 놈이라는 말을 들으면 짜릿함을 느끼는 성향이었다. 전도가 유망한 변태, 변태 데뷔를 앞둔 연습생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고 또 눈에 띄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다니진 않았다. syo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러니까, 쟤는 뭐 딱히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튼 희한한 놈이야, 뭐 그런 말을 듣고 다니는, 보기 드물게 독특함과 시크함, 똘끼와 무심함을 고루 갖춘 녀석이었던거라. 무슨 짓도 할 수 있지만 무슨 짓도 하지 않는, 무슨 짓도 하지 않지만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대체로 무해하지만 방심은 금물인.
고1때 한 반이었던 친구 녀석이 syo의 큰아버지를 쏙 빼어닮았으므로 큰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더니 한 주도 못 가 전교생이 다 그애를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다른 친구들이 그애를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데는 오직 그애가 큰아버지라는 사실만 중요하지 그애가 큰아버지인 이유는 조금도 중요치 않았나 보다. 하여간 몇해 전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연히 그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을 때 syo가 말했다. 큰아버지야,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게 이제 큰아버지라고는 큰아버지 너밖에 없다. you are the only 큰아버지. 그의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syo야, 너는 비록 내 예상만큼 크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썩 착실하게 또라이로 자라 주었구나. 그러자 고1때 그가 해주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syo야, 넌 정말 공부 열심히 하면 안 돼, 넌 똑똑하게 자라면 분명 크레이지 사이언티스트가 될 거야, 심심하다고 핵폭탄 같은 거 만드는 그런. 그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은 당시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syo가 신나가지고 교실 뒷편에서 남의 눈을 피해 조용한 기쁨의 스텝을 밟았던 기억이 있어서다. 남의 눈에 띄면 시크하지 않지. 어쨌든 돌아보면, 큰아버지 덕분에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학업을 게을리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배트맨의 추격을 피해 숨어다니며 심심풀이로 핵폭탄을 만들어 파는 빌런이 되지 않을 수 있었고, 또 그 덕에 북에는 김정은 남에는 syo, 이딴 동사서독 식의 구리디 구린 칭호를 얻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큰아버지 덕분에 한반도는 조금 더 평화로워진 셈이다. 큰아버지 포레버. syo의 인생이 좀 더 지루해진 것은 큰 평화를 위한 조그만 부작용일 뿐이다.
핵폭탄은 만들지 못했지만 핵폭발은 1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성적표에서 터지던 시절, 나도 공대놈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이 공대놈들과 액션 리액션, 도전과 응전의 나날을 보내던 그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syo는 그저 도서관에서 빌려온 문태준의 시집 한 권을 강의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뿐인데, 동기들의 동공 면적이 제곱 단위로 확대되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던 것이다. 우와, 너, 와, 이거, 오와, 너, 와, 이거 뭐, 뭐냐? ......뭐가 뭐야, 책이지. 그렇지 책인데, 책인데, 이게 무슨 책이냐고. ......시집인데? 시집? 시집!? 대박. 얘들아, 여기 좀 봐라 syo가 시집가져왔다! 뭐라고? syo가 시집 간다고!?
시집은 읽는 게 아니라 가는 것인 죽은 시집의 사회, 전자과. 남자가 시집 간다는 말이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 염두에도 두지 않는 집단, 전자과. 그때 syo는 알았다. 이거로구나. 다음 날,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강의실 책상에 내려 놓았을 떄, syo는 혼자 책상 두 개를 차지하며 아주 조용하고 쾌적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철학책에는 공대생 퇴치효과가 있었다.
이블 지니어스가 될 만한 두뇌를 타고나지 못했기에 핵폭탄을 포기하면서 버렸던 특이함을 향한 변태욕망은 의외로 성취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는 심심풀이로 핵폭탄을 만드는 인간보다 심심풀이로 철학책을 읽는 인간을 더 특이한 놈으로 보는 집단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여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syo가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며, 열심히 읽어도 주변에 이야기 나눌 사람조차 없는 철학책을 끊지 못하고 계속 읽기 시작했던 것이. 요즘도 그렇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가끔은 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치있고 매력적인 놈인가를 느낄 때가 없지는 않지만, syo가 철학책을 읽는 이유 가운데 8할은 여전히 특이함을 향한 변태욕망 때문인 것 같다. 최근에 무슨 책을 읽으셨어요, 라는 질문에, "언어의 온도"가 좋더라구요, 하고 흔하게 나올 수 있는 대답을 하기보다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언제 읽어도 참 좋은 책이지요, 막 이러면서 잘난 척도 하고, 이 인간 참 근래 보기 드문 희한한 인간일세, 하는 취급도 받고 싶은 것이다.
기왕 말 나온 김에 알라딘의 자타공인 입문서 빠돌이 syo의 철학 입문서 소개시간
철학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 상대가 이 책을 권해온다면, 우선 잘 생각해본다. 내가 혹시 "서양철학을 알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렸다." 라고 했거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없어도 생활에 지장없는 신체의 일부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라는 뉘앙스를 풍긴 것은 아니었는지. 그게 아니라 그냥 취미나 흥미 수준으로 철학책 이야기를 꺼냈는데 답변으로 이 책의 이름이 나왔다면, 그 사람 자주 만나는 것은 권장하지 않겠다. 모쪼록 책이란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다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흥미만 가지고 이 책에 덤벼들었는데 어렵지 않게 완독할 수 있었다? 그럼 당신은 철학이 천직입니다.
차라리 이걸 권하지. 일단 두께가 얇고 구어체 존댓말이, 이렇게 다정하고 쉽게 이야기해주는 데 못 알아 먹으면 사람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하는 분위기라 더 열심히 책을 읽게 만든다. 처음 읽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근데 쉬운 게 없다.



박홍순 선생님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강준만 선생님이나 장석주 선생님만큼은 아니지만 이 선생님도 꽤 종횡무진하는 편인데, 책들이 정말 다 괜찮다. 특히 이 책은 읽는 내내 대단히 만족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과 미술을 교차해가며 철학-미술-철학-미술 이런 순으로 다뤘기 때문에 굉장히 신선했다. 솔직히 말해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양식에 질렸다 싶을 때 한식 먹고, 이런 식으로 좋게만 표현하기에는 서양 철학이나 서양 미술이 둘 다 그렇게 즐겁기만 한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철학사 책이 왼쪽 뺨만 집중해서 때릴 때 그래도 이 책은 양쪽 뺨을 번갈아 때리며 맞는 사람에게 그나마 숨 쉴 틈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현대철학만 다루는 책들을 체감 난이도 순으로 정렬해 보았다. 기억에 얼추 세권이 다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남경태라는 이름은 목마른 초심자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이병창 선생님의 책은 앞의 것보다는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더 괜찮았던 것 같다. 조광제 선생님의 책은 세 권 중 제일 두껍고 제일 깊다. 그런데 조광제 선생님의 책은 어쩐지 쉬워 보이는 것도 읽다 보면 쉽지가 않다.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은 적게 아는 사람들이 뭘 어려워하고 뭘 쉬워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이 두 권은 친절한 그림 설명이 들어 있는데, 앞의 것은 귀여워 미칠 지경이고, 뒤의 녀석은 좀 어렵긴 해도 상세하다.



일본에서 나온 책들인데, 과연 표지만 봐도 호들갑인게 어쩐지 일본스럽다. 근데 막상 읽어보면 생각보다 괜찮다. 아무 것도 모른다 싶을 때, 이런 책으로 시작하면 참 좋다. 특히 앞의 두 권을 쓴 야무차라는 사람은 입문서를 꽤나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다. 그러나 구매하여 책장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읽겠다고 하면, 그러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데 파편적이다. 쉬운데 부유한다. 이해가 빠른데 증발도 빠르다. 강신주 선생님의 설명력이야 더 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syo 머릿속에 든 하찮은 철학 지식들을 형성하는 데, 그 설명 잘하는 강신주 선생님의 지분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건 왜 그럴까. 조리가 다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선생님의 책은 읽고 있으면 고민이 생기지 않는다. 너무 쉬운 설명, 너무 와닿는 예시. 그게 철학을 생각거리가 아니라 암기거리로 만든다. 그러니까 이 책들은, 이걸로 철학 공부를 한다기보다, 내게 맞는 철학자가 누군지 찾고 싶을 때나, 어떤 철학자의 저작을 읽다가 도저히 이 개념은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된다 싶을 때 핀포인트로 뒤적여 읽고 이해에 도움을 얻는 데 쓰는 게 좋다는 것이 syo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