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
1
봄. 아, 봄.
봄이라는 건 비나 바다처럼 글감으로 팔아먹기 좋아서 누린내 날 때까지 우려먹을 작정이었다. 꽃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봄비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강남 갔다 돌아온 제비 이야기하고 사랑 타령하고, 완전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랬는데, 우와, 잠깐 방심하는 사이 여름이 와 버렸다! 꽃은 다 졌고 비는 깔짝거림으로 증발했고 아, 제비가 웬 말, 날벌레만 집안에 득시글거리는 탓에 syo는 하루종일 박수 치면서 나날이 건강해지고 있다. 망했다. 이러면 결국 사랑 타령하고 사랑 타령하고 사랑 타령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랬다간 파멸이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서재 이웃 취소하는 마우스 클릭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 야속한 봄. 너는 왜 이렇게 해가 갈수록 날씬해지니.
굿바이 스페셜로 한 번 더 팔아봤다. 마지막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고 너를 보내니, 봄아, 내년에는 모쪼록 천천히 와서 처언천히 놀다 가.
2
새로운 자료가 쌓이면서 의사들은 신속히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중년 여성은 매력이 없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병적”이기조차 하다는 명백히 비과학적인 관점이 역사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다면, 과연 의료 전문가가 매우 제한된 연구에 기초해 HRT를 채택하고자 애당초 그렇게 열성적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의사들이 HRT를 처방하도록 제약회사가 부추기기는 했지만 여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런 거대하고 무모한 실험에 제약회사를 끌어들이는 데는 분명 의사들의 검증되지 않은 편견이 일조했다.
_ 바바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200년 동안의 거짓말』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는 멸시의 관념을 의식 혹은 무의식에 고착시킨 사람들이 그 관념을 추종하기 위해 과학과 연구를 빙자해 다양한 편견을 양산하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편견들을 격파하는 데 과학과 연구의 힘을 다시 이용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관념을 타격해야 끝날 일이다. 어차피 실제로 연구 결과를 만드는 것이 과학이 아니라 편견이라면, 관념이 존재하는 이상 편견은 무한히 생산되고 끝없이 변주될 것이라서 그렇다. 반면, 이미 형성된 편견들을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다음, 그 편견을 믿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편견들을 덧대어가며 관념을 형성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편견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관념을 건드릴 수 없다. 실제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의 속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틀릴 수 없는 인간이라는 확신이다. 이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는다. 관념도 편견도 모두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3
구석기시대인이 바위에다 짐승을 한마리 그렸을 경우 그는 진짜 짐승을 한마리 만들어낸 것이라 믿었다. 허구와 가상의 세계, 예술이나 단순한 모방의 세계는 현실의 경험과 분리된 독자적인 영역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세계를 상호 대립시켜 생각하지 않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의 직접적인 연속이라 보았다.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인류학자 레비브륄의 책에 나오는 어떤 쑤(Sioux)족 인디언의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었을 게다. 이 인디언은 어떤 탐험가가 들소를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우리네 들소를 여러마리 자기 책에 넣어간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현장을 보았으니까. 그후로 우리는 들소 구경을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_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원시인은 아니지만 원시인이 보면 너 참 남부럽지 않게 사는구나 하고 칭찬할 만한 모양으로 사는 중이다. 하루에 두 끼를 챙기고 두 번의 잠(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을 잔다. 매달 못 해도 서너 차례의 섹스를 하고 마음과 때가 맞으면 더 하기도 한다. 몸은 늘 잘 맞아서 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요인은 아니다. 잘 먹는 것, 푹 자는 것, 잔다고 하면 무난할 것을 굳이 먹는다는 몹쓸 말로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저러나 아름다운 그 일에 부지런 떠는 것. 사실 원시인이 아니라 미래인이 와서 봐도 그닥 나빠 보이지 않는 생활. 그렇다면 이 원시적인 필요들이 몽땅 충족되는 호화로운 일상 속 syo에게, 읽고 쓰기란 대체 무엇일까? 구석기인이 그린 그림은 그의 생필품인 것 같은데.
4
누가 움켜쥐는 것처럼 뒷골이 아프면서, 마치 뒤통수에 쥐가 나는 것 같은 통증 속에 아침잠을 깼다. 최신형 혈관 공격식 알람인가. 종일 머리가 무거워 활자가 눈에 잘 안 발린다. 힘주면 10초 만에 통증 올라와서 케틀벨 못함, 푸시업 못함, 딥스 못함. 마스터베이션 못 함. 커피도 안 먹고.
생활은 자꾸만 밍밍해지는데,
5
산책길 녹색은 자꾸만 쨍해진다.
--- 읽은 ---
137. 화재 감시원
코니 월리스 지음 / 최용준 외 옮김 / 아작 / 2015
솔직히 「리알토에서」읽고 여기까진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표제작까지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양심의 소리에 올라타 묵묵히 전진 또 전진하여 「화재 감시원」에 도착했는데, 물론 좋았지만 또 와방 좋지는 않아서 애매해진 것이다. 아, 어쩌지, 「내부 소행」 딱 한 개 남았는데 하필 걔가 제일 긴 애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어쨌든 읽기 시작했는데,
3시에는 잤어야 했는데 4시까지 읽고 말았다. 「화재 감시원」에서 오오, 했지만 뭐랄까 「내부 소행」의 경우는 우와와오오우오어아?! 했다고 할까. 다음 작품들은 어떨까. 「리알토에서」같은 식이라면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겠고, 「내부 소행」 같기만 하다면야 눈꺼풀이 없는 인간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처 읽겠지. 자, 그럼 이제 『여왕마저도』로 가자.
그녀가 그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짜라기에는 너무 훌륭한 게 있다면, 황녹색 대본을 들고 금빛 머릿결 위로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을 받고 서 있는, 킬디였다. 강령회 탁자 주변의 연보라색 방석에 웅크리고 앉은 얼간이들이 그런 뻔한 헛소리를 어떻게 믿게 되는지 항상 궁금했다. 흠, 이제는 알겠다.
왜냐하면 그 순간 거기 서서, 이 모든 게 사기라는 걸 알고 있는 순간에도, <헐크 4> 대본과 신용카드 명세서와 통화기록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얼마든지 조작되었을 수 있으며, 나 자신은 그저 두 사기꾼의 피날레를 장식할 전리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믿고 싶었다. 그저 영화 촬영차 조사 중이었다는 알리바이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H. L. 멩겐이 무덤에서 살아 돌아와 나를 도와서 사기꾼 박멸 운동에 나서고, 내가 대본을 쥐고 있는 저 손목을 붙잡고 킬디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키스한다면 우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것까지.
_ 코니 월리스, 「내부 소행」
138. 인공지능 생존 수업
조중혁 지음 / 슬로디미디어 / 2021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대체 뭘 해야 하냐는 물음에 ‘창의적인 일’을 하라고 대답한다. 허어.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 그러니까 뭘 먹어야 하냐구요. 당연한 말을 또 하나 들었지만 모른 척 꾹 참고 그렇다면 창의적 능력을 어떻게 키우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제일 처음 나오는 대답이 “잠을 잘 자세요”다. 허어…….
이해한다. 뭐 뾰족한 수 있겠냐고.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편집과 교열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을 책 속에 이런 문장들이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 하지만 인공지능이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 기술이 아닐 뿐더러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사람의 존속성에 대한 우려를 꺼내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사회적 존속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빅데이터를 통해 소프트웨어로 체계화하기 쉬운 영역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 창의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창의적 생각을 하기 위해 깊은 고민을 오랫동안 안 하기 때문이지 태어날 때부터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이야기한다.
- 인공지능의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가 데이터로 스스로를 학습하기 때문에 왜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했는지를 개발자도 모르기 때문에 원인 파악도 어렵다.
더 할 수도 있다.
조중혁 선생님은 무려 1996년부터 IT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한 ‘전문가’다. 저자소개를 보면 이런저런 수상 경력도 떠르르하다. 그런 자리에 올랐다면 당연히 일반 독자들보다는 훨씬 많이 읽고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필력과 독해력은 위의 저 비문, 혹은 어색한 문장, 혹은 비문이면서 어색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못 알아챌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건 정성의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저런 대목들을 만날 때면 독자로서의 syo는 지나치게 못마땅해하는 경향이 있다.
139. 중국집
조영권 지음 / 이윤희 그림 / CABOOKS / 2018
도대체 내 글은 왜 이따위인가 하여 찬찬히 읽어보았더니 나는 시각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애써 다른 감각 표현을 동원하려 해봤더니 청각까지는 어떻게 글자로 흉내라도 내겠는데, 후각이나 미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ㅇㅇ맛, ㅇㅇ냄새 같은 게으른 표현은 dog나 줘버리라지! 하여 맛 표현을 잘해 놓은 글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 뒤적거리다가 찾아낸 제목, 『중국집』. 피아노 조율사 조영권 선생님이 방방곡곡의 중국집을 종횡무진하여 쓴 에세이라는 정도의 정보는 진즉에 알고 있었고, 출간 당시 알라딘에서도 가끔 눈에 띄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표현을 배우진 못했다. 문체가 미문은 아니어서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욕심나는 데가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문 직업인으로서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기록해나가는 태도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공무원이던 시절, syo 역시 이런저런 일과들로 이루어진 (지나치게 긴)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써보려고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글이 되지 않았을 거고, 결국 백지 위에 신세 한탄이나 연애 타령 같은 걸 갈겨 놓고는 드러누웠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때의 syo가 글이 되지 못하는 일상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을 글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건반의 움직임이 둔하고, 연타가 되지 않는 상태. 이럴 때 건반은 무척 무겁게 느껴진다. 여름이 오면 습도가 높아 더 심해질 듯하니 서둘러 잡아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케이스를 열고 건반을 하나씩 뽑았다. 키 플라이어로 프런트 홀(건반 뒷면의 천으로 싼 구멍)과 밸런스 홀의 구멍을 넓혀주었다. 건반의 움직임이 정상 속도로 돌아왔고, 88개 건반 모두 같은 방법으로 작업을 마쳤다.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다 하고 나면 개운하다. 가벼워진 건반처럼.
_ 조영권, 이윤희, 『중국집』
이런 문단은 작업일지의 한 대목을 건조하게 옮겨 온 것 같으면서도, 또 꼭 그렇지만은 않은 슴슴한 매력 같은 게 문장 사이사이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 작업 과정의 선명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더 아름다워질 여력도 있다. 언젠가 다시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일에 대해서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국 뭔가 배우긴 배운 것이다.
--- 읽는 ---
위험한 법철학 / 스미요시 마사미
흥미로운 베이지안 통계 / 윌 커트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자마자 수학 과학에 써먹는 단위 기호 사전 / 이토 유키오, 산가와 하루미
책Chaeg 2021. 04 / (주)책(월간지)편집부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바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우연에 가려진 세상 / 최강신
공학자의 세상 보는 눈 / 유만선
코로나 인문학 / 안치용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