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나리 가지에 눈 밑을 긁혔다. 노랗게 봄이 할퀴니 차마 성을 낼 수가 없었다. 꽃이 피었으니 바람이 불 것이다.

 

 

 

2

 

요 며칠, 컨디션이 무진장 좋지 않았다.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일찍 퇴근해서 8시간 정도 자고 났더니 많이 괜찮아졌다. 그냥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져서 근무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는 약골이 된 모양. 허허…….

 

 

 

3


봄을 담는 빈 병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창밖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다. 한 움큼만 병에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었으면. 소분하여 조용히 방 안에 봄을 풀어놓거나, 아끼는 사람에게 봄 한 병 선물하면 얼마나 멋질까. 꽃은 꽃대로 꽃의 일을 하는데 사람은 사람대로 사람의 일만 하느라 꽃은 사람이 그립고 사람은 꽃이 그리운 봄이다.

 

벚꽃이 한창일 석촌호수는 막아 놓았다고.

 

 

 

4

 

피곤하나 안 피곤하나 한결같이 코를 고는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어서 컨디션이 곱빼기로 나쁜 듯하다. 이어플러그를 하고 자보지만 그런다고 안 들리는 것도 아닌 데다가, 뒤척이다 보면 하나씩 빠지는데 너무 어두운 새벽이라 빠진 녀석을 찾아내는 것은 요행에 가깝다. 귀에 남아 있는 녀석은 땡큐긴 한데, 밤새 꽂아놓고 자면 아침에 귀가 좀 아프다.

 

같이 살면서 느끼는 건데, 우리는 그냥 같이 살며 생기는 불편함이나 꼴보기 싫음 같은 감정들을 참고 넘어갈 만큼 오랜 친구라서 같이 사는 것이지, 같이 살기에 충분하게 잘 맞는 사이라서 같이 사는 것은 아니다. 진짜 얘는 나랑 안 맞긴 안 맞다.

 

 

 

5

 

저녁에도 외투가 필요 없으니 비로소 봄이라 하겠는데, 오늘 낮은 여름 같았다. 벚꽃도 더워서 땀처럼 떨어지겠다. 벚나무가 헐벗기 전에 어딘가로 가서 파도 소리라도 듣고 오고 싶은데, 마음 같지 않다.

 

 

 

6

 

이 야근을 하고 돌아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리고 지금 이 문장을 보더니 방으로 들어가며 궁시렁댄다. 알라딘 한번 들어가 봐야 되겠네. 그러나 그가 들어오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난 이후 하루에 한두 번꼴로,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부터 씻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삼십 번쯤 말하고 나니까 비로소 손씻기라는 걸 시작했는데, 오늘은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 아직 낌새가 없다.

 

 

 

7

 

봄밤과 가을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syo가 터득한 바는 간단하다. 어쩐지 따뜻한데 싶으면 봄밤이고 어쩐지 시원한데 싶으면 가을밤이다. 아직은 그래도 좀 춥다 싶으면 봄밤이고 아직은 그래도 좀 덥다 싶으면 가을밤이다. 봄밤을 봄밤으로 만드는 것은 어젯밤이 겨울밤이었다는 사실이고, 가을밤 역시 여름밤이 지나간 덕분으로 가을밤이 된다.

 

집단 내에서 사람의 정체성도 그런 식이다. 난 자리에 든 사람은 여러 특성 중, 난 사람의 정체성과 보색을 이루는 부분을 과평가 받게 된다.

 

봄이 겨울의 끝이나 여름의 시작이 아닌 봄 그 자체로 사랑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꽃도 피고 향기도 퍼지도록 봄은 최선을 다해 봄 색깔을 보여야 한다.

 

 

 

8

 

이 손을 씼었다. 참 다행이다.

 

  

--- 읽은 ---

33.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공부만 한다 / 이운규 : 81 ~ 304


: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좋다. 다종한 어려움을 너끈히(혹은 지독한 노력으로) 돌파하고 나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을 해내는 이들 앞에서 종종 작아지고, 그들의 거드름이나 라떼는 말이야 어택에도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을 일구기 위해 만들거나 채택한 방법론을 수용하는 일은 또 별개의 문제다. 박수치되 흉내내지 않는 것. 하지만 그런 식이면 대체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뭘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서. 해보지 않아서 나는 이 책의 가치를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도 박수나 실컷 치고 말았다. , 짝짝짝.

 

34.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 김충규 : 55 ~ 106


: 다른 사람이 쓴 시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는데, 그런 생각이 점차로 흔들리는 요즘이다. 남의 시는 배울 수 없는 것 같다. 그저 흉내 낼 수 있을 뿐.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세상의 장점은, 남의 시를 흉내 내어 글을 써도 사람들이 이게 흉낸지 글인지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다가도, 의미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싶어서 시를 읽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싶다가도, 의미를 아예 모르겠는 건 또 아니다 보니.

  

 

--- 읽는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정희진 : 96 ~ 177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 173 ~ 300

칸트 철학에의 초대 / 한자경 : 58 ~ 137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 ~ 40

파이썬 코딩 도장 / 남재윤 : ~ 80

라캉 대 라캉 / 무까이 마사아끼 :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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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0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와 함께 산다고 해서 누구나 다 거기서 뭔가를 깨닫지는 않겠죠. 저는 오늘 이 페이퍼를 읽고서 제가 쇼님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았어요. 대체로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가진 바로 그 특성이 쇼님에게도 있다는걸요. 가만있지 않는다는 것. 그건 몸을 가만히 둔다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비롯하여 주변의 모든 것들의 변화로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친구와 동거하면서 얻게 되는 작은 깨달음 같은거 말예요. 아 우리는 잘 안맞는구나 그런데 우리는 오래된 친구라서 이나마 할 수 있구나, 같은 것들. 저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게 필요하지만 특히나 이런 관계에서 오는 깨달음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제 일찍 자려고 드러누웠는데 오후에 마신 커피탓인지 잠이 오질 않아서 지금 너무 피곤해요. 수요일 잘 보냅시다, 쇼님.

syo 2020-04-01 20:28   좋아요 0 | URL
애정의 관계보다 애증의 관계가 더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는 법이지요... 어떤 불편함이나 부적합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되나 마나 어쨌든 이제는 낙장불입인 관계 같은 것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더라구요.

봄이 가기 전에 코로나가 가서 봄이랑 어우렁더우렁 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쟝쟝 2020-04-01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을 한사발 떠가지고 막 휙휙 저어서 카푸치노 거품 내듯 해서 한모금 두모금 성질에 안맞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글이여라~ 즐거운 수요일 되소서!

syo 2020-04-01 20:28   좋아요 0 | URL
역시 쟝쟝님은 벌컥벌컥이죠. 장비익덕 스타일....

공쟝쟝 2020-04-01 21:50   좋아요 1 | URL
장비... .... ㅋㅋㅋ 봄에 취한다~~|

비연 2020-04-0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출근하고부터 너무 무리한다 싶었는데... 그래도 며칠 쉬어 괜챦다 하니 다행입니다.
가족 이외에 타인과 동거를 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래서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람이 혹시나 있다면 두려움이 엄습하곤 하는데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누군가의 존재, 행동,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싶어서요. 쇼님 글 보니 다시한번 그런 생활은 어떤 것일까 싶네요. 바쁜 와중에도 올리는 다정한 쇼님 글을 보며 수요일 아침, 따뜻한 커피와 함께 조금은 더 다정해진 마음으로 수요일을 시작해봅니다.

syo 2020-04-01 20:30   좋아요 0 | URL
몸이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통증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금방 나아지겠지요.

여유만 되면 혼자 사는 것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2020-04-01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1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4-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글 읽으니 정말 봄이 오기는 오나봐요. 저희 집앞에도 벚꽃이 피었던데 그 곳에는 개나리가 만발하나보네요.
많이 힘드시겠지만 체력 보강 야무지게 잘 하시어 나라일에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syo 2020-04-01 20:33   좋아요 0 | URL
봄만 먹고 배부르면 좋겠어요. 봄살도 찌고.... 어쨌든 얼른 컨디션 100 되어서 나라일 씹어삼킬게요. 감사합니다^-^

추풍오장원 2020-04-01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 덕에 야근은 좀 덜 하시지 않는지요? 건강관리 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캉 대 라캉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년에 읽었는데 라캉 재진입에 큰 도움을 준 책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합격 어쩌구 같은 책은 저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마 그런짓거리는 못하겠습니다.
합격수기류 책에 나오는 공부 비법은 합격한 ‘후‘에 발명해낸 합격방법이기 때문이지요...

syo 2020-04-01 20:35   좋아요 0 | URL
일 자체가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자기관리 실패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가 봐요. 이래서 아마는 서럽다....

스타브로긴님도 전수할 만한 꿀팁 있으시면 대방출하시죠. 어차피 저한테는 물 건너 간 이야기지만ㅎㅎㅎ

블랙겟타 2020-04-0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는 누구와 같이 살아본 적은 없었었는데요. 대학생때 기숙사에 1년 있었지만 그건 또 다르니깐요 ^^;; 함께 산다는 것.. 쉬운건 아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