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현재속도

 

 

1

 

은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syo는 컴퓨터를 뒤적거리며 아무말을 찌끄리고 있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다큐가 있거든? 그거 우동으로 만나는 일본이던가 하는 편을 받아놨는데, 볼 시간이 없어. 듣는지 마는지 그저 카레에 전념하는 이었지만,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으므로 syo는 생각나는 말을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이어나갔다. 카레가 대충 다 될 즈음, 전자레인지로 밥을 데우고 반찬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잠시 기다리자 이 카레가 든 웍을 테이블 가운데 냄비받침 위에 내려놓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 그럼 이제 보자. ? syo가 되묻자, 묻긴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걸어서 우동 속으로.

 

은 젓가락으로 멸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2

 

일은 쉽지 않다. 전임자가 있는 일도 있고 없는 일도 있어서, 어떤 일은 정말 바닥에 배를 깔고 헤엄치는 심정으로 해나가고 있다. 앞으로 나가질 않어. 115일까지 처리가 되었어야 하는 어떤 일의 독촉전화를 syo가 받고 있다. 나는 23일에야 첫 출근을 했는데! 이 일은 아무래도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모양이고, 입사 이후 최초의 큰 털림이 발생한다면 그건 아마 이 지점에서 시작될 것 같다. 빅털림 비긴즈.



자신 있게 즐겁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꼬박꼬박 해나가는 것이 완성된 사람이 되어가는 길 아닐까게다가 나같이 소심하고 게으른 사람은 조금 불합리하고조금 지겹고조금 답답하더라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회사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응준그놈의 소속감

 

 

 

3

 

여전히 정신이 없고, 종일 일해도 돌아와 헤아려 보면 정말 한 일이 없다 싶은 느낌도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일솜씨가 조금씩 느는 중이라는 자각이 있다. 기분 좋은 일이다.

 

 


4

 

지난주는 대충 먹었더니 체중이 꽤 줄었다. 신나서 많이 먹었더니 이번 주는 체중이 꽤 늘었다. 업무에 지친 공무원이 50분을 걷고 타고 돌아올 곳이 있듯이, 체중새끼도 언제나 돌아올 곳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배를 집어넣어야 한다.

 

 

 

5

 

집에 턱걸이 기구가 도착했다. 거금 20만 원을 쏟아부었고, 조립하는 데도 60분을 투자했다. 작은 방에 넣어놓고 우리는 매달리기 시작했다. 은 이내 포기했지만 syo는 끈질겼다. 끈질기게 매달렸다. 질척거리는 남자가 되었다. 광배가 좀 뻑적지근하더니만 한 주 만에 턱걸이 한 개가 늘었다. 세 개까지는 거뜬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6



세상이 커다란 속도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패배에 친숙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열심히 달려나갔는데 그 속도가 얼추 비슷해서 스물다섯에는 이걸 하고 스물여덟에는 저걸 하고 늦어도 서른셋까지는 그걸 하고 뭐 그런 식이었다. 너무 비슷해서 그 속도를 사회의 속도라고 불러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보폭이 세상의 보폭과 비슷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머무름 없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들이 볼 때는 내가 뒤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천천히 가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이 생겼다. 속도를 제한하는 법을 모르거나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에 제한 속도가 생겨났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나아가도 늘 뒤로만 배달되는 사람들에게 제한 속도란 건 영문을 알 수 없는 물건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없다는 걸. 느리지만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이 속도의 크기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속도의 존재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모른 척했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도달해야 할 곳 같은 게 없다는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은 멋지지만, 사실 우리에겐 대부분 정해진 도착지 같은 건 없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장소가 빡센 고행터가 아니라 적막한 보리수 아래였듯이, 우리도 달리기를 멈춘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저 알게 된다. 여기구나. 달리지 않는 사람은 늘 안다. 여기라는 걸.

 

마음속에, 너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꺾어서 쌓아 놓은 공터가 있었다. 그런 말들은 힘이 세서 꺾어도 꺾어도 완전히 꺾이지 않고 바람이 불 때면 내 안을 흔들며 쇳소리를 내질렀다. 그럴 때면 한동안 어지러웠다. 자석이 닿으면 한 방향으로 늘어서는 쇳가루처럼, 마음이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다. 자력의 손아귀로부터 다시 놓여나기까지 적지 않은 무게의 질투와 방황과 좌절을 굴려대야 했다. 그래서 그 공터에 꺾어 놓은 말들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그게 연말이었다. 젖은 말들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오래 버텼지만, 결국은 숯이 되었다. 재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어떤 바람을 만나고 또 어떤 열을 만나면 발갛게 달아올라 내 오랜 낮 오랜 밤을 태워 먹을지도 모르겠다. 늘 조심해야지.

 

그래도 오늘 밤은 조용하고, 창밖엔 얇은 비가 내린다.

 


어릴 때 "해봐해봐실수해도 좋아넌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하는 <영심이만화 주제가를 듣고 무서워했다어른 돼서 실수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어른 되기가 진짜 싫었다어리다고 이해해주고 들어준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본인 삶의 이력으로 남는다몇 살이든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같은 나이대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주목해봤자 의미 없는 비교다이런 비교는 힘들고 자존감 떨어진 날에 두 시간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매일 새로운 것을 느끼고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 취향 생각 들을 더 섬세하게 다듬을 수도 있다이러기에도 삶이 아깝다.

서한겸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그는 눈에 보이지도손에 잡히지도 않고 다만 자신을 관통해가는 시간을 주시하듯 숨죽인 겨울밤의 풍경을 오래 내다보았다.

김혜진9번의 일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황인찬부곡」 부분 


 

--- 읽은 ---



26.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 카를로 M. 치폴라 : ~ 127

: 정교한 사실을 바탕으로 직조된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 담고 있는 진리값이 가볍지 않다. 완벽한 농담이란 때로 너무 농담 같지 않아서 도리어 웃음이 나지 않기도 한다.

 

 

--- 읽는 ---

최고의 인재는 무엇이 다른가 / 박봉수 : ~ 175

시민과 함께 만드는 서울 / 서울연구원 : ~ 174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 96

보고서의 신 / 박경수 :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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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20-02-16 0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인이 되신 syo님의 찰진 글맛...입대 3주 남긴 예비군인은 논산에서 실컷 그 맛깔스러움을 그리워하겠습니다..

syo 2020-02-18 21:00   좋아요 1 | URL
프메님 군대가시는군요.
1개월 코스일까요? 어찌됐든 논산은 애증의 땅이지요.
화이팅 하시구요.
전투화 꽉 묶어야 발 뒤꿈치 안 까집니다. 최악이에요. 그거.

2020-02-16 0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8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2-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도서 목록 보니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요. 읽고 싶은 책이 목록에 포함되는 날도 곧 오길 진심 빕니다. 오래타는 숯 곁불 쬐는 누군가를 한참 따뜻하게 만들 수 있잖아요. 힘내세요.

syo 2020-02-18 21:01   좋아요 1 | URL
딴 이야기지만 저 안경 쓴 녹색머리 소녀 볼수록 귀엽습니다.
한 마리 키우고 싶네요 ㅎㅎ

blanca 2020-02-16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입사원 때 매일 내가 충격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시간들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ㅋㅋ syo님은 바로 적응하실 것 같다는. 여전히 바쁜 와중에도 읽고 쓰고 일하는 모습에 화이팅을 보냅니다.

syo 2020-02-18 21:02   좋아요 0 | URL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이지만 막상 끝나고 나면 해놓은 거 하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ㅠㅠ
저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말씀은 힘이되네요.
blanca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20-02-16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요님 이제 보니 사진도 잘 찍는구만요.
영국이나 프랑스의 어느 길인 줄 알았는데 표지판 보고 그만...ㅋ
이날 따라 꾸리꾸리한 날씨가 받혀 줬네요.

그래도 아직 겨울이라고 오늘은 눈구경도 다 하네요.
어제만 해도 분명 봄이었는데...^^

syo 2020-02-18 21:0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그냥 출근길에 띡 찍은거예요.
˝당신의 현재속도˝ 이건 어쩐지 꼭 찍고 싶더라구요.

눈도 내리고 코로나도 진동하고 하여간 세상이 흉흉합니다.
건강조심하세요 스텔라님!

다락방 2020-02-17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채는 버터에 볶았습니까?

syo 2020-02-18 21:04   좋아요 0 | URL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먹고 나서 레시피 뒤지더니
아 야채를 버터에 볶았어야 했는데- 라고 하더라구요.

허허.

그나저나 카레황제 다락방님답다. 한 번에 본질을 꿰뚫어보시네..

북극곰 2020-02-1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글은 읽었는데,
간만에 서재에 와서 이제서야 직장인이 되신 줄을 알았습니다. ㅎ
게다가 저는 강동구민이고요. 올림픽 공원 맞은 편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왠지 모를 반가움에 안 달던 댓글을 다 달고 갑니다. 지연이란 이리도 끌리는 것이었군요.하하.
응원합니다. 흐.

syo 2020-02-18 21:0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언제나 구민 여러분의 곁에서 힘이 되는 공무원 s..... ㅎㅎㅎㅎㅎ

가까운데 북극곰님이 계셨군요.
응원 말씀 받고, 구민여러분의 복지와 안전을 위해 힘쓰는..... ㅋㅋㅋㅋ

han22598 2020-02-21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속도에 대한 성찰.................감동적이네요. ㅠㅠ
다들 사냥개 마냥 미췬듯이 삶의 일구어 가는 마당에 느려터져.....질척이는 저의 삶에...위안이 되는 글이었어요 :)

syo 2020-02-24 22:32   좋아요 0 | URL
han22598님 반갑습니다.
점점 더 정신없어지는 요즘이지요? 자기 삶 챙겨가면서 살고 싶어요. han님도 그러실 수 있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