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현재속도
1
三은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syo는 컴퓨터를 뒤적거리며 아무말을 찌끄리고 있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다큐가 있거든? 그거 ‘우동으로 만나는 일본’이던가 하는 편을 받아놨는데, 볼 시간이 없어. 듣는지 마는지 그저 카레에 전념하는 三이었지만,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으므로 syo는 생각나는 말을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이어나갔다. 카레가 대충 다 될 즈음, 전자레인지로 밥을 데우고 반찬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잠시 기다리자 三이 카레가 든 웍을 테이블 가운데 냄비받침 위에 내려놓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보자. 뭘? syo가 되묻자, 묻긴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걸어서 우동 속으로.
三은 젓가락으로 멸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2
일은 쉽지 않다. 전임자가 있는 일도 있고 없는 일도 있어서, 어떤 일은 정말 바닥에 배를 깔고 헤엄치는 심정으로 해나가고 있다. 앞으로 나가질 않어. 1월 15일까지 처리가 되었어야 하는 어떤 일의 독촉전화를 syo가 받고 있다. 나는 2월 3일에야 첫 출근을 했는데! 이 일은 아무래도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모양이고, 입사 이후 최초의 큰 털림이 발생한다면 그건 아마 이 지점에서 시작될 것 같다. 빅털림 비긴즈.
자신 있게 즐겁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꼬박꼬박 해나가는 것이 완성된 사람이 되어가는 길 아닐까. 게다가 나같이 소심하고 게으른 사람은 조금 불합리하고, 조금 지겹고, 조금 답답하더라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회사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_ 김응준, 『그놈의 소속감』
3
여전히 정신이 없고, 종일 일해도 돌아와 헤아려 보면 정말 한 일이 없다 싶은 느낌도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일솜씨가 조금씩 느는 중이라는 자각이 있다. 기분 좋은 일이다.
4
지난주는 대충 먹었더니 체중이 꽤 줄었다. 신나서 많이 먹었더니 이번 주는 체중이 꽤 늘었다. 업무에 지친 공무원이 50분을 걷고 타고 돌아올 곳이 있듯이, 체중새끼도 언제나 돌아올 곳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배를 집어넣어야 한다.
5
집에 턱걸이 기구가 도착했다. 거금 20만 원을 쏟아부었고, 조립하는 데도 60분을 투자했다. 작은 방에 넣어놓고 우리는 매달리기 시작했다. 三은 이내 포기했지만 syo는 끈질겼다. 끈질기게 매달렸다. 질척거리는 남자가 되었다. 광배가 좀 뻑적지근하더니만 한 주 만에 턱걸이 한 개가 늘었다. 세 개까지는 거뜬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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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커다란 속도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패배에 친숙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열심히 달려나갔는데 그 속도가 얼추 비슷해서 스물다섯에는 이걸 하고 스물여덟에는 저걸 하고 늦어도 서른셋까지는 그걸 하고 뭐 그런 식이었다. 너무 비슷해서 그 속도를 사회의 속도라고 불러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보폭이 세상의 보폭과 비슷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머무름 없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들이 볼 때는 내가 뒤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천천히 가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이 생겼다. 속도를 제한하는 법을 모르거나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에 제한 속도가 생겨났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나아가도 늘 뒤로만 배달되는 사람들에게 제한 속도란 건 영문을 알 수 없는 물건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없다는 걸. 느리지만 나에겐 나만의 속도가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이 속도의 ‘크기’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속도의 ‘존재’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모른 척했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겐 도달해야 할 곳 같은 게 없다는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꾸준히 가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은 멋지지만, 사실 우리에겐 대부분 정해진 도착지 같은 건 없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장소가 빡센 고행터가 아니라 적막한 보리수 아래였듯이, 우리도 달리기를 멈춘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저 알게 된다. 여기구나. 달리지 않는 사람은 늘 안다. 여기라는 걸.
마음속에, 너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꺾어서 쌓아 놓은 공터가 있었다. 그런 말들은 힘이 세서 꺾어도 꺾어도 완전히 꺾이지 않고 바람이 불 때면 내 안을 흔들며 쇳소리를 내질렀다. 그럴 때면 한동안 어지러웠다. 자석이 닿으면 한 방향으로 늘어서는 쇳가루처럼, 마음이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다. 자력의 손아귀로부터 다시 놓여나기까지 적지 않은 무게의 질투와 방황과 좌절을 굴려대야 했다. 그래서 그 공터에 꺾어 놓은 말들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그게 연말이었다. 젖은 말들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오래 버텼지만, 결국은 숯이 되었다. 재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어떤 바람을 만나고 또 어떤 열을 만나면 발갛게 달아올라 내 오랜 낮 오랜 밤을 태워 먹을지도 모르겠다. 늘 조심해야지.
그래도 오늘 밤은 조용하고, 창밖엔 얇은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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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해봐, 해봐, 실수해도 좋아. 넌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하는 <영심이> 만화 주제가를 듣고 무서워했다. 어른 돼서 실수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른 되기가 진짜 싫었다. 어리다고 이해해주고 들어준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본인 삶의 이력으로 남는다. 몇 살이든,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같은 나이대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주목해봤자 의미 없는 비교다. 이런 비교는 힘들고 자존감 떨어진 날에 두 시간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매일 새로운 것을 느끼고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 취향 생각 들을 더 섬세하게 다듬을 수도 있다. 이러기에도 삶이 아깝다.
_ 서한겸,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그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다만 자신을 관통해가는 시간을 주시하듯 숨죽인 겨울밤의 풍경을 오래 내다보았다.
_ 김혜진, 『9번의 일』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_ 황인찬, 「부곡」 부분
--- 읽은 ---
26.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 카를로 M. 치폴라 : ~ 127
: 정교한 사실을 바탕으로 직조된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 담고 있는 진리값이 가볍지 않다. 완벽한 농담이란 때로 너무 농담 같지 않아서 도리어 웃음이 나지 않기도 한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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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재는 무엇이 다른가 / 박봉수 : ~ 175
시민과 함께 만드는 서울 / 서울연구원 : ~ 174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 ~ 96
보고서의 신 / 박경수 : ~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