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는 드릴게

 

 

1

 

1930. 2120. 1830. 2230. 2345. 2250.

 

첫날부터 오늘까지 여섯 번의 퇴근 기록이다.

 

오후 630분은 지난 수요일인데, 우리 구는 수요일은 패밀리데이라고 하여 야근을 해도 초과근무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갔던 것이다.

 

공무원의 삶이란 뜻밖에 만만치가 않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구청 근처에 집을 얻을 걸 후회하고 있다. 2250분에 구청에서 나와도 전철 타이밍만 맞으면 성남에 2320분에 도착할 수가 있다. 내리면 집까지 오르막 등반 20분이 기다린다. 벗고 씻으면 딱 0시다. 바로 자도 여섯 시간이 땡이다. 이런 마당이라 책을 읽을 여유가 없고 글을 쓸 여유는 더더욱 없다. 한 달만 읽고 쓰기를 포기하자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오늘 저녁에 고기를 사주시며 과장님이 그러셨다. 너처럼 똑똑한 애는 한 세 달만 고생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일 거라고. 과연 syo가 똑똑한 인간이었나 하는 부분은 차치하고, 똑똑한 인간조차 세 달은 울어야 사람이 된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공무원 나라…….

 

 

 

2

 

오늘 2250분에 컴퓨터를 끄면서 맞은편에서 야근하시는 주임님께 말했다. 주임님, 저 이제 집에가자마자 눈 감고 눈 뜨고 출근하려고요. 그러자 주임님이 말씀하셨다. syo, 그럴 땐 저 잠깐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3

 

밤이 어둑해도 오르막은 아름답다. 보름달은 바로 머리 위에서 둥글고 크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체온도 오르고, 숨소리가 거세지면 나도 거센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이 오르막은 언제나 오르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퇴근이 누군가의 퇴근과 맞물려 가파르고 긴 언덕을 오르는 적막. 달빛에 버무려지면 무엇이나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골목은 좁아 그윽하고, 향기 없는 밤 향기가 상쾌하다. 늦은 퇴근길의 작은 기쁨이다.

 

 

 

4

 

 

네 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불이 아니라고 말해볼래? 우리가 그것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짐승과 다른 방향으로 비로소 한 발 내디딜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해볼래? 내가 만지지 않은 것들이 아직 많이 있다면 끝내 그것을 감추어 갈무리해 둘 수 있다고 억지로 믿을래? 충분히 어리석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어리석게도 충분하다 착각하며 오해하며 서로를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며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리는 그림은 남의 이야기라고 외면해볼래?

 

 

 

--- 읽은 ---

 

23.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242 ~ 399

: 나는 언제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도시보다 큰 도시가 좋았다. 큰 도시는 비싸고 번잡했는데 비싼것도 번잡한 것도 싫어하던 내가 큰 도시는 그래도 좋았다. 어디서나 어느 정도는 외로웠기에 기왕이면 도시의 시끌벅적한 외로움을 골랐다. 도시에 살고자 했던 나는 그렇게 도시에 살았다. 나는 도시를 바꿀 만큼 큰 사람이 아니었지만 도시는 나를 바꾸지 못할 만큼 작은 구조물이 아니었다. 나는 도시에 살며 도시처럼 먹고 도시답게 걷고 도시스럽게 생각하며 도시롭게 사랑했다. 그런 삶은 충만과 결락을 동시에 지닌다. 번잡한 외로움이나 외로운 번잡함. 소란스러운 정적이나 정적 속의 소란. 그런 것들이 도시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어떤 모양으로 빚어내는가.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24. 세계사 아는 척하기 / 후쿠다 토모히로: 123 ~ 251

: 척하지 말자, 이제. 그냥 알지.

 

 

 

25. 정한 기억 / 유성호 : 159 ~ 291

: ’비평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울림 깊게 쓰면 안 되는 거잖아!‘ 라는 김종광 소설가의 평이 앞표지에 박혀 있다. 으음, 그렇단 말입니까…….

 

 

 

--- 갖춘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정희진

들뢰즈 개념어 사전 / 아르노 빌라니 외

들뢰즈 사상의 분화 / 소운서원 엮음

회사에서 바로 통하는 실무 엑셀 + 파워포인트 + 워드&한글 / 전미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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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1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1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1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2-11 0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쇼님! 세달씩이나 고생해야 한다니 너무 안타깝지만,
쇼님 직장인 되어 쓴 글 왜 더 재밌어요?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글 쓰는 사람에게 더 재미있는 글 쓴다고 해서 미안..

syo 2020-02-11 07: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일 배우느라 그래요. 정신없지만 하루하루 성장중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2-11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주52시간에서 초과 6시간 일하셔서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셨습니다. ㅠㅠ
우리나라 공무원이 법을 준수하셔야죠. ㅎㅎ

syo 2020-02-11 07:14   좋아요 1 | URL
아... 북다님의 댓글을 보고 나니 앞으로 이런 글은 쓰면 안되겠규나, 잘못히면 큰일 치르겠구나 싶네요....

han22598 2020-02-11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치 않은 모습 부럽습니다. 삶이 모양이 변해도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저도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디 ㅎㅎ

syo 2020-02-16 00:56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손에서 놓았어요....
2월은 그냥 손에서 책을 놓자, 으하하허허허으어어으으앙-_ㅜ 뭐 이런 결심을 했더랬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2-11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무플방지위원회상근직 실직 위기에 있다 기쁘게 글 맞이합니다ㅎㅎㅎ. 직장에서 똑똑이 취급 받고 계시군요.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 찾아낸 불 안 꺼뜨리고 삶에 지지 않고 행복한 미래 향해 꿋꿋 나아가시길 빕니다. 원껏 못 읽고 못 쓰는 날도 얼른 벗어날 수 있길 빌구요ㅠㅠ 남일 같지가 않아서...요즘 미친놈처럼 읽고는 있습니다만...syo님 전성기의 발가락 만큼도 안 되네요.

syo 2020-02-16 00:55   좋아요 1 | URL
든든한 반님이 계셔서 syo는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알라딘에 방문하면서도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예언했지요? 반님은 곧 알라딘 핵인싸가 되실 거라고.
요즘 보니까, 머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사람들은 이제 곧 syo 같은 건 잊고 반유행열반인의 이름을 연호하겠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2-16 07:46   좋아요 0 | URL
저 실업자 만들지 말아주세요 ㅎㅎㅎ syo님이 있어야 훨씬훨씬 더 재미있는 알라딘이지요. 얼른 적응하셔서 주1회라도...(굽신굽신)

2020-02-11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2-1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 시간 너무 늦네요ㅠㅠ 우리나라 공무원들, 다시 봤어요. 애쓰네요, 진짜!
얼른 3개월 지나 syo님의 긴 리뷰 읽었으면 좋겠네요. 근데, 이 리뷰는 이 리뷰대로 재미나요.
소리가 거세지면 나도 거센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이런 부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02-16 00:53   좋아요 0 | URL
저 하나 바쁘다고 없어져도 알라딘 마을은 잘 돌아가겠지요?-_ㅜ
안심되면서도 섭섭하다....

2020-02-11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2-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직장인 되기 분투기.. 사실 넘 재밌습니다.. 본인은 고생인데 말이죠.
곧, 일이 능숙해져서 일찍 집에 와 글을 쓰는 쇼님을 볼 수 있길~

syo 2020-02-16 00:52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들어오는 일 자체가 닷새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네요.....
비연님의 말씀하시는 syo는 아직 요원한 먼 미래의 인류 같습니다....

2020-02-11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2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