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 나고 싶다, 발정 아니고 발령

 

 

1

 

서른여섯이 다가오는데, 어쩐지 스물여섯을 앞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돌이켜보면 스물여섯 이후로 10, 뭐 한 게 하나도 없다. 10년이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짚어보면, 누구는 애를 둘 낳았고, 누구는 내가 꿈처럼 여겼으나 언감생심 이름 한 번 내뱉어 보지 못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박사를 따가지고 왔고, 누구는 작은 로펌 대표가, 누구는 치과 원장님이 되었으며, 누구는 좋은 기회에 사 놓은 집이 승천하여 17억짜리가 되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월급(하다못해 알바비)이라는 것조차 한 번을 받아본 적이 없고(아 맞다, 군대에서……), 이력서 서식의 거대한 공백에 압도되어 뭐 한줄 찌그려볼 만한 사소한 업적조차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라 할 수 있겠다. 좋은 사람 사랑해서 행복하긴 했으니까 행복하게 잃어버린 10년쯤 되겠다. 그러니 그냥 10년 제끼고 스물여섯 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마음은 스물여섯 같은 서른여섯. 그러나 사지육신관절연골은 마흔여섯 같은 서른여섯…….

 

그러니까 대체로 스물여섯쯤이면 다들 서른여섯의 syo처럼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않나. 그러니 10년 노안인 사회초년생인 척, 빠릿빠릿 돌아다니는 늙은 막내가 되어야겠다. 후후후.



거북이알은 육교의 중간쯤에서 난간 쪽으로 다가가더니 거기에 양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나도 그녀 옆에 다가가서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표면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빌딩들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다. '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을 너무나 의식한 탓에 지나치게 미래적으로 지어지 건물들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SF영화에서 본 비정한 우주도시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테크노밸리에도 겨울이 지나면 물이 흐르고봄이 오고벚꽃이 예쁘게 피고또 여름이 올 것이다.

장류진일의 기쁨과 슬픔


어느 날에는 방송에 말하는 앵무새가 필요했다. "안녕하세요"였던가, "반갑습니다"였던가아무튼 다섯 마디 남짓 할 줄 아는 앵무새를 두 시간 정도 섭외했고 그날 앵무새는 80만 원을 벌어 갔다그 사실을 안 뒤로 나와 동기들의 목표는 '앵무새만큼 벌자'가 되었다앵무새이고 싶었다나는 30일을 밤낮없이 일해도 96만 7,000원을 버는데 앵무새는 시급이 40만 원이라니우리 엄마 아빠가 나 대신 새를 낳았더라면…… 그래이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강이슬안 느끼한 산문집


행실은 언제나 상층을 밟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거주와 생활은 언제나 하층에 처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만약 이미 평범한 사람이라면 힘껏 나아가 선한 사람이 될 것을 생각해야 하고이미 선한 사람이라면 역시 힘껏 나아가 군자나 대현이 되어 성인에 도달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이러한 일은 끊임없이 굳세게 나아가는 데 달려 있다만약 크고 넓은 집에 살고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고 지낸다면 "초가집에 살면서 나물밥을 먹는다 해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겠다고 생각해야 한다또한 초가집에 살고 나물밥을 먹고 지낸다면 "흙집에 살면서 굶주린다 해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겠다"고 생각해야 된다이러한 일은 끊임없이 겸허하게 행하는 데 달려 있다대체로 이와 같다면 어디에 간들 편안하고 태평하지 않겠는가.

이덕무이목구심서 3

  


2



소유욕에 기반한 낭만적 사랑은 너무나 불안정하다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이 많은 현대인들이 원하는 사랑의 패턴이다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서로 인생에서 최고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심지어 자신조차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그래서 가는 사랑과 오는 사랑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때문에 결국은 트러블이 생기고많은 경우 이별하게 되며특히 승연의 경우에 사랑은 그저 트라우마와 우울증으로 남아 버리게 되었다.

심기용정윤아우리는 폴리아모리라 한다

 

사랑을 하는 건 나인데 그걸 이유로 그녀가 나를 획득하고, 또 사랑을 하는 건 그녀인데 그걸 이유로 내가 그녀를 가지는 이 교환구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희한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종종 쓰이는 밈인 <날 가져요, 엉엉>은 웃으며 데굴데굴 구르자고 굴림체로 던져지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궁서체급 진지한 진리의 말씀인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사랑은 소유됨이나 소유되고 싶음에 가까운 것이다. ‘내가 노동력을 투여하여 사랑을 생산하면 당신은 그 대가로 나를 가지세요.’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혁명적 선언이 아닌지?

 

그런데 이런 위대한 반자본주의적 정신을 그야말로 자본주의적인 욕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지요.’와 버무리는 바람에 만사가 틀어지는 것 같다. 운 좋게 답례품 사랑을 받아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 하다못해 화폐 같은 가치측정단위라도 있었다면 좀 상황이 나았겠으나, 사랑은 재는 저울이 저마다의 것이다 보니 이건 뭐 십만 사랑을 줬더니만 십 사랑을 돌려 주네 저 십 새가- 하는 식의 분노가 끊일 날이 없다. 이렇게나 사랑이 자본주의 궁합이 별로다…….



현실에서 면포 한 필을 생산하는 데 정확히 10시간의 노동이 들어가는 일은 없다. 10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9시간 반이 걸리기도 한다그럼에도 시장에서 면포 한 필의 가치는 10만원으로 책정된다그 이야기는 서로 상이한 상황에 일정한 속성을 부여했다는 말이다그 속성은 면포에서 나오는 가치의 속성이 아니라 면포를 10만 원이라고 부르는 화폐의 힘을 가리킨다그것을 물신숭배라고 한다그리고 여기서 개별 생산이 어떻게 '사회적 생산'에 속에 놓이고 노동의 사회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기된다.

  절대 권력을 부여받은 화폐는 이제부터 모든 것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한다공장에서 시계를 만드는 노동을 10만 원으로 부르고집에서 빨래하고 음식 만드는 가사 노동은 0원으로 부르는 등자본주의에서 값어치가 없다무가치하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그리고 그 인정의 주체는 자본이고기준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생산이며구체적으로 그 가치의 크기를 불러주는 것은 화폐이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

 

 

 

3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읽었는데, 거기 나온 애들 이름이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늘 이런 식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일이 왕왕 있는데, 대체로 그 사람들보다 syo가 더 많은 양의 책을 먹지만 막상 남는 건 적다. 소화를 못시키고 바로 싸나본데, 맨날 아 기억이 없습니다,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 뭔가 기억날 것 같았는데 기억나지 않습니다, 뭐 이따위 청문회 스타일 멘트나 실컷 치다가 집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야이 등신아 등신아 책등신아, 너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적어도 세 번이나 읽었지만 기억에 남은 건 희미한 몇 조각뿐이다그러나 이 책에 푹 빠져있을 때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때 나는 나의 불안정한 내면을 책 속에서 두려움 없이 대면할 수 있었다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런 '독서 기억상실증'문학을 완벽하게 모두 전달할 수 없고 예술은 부분의 합 그 이상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그러나 이런 '문학적 치매'에는 틀림없이 또 다른 원인이 있다그리고 그것은 분명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고내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도 아니다.

  이 검은 구멍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어째서 우리는 특별한 독서 경험을 강렬하게 떠올리면서도 그때 읽은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할까강렬한 독서 경험이 지적 경험이 아니라 감정 경험이기 때문일까우리는 책을 읽을 때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때론 피신시키고 치유할까그리고 왜 이 경험의 일부는 다시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영역으로 가라앉을까?

안드레아 게르크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이렇게 묻기만 하지 왜 그런지 딱히 말해주진 않는다. 어쨌든 나만 이런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 읽은 ---


하마터면 회계를 모르고 일할 뻔했다 / 김수헌, 이재홍 : 212 ~ 375

: 패기 있게도 초심자와 실무자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며 내놓은 전작이것이 실전회계다가 초심자들의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내자, 저자들이 이를 갈며 오로지 뉴비를 위한 회계입문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syo가 바로 그 망테크를 타고 여기까지 흘러온 불쌍한 회계 잣밥인데…… 밥에서 잣을 건져낼 수 있었다. 난 이제 회계 밥이다.

: 아니아니, 회계가 제 밥이라는 게 아니라 제가 회계 밥이라구요.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주네요 / 허재삼 : 167 ~ 287

: 집을 구하러 다닐 때 쓸모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수월하게(?) 끝나버려서 이 책을 펼쳐 임대인이나 중개사 코끝에 갖다붙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김에 한번 후루룩 읽고 반납. 집주인의 가세가 기울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시 2년을 가서 성남을 넘으면, 그때 또 읽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 읽는 ---

다 이아리 / 이아리 : ~ 197

우리는 폴리아모리라 한다 / 심기용, 정윤아 : 68 ~ 155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 ~ 63

일의 기본기 / 강재상, 이복연 : ~ 100

우리는 책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 안드레아 게르크 : ~ 95

한 권으로 끝내는 경제학 명저 50 / 가게야마 가츠히대 : ~ 113

심슨 가족이 사는 법 / 윌리엄 어윈 외 :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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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2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의미의 축제 리뷰까지 열심히 써 놓고도 애들 이름 기억 안 나요...아, 캘리반? 칼리방! 파키스탄인인 척 하는 인종차별개그하는 놈만 기억남. 강렬한 기억의 검은 구멍들 왠지 제 증상 같아 많이 찔리네요. 화폐로만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어느 정도 치러야만 화폐로 교환할 수 없는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척박한 자본주의 토양에 빌붙어 사는 입장에서, 천천히 느릿느릿 고고한 시간 보내시다 이제 그 교환의 세상에 한 걸음 딛어 사랑할 기반 마련하실 syo님께 힘찬 응원 보냅니다. 오늘 무플방지위원회 횡설수설 길었습니다. ㅋㅋㅋ

syo 2019-12-20 21:13   좋아요 1 | URL
무플방지위원장님의 초심을 오랜만에 다시 목도하는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요즘 서재는 뜸하신 것 같던데, 그 와중에도 이렇게 무플방지활동 해주시면 마치 알라딘에 글 올리러 오는 게 아니라 댓글 달러 오시는 것 같잖아요 ㅎㅎㅎㅎㅎ 각골난망 감사하다는 말씀입니닿ㅎ

반유행열반인 2019-12-20 21:18   좋아요 1 | URL
저 언제 장으로 승진? ㅋㅋㅋsyo님 글 읽는 맛으로 사는 독자가 이 주위에 한 50명은 있다는 게 학계정설입니다. 뭘 읽어야 서재도 채우는데 마냥 헤롱대는 요즘입니다. 저도 정신을 차리고 남은 열흘이나마 바짝 읽자, 하는 각오중입니다.

2019-12-2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0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12-20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나간 것은 지난 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돌아보면 의미 투성이인 인생임을 10년후면 더 느낄수 있겠죠 ~ 다 흘러내린 듯한, 다 휘발되어져버린 듯한 책에대한 기억도 내 두뇌의 어느 구석에서 쳐박혀 언제 나를 도발할지도 모를 일이니 너무 낙심마시고 나도 10년전에 쇼군처럼 책읽었음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하는 1인이니 너무 상심마시고~너무 상심되면 치킨 쏴 뿝니다!!! ㅋ

syo 2019-12-21 01:2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카알님 덕분에 현웃 터지면서 상심이고 자시고 다 날라갔어요. 역시 알라딘의 엔돌핀 댓글러 카알님!!

Comandante 2019-12-2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계 책 관심이 갑니다. 현금주의 발생주의니 하는 것밖에 모르는데 뭘 알아야 결재할때 물어보기라도 하니까요...

syo 2019-12-23 08: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장르에 대해 1도 모르는 게 진짜 너무 부끄럽더라구요.....
와구와구 읽다보니 조금씩 감이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ㅎㅎ

stella.K 2019-12-2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살아보십쇼. 마흔 여섯도 젊구나 할 때가 돌아 옵니다.
요즘엔 현 나이에서 10년을 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5, 60이 한계수명 이었던 때를 생각하면.
이젠 60세까지를 청년으로 보자는 움직임이 나오는데 뭘.
그러니 스요님 스물여섯으로 알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syo 2019-12-23 08:2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서른여섯도 감지덕지로구만, 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살아 보겠습니다.
꼴랑 서른여섯 처먹고 늙었니 말았니 하는 게 얼마나 고깝게 보이시겠어요.... 죄송합니다 ㅎㅎ

수이 2019-12-23 12:43   좋아요 1 | URL
그럼 저는 서른셋이에요 스텔라 케이님 급조증 모드로 전환이 되는!! 이제 겨우 서른넷이 되다니 2020년에!!

stella.K 2019-12-23 17:57   좋아요 1 | URL
아, 저의 댓글이 두 분께 희망이 될 줄이야.ㅎㅎㅎㅎㅎ

라로 2019-12-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여섯의 사지육신관절연골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ㅎㅎㅎ
저 쉰셋의 사지육신관절연골이지만 아직 쓸만하답니다.
뭐 젊음이 안 부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괜찮다고 매일 생각하며 사는 일인입니당~.ㅎㅎㅎ
그리고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스물셋인 남자의 육신이 예순셋보다 못한 경우도 봤어요.
글구 서른여섯 아주 좋은 나이에요. 지나보니까. 스물여섯보다 더 좋은!!^^
그러니까 우리 나이탓 하지 말고 우리 몸에 충실해 보아요. 응?
이제 이사도 가시고 일도 시작하시고 그럼 마음에 여유가 있을 거예요.
근데 저처럼 책 많이 살 수 없는, 아니 5권의 책만 살 수 있는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알려줘요.
너무 어려운 부탁인가요???ㅎㅎㅎㅎㅎ 그럼 취소.ㅎㅎㅎㅎㅎㅎㅎ


syo 2019-12-24 21:1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정말 말씀대로 사지육신관절연골이란 모름지기 관리의 산물인 것 같습니다... 워낙 몸뚱아리를 방치하고 살았더니 이제 몸뚱이가 저를 방치하네요ㅜㅠ 내년에는 미안해서라도 이놈의 사지육신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습니다만, 매년 이런 결심을 해도 늘 이모양 이꼴이더라구요 ㅎㅎㅎㅎㅎㅎㅎ

아, 정말 어떤 책이 좋을까요..... 5권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권하기가 더 어렵고 조심스럽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