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은 입고 사복은 메고 군복은 들고
1
그러니까 나는 죽전역에서 출발하는 분당선을 타고 수서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그렇게 평범한 방식으로 잘 가고 있었는데 뜻밖에 바삭바삭이 끼어들었다. 바삭바삭?
고개를 돌려보니 바삭바삭은 내 대각선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성에게서 발원했다. 키는 180, 짙은 눈썹의 호남형 외모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무엇보다 반팔 티셔츠 팔 부분을 확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팽창한 단단한 팔뚝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남성이, 다름 아닌 꼬북칩(콘스프맛)을 먹고 있다. 아르마딜로칩이나 갈라파고스대왕거북칩이 아니라, 귀요미 꼬북꼬북 꼬북칩을…….
한 손은 꼬북칩 봉지의 아래쪽을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은 봉지 안과 입 안을 놀라운 속도로 번갈아 드나드는데, 손 크기나 전완근 두께 역시 만만치 않아서 두 손은 봉지에 못 넣겠군 싶을 정도다. 손 두 개를 먹는 일에 쓰느라 손잡이도 잡을 여유가 없지만, 그는 얼른 봐도 정말 튼튼해 보이는 두 다리로 딱 버티고 서서, 전동차의 어떤 진동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평안하고 열정적으로 꼬북칩을 조지고 있다. 덜컹덜컹 바삭바삭 흔들흔들 바삭바사삭.
마지막 한 줌을 꺼내 입으로 넣은 그는 봉지를 살짝 흔들어 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정성을 다해 꼬북칩 봉지를 그 시절 그 쪽지 모양으로 접기 시작했다. 풋풋한 소녀감성이 발휘되는 동안 역시 중심은 든든한 허벅지가 잡아주는 중이었다. 손에 여유가 생기자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웹툰을 보기 시작한다. 크아, 크르륵, 따위는 휙휙 넘기고, 세 줄쯤 되는 긴 대사를 만나면 미간을 오므리고 오래 멈춰 꼼꼼히 읽는다.
열차가 수서역에 도착하자, 꼬북칩남이 제일 먼저 내린다. 그리고 한 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걸어올라 저기 멀리 사라져간다. 저렇게 다부지게 생긴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저렇게 다부지게 생긴 사람이 꼬북칩을 찹찹 먹는 장면을 만나기란 더욱 힘들고, 무엇보다 그 장면을 전철 안에서 목도하는 일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 아닌가? 나는 SRT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꼬북칩남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전철 속의 다른 승객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닌가, 혹시 나처럼 다들 속으로 놀라고 있었을까? 모른 척 흘렸을 뿐, 바삭바삭의 치명적 습격에 다들 한 대씩 얻어맞은 것일까?
그렇게 나는 SRT열차에 올랐고 내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 내 옆자리에 굉장히 익숙한 뒤통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엔 마치 운명처럼, 놀라운 기적처럼, 다름 아닌 꼬북……
……칩 맛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2
월요일 아침 기차로 서울에 올라가 점심에 면접을 보고 염치도 없이 친구에게 맛있는 술과 고기를 실컷 얻어먹었다. 화요일 오전 늦게 일어나 점심에 용인으로 건너가 닭갈비를 먹고 저녁에는 인생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 저녁시간까지 스크린골프장에서 알바를 뛰고 저녁에 수서역에서 SRT를 잡아타고 대구로 돌아와, 이렇게 밤이다.
이 3일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밤이 늦었다.
--- 읽은 ---



+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 52 ~ 195
+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조셉 추나라 : 105 ~ 224
+ 이별의 푸가 / 김진영 : 116 ~ 250
--- 읽는 ---






= 헤겔 / 우도 티이츠 : 39 ~ 133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 136
=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최영기 : ~ 151
= 처음 읽는 중국사 / 전국역사교사모임 : ~ 131
= 전쟁 말고 커피 / 데이브 애거스 : ~ 106
= 스피노자 매뉴얼 /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 ~ 58